장준하 의문사 사건 네 번째 조사, 이번엔?

정희상 기자 2021. 8. 19.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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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가 장준하 의문사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에 나서기로 했다. 단일 국가기구 차원의 시도로는 이번이 네 번째다. 공권력에 살해됐다는 사실만 밝혀지면 바랄 게 없다고 유족은 말한다.
1970년대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독재체제에 대해 질타한 고 장준하 선생.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아버지께서 국가 공권력에 살해됐다는 사실만 밝혀지면 더는 바랄 게 없다. 가해 당사자 처벌은 어렵겠지만, 역사적 심판이 중요하니까.”

고 장준하 선생 장남 장호권씨(72)의 말이다. 7월22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가 ‘장준하 의문사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에 나서기로 결정하면서다. 장준하 의문사 조사는 단일 국가기구 차원의 시도로는 이번이 네 번째다. 앞서 2002년과 2004년 1·2기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진상규명 불능’, 2010년 1기 진실화해위는 ‘조사 중지’ 결론을 내려 진실을 규명하지 못했다. 국정원, 군사안보지원사령부(예전의 보안사, 기무사) 등 장준하 의문사의 배후로 의심받고 있는 주요 기관의 참고인 출석 및 자료 제출 거부라는 장벽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후 2013년 3월에는 ‘장준하 선생 사인 진상조사 공동위원회’가 지하에 잠들어 있던 장준하 선생의 유골을 감식하기도 했다. ‘두개골 함몰이 추락에 의한 골절이 아니라 외부 가격에 의한 손상이며, 장 선생이 가격을 당해 즉사한 뒤 추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새로운 법의학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국가기관의 공식 확인 절차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준하가 의문사한 1975년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 체제가 극에 달하던 때였다. 장준하는 박정희를 진정한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일제 말기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된 장준하는 일본군을 탈출한 뒤 광복군으로 활동했다. 비슷한 시기 박정희는 일왕에 충성하겠다는 혈서를 썼고, 만주국 군관학교에 들어갔으며, 일본 육사를 졸업했고, ‘다카키 마사오’라는 만주군 장교로 일제에 충성했다.

장준하는 일제하 광복군 활동을 통해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로서 광복 후에는 백범 김구의 비서로 활동했다. 백범 서거 후에는 〈사상계〉 사장을 맡아 민주 언론 창달에 기여했으며, 훗날엔 국회의원으로서 또 재야인사로 박정희 독재와 맞선 ‘민주주의자’였다. 장준하는 신민당 소속 의원이던 1969년 9월, 3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 선전부장을 맡아 박정희가 추진하던 3선 개헌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유신헌법 발효 이후인 1973년 11월에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운영위원으로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고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월8일, 개헌 논의 자체를 금지하는 내용의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를 공포했다. 장준하는 1974년 1월14일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에 따른 첫 구속자가 됐다. 당시 ‘비상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수감된 장준하는 지병인 협심증으로 같은 해 12월4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운명의 해’인 1975년 1월8일 장준하는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국헌을 준수한다고 서약한 귀하 스스로가 그 선서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헌법기관의 권능을 정지시키고, 헌법제정 권력의 주체인 국민을 강압적인 계엄하에 묶어놓고 ‘국민투표’라는 요식행위를 통해 제정한 소위 ‘유신헌법’으로 명실상부하게 귀하의 1인 독재체제만을 확립시켰다.”

당일 행방 묘연한 목격자

1975년 8월, 장준하 선생 사망 직후 추모객들의 모습.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장준하의 질타와 충고는 철저하게 배척당했다. 박정희는 오히려 계엄령, 위수령, 긴급조치 1~8호 등의 종합세트 격인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며 묵살했다. 이어 중앙정보부를 통해 장준하의 일거수일투족을 더욱 옥죄었다. 장준하는 1975년 8월17일, 지인인 김 아무개씨와 경기 포천군 이동면 도평3리 소재 약사봉으로 등반을 나섰다가 의문의 사고로 사망했다. 그 과정의 ‘유일한 목격자’라고 할 수 있는 김 아무개씨는 중앙정보부 사설 요원이라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당시 경찰과 검찰은 김 아무개씨의 진술을 바탕으로 장준하의 사망을 ‘실족사’로 결론지었다.

하지만 사건 당시부터 ‘박정희 정권의 장준하 살해’ 의혹이 꾸준히 제기됐다. 그의 시신 상태를 보고 검경의 결론(실족사)에 의문을 품은 사람이 많았다. 예컨대 그의 오른팔과 둔부엔 치료 목적 접종으로 보기 힘든 주사 자국이 있었다. 후두부엔 인공물로 타격해서 함몰된 것으로 보이는 골절상도 발견되었다. 이에 따라 일부 법의학자들은 장준하의 사인을 ‘타인에 의해 마취주사를 맞은 뒤 인공적 물체로 후두부를 가격당한 것’으로 봤다. 또한 시신이 검찰(의정부지청)의 발표대로 ‘70° 경사의 높이 약 12m인 절벽에서 추락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깨끗한 점, 함께 약사봉 정상에 올라갔다가 하산했다는 목격자 김 아무개씨의 진술이 추락 현장 및 사체 상태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 점 등으로 미루어, 장준하가 국가기관(의 하수인)에 의해 살해된 뒤 추락사로 위장당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서슬 퍼런 박정희 정권 아래서는 누구도 이를 거론할 수 없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중정)는 장준하 본인뿐 아니라 가족의 출타 사항도 일일이 체크하고 자택 전화까지 도청하는 등 그의 동향을 밀착 감시하고 있었다. 변고 일주일 전에 장준하가 무등산을 오른 것까지 중정 6국장이 동향 관찰을 직접 지시할 정도였다. 사건 전날 장준하가 민주화운동가 박형규 목사의 재판을 방청한 사실까지 중정에 보고되었다.

한편 ‘유일한 목격자’ 김 아무개씨는 사건 발생 직후인 당일 오후 4시쯤 현장을 이탈해 밤 12시까지 행방이 묘연했다. 그날 바로 실시된 현장검증에도 동행하지 않았다. 현지 경찰관서인 포천서 이동지서 경찰관은 사고 신고를 받기 전에 이미 경기도경으로부터 장준하의 사망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중정 요원들은 사망 당일 오후 5시경 사고 현장을 시찰하고 그곳에 나온 경찰관에게 “안 본 것에 대해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고 윽박질렀다고 한다.

이렇게 장준하가 사라진 뒤, 박정희 정권은 중정을 통해 그의 사망 관련 정보를 철저히 통제했다. 〈동아일보〉에 ‘출입’하던 중정 직원은 장준하 사건에 대한 취재 중단을 요구했다. 당시의 〈동아일보〉는 장준하 사망 의혹 관련 기사를 사회면 톱으로 배치했다. 중정과 검찰은 이 기사의 작성과 편집 등에 관련된 성낙오 기자 등을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사건 당일 군 정보기관인 보안사(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의 수상한 움직임도 간과할 수 없다. 사건 당일 한 아무개 105보안부대장이 약사봉 현장을 방문한 뒤 보안사 본부에 텔레타이프를 통해 장준하 사망을 보고했다. 이 내용은 당시 진종채 보안사령관에게 직보됐다. 진종채 보안사령관은 장준하 변고 다음 날인 1975년 8월18일, 청와대에서 47분 동안 박정희 대통령을 독대했다. 정부 기록에 따르면 법무부 장관은 같은 달 19일에, 중정부장과 국방부 장관은 21일에 각각 박 대통령에게 장준하 변사사건을 보고했다.

이런 정황에 따라 중정과 보안사가 직간접으로 장준하 사망과 관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이에 따른 증거와 증인, 기록도 수두룩했으나, 두 기관은 철저히 진실 규명 작업에 대한 협조를 거부해왔다. 1~2기 의문사위, 1기 진화위는 국정원과 기무사(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의 비협조 때문에 장준하의 죽음에 누가 직접 관여했는지를 밝혀내지 못하고 활동을 종료했다. 기존 조사에서는 장준하 관련 자료가 중정 3국(정보 담당) 및 판단기획국(정보취합 부서)의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국정원에 보관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사건 당일인 1975년 8월17일 오후 9시 ‘중요 상황(장준하 사망) 보고’ 이후 작성된 추가 보고문, 사건 발생 후 이동지서에서 필사해 간 변사사건 기록, ‘유일한 목격자’ 김 아무개씨와 중앙정보부의 관계에 대한 자료, 대통령에 대한 보고 등을 국정원이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그러나 국정원은 자료 제출을 거부했다. 기무사 역시 사건 당시 한 아무개 105보안부대장이 본부에 보고한 문서를 비롯해 장준하 관련 문서에 대해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

과거와 달리 전향적 기류

2013년 3월, 법의학자인 이정빈 서울대 명예교수(왼쪽)가 장준하 선생 유해(두개골 등)를 토대로 정밀감식 결과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정원은 2002년 당시의 1기 의문사위 조사에 제출한 존안 문서(정보기관이 개인·사건별로 수집한 첩보를 축적해놓은 것) 외엔 장준하 관련 자료가 없다고 공식적으로 수차례 답변한 바 있다. 그러나 2004년의 2기 의문사위는 국정원에 장준하와 관련된 다른 자료가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 제출을 요구했다. 국정원은 ‘새로운’ 장준하 사망 관련 자료를 의문사위에 냈는데 모두 814쪽에 달했다. 1기 의문사위에 제출한 자료보다 쪽수 기준으로는 훨씬 많았다. 그러나 2기 의문사위의 이런 작업 역시 조사기간 만료로 중단되고 만다.

한편 중정의 장준하 사찰 기록은 변고 당일치만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이 ‘공백’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고 당일 오후 3~4시에 장준하의 상봉동 자택에 사고를 알리는 익명의 전화가 걸려왔다. 산행 일행 중에는 같은 시간에 하산한 사람이 없어, 괴전화의 정체가 의문이다. 사건 뒤 긴 시간 동안 사라졌던 ‘유일한 목격자’ 김 아무개씨는 자신이 전화를 건 적은 없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번 2기 진실화해위는 진실 규명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반드시 국정원에 보관된 김 아무개씨 신상 및 당일 행적에 대한 자료를 제출받아야 할 상황이다.

2기 진실화해위는 정보기관의 오랜 방해 장벽을 넘어 진실의 문을 열어젖힐 수 있을까. 다행히도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전향적인 기류가 감지된다. 지난 7월7일 국정원은 과거 중앙정보부·안전기획부 수사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27건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공개 사과했다. 박지원 국정원장은 사과문에서 “2기 진실화해위에 충실히 자료를 제공해 진실 규명에 협조하는 것이 진정한 사과를 완성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권위주의 독재정권 시절 국가 폭력에 의한 억울한 죽음이 허다했지만 장준하의 죽음은 역사적 무게가 남다르다. 일본군 장교 출신 대통령의 권력체제에서 광복군 장교 출신 ‘재야 대통령’이 의문의 죽임을 당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장준하기념사업회 이준영 진실규명담당은 “장준하 선생의 죽음이 실족이 아닌 외부 가격에 의한 사망임을 증명하는 법의학 감식 자료 등 과학적 증거가 200여 쪽이나 된다. 진실화해위 조사가 개시되면 타살 증거로 제출해 공신력을 확보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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