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수송기 뜨자 6만명 비명..탈레반은 축포쏘며 환호성

박형수 2021. 8. 31.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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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미 도나휴 미 육군 82공수사단장이 카불 국제공항에서 마지막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군 철수 마감 시한인 31일(현지시간)보다 하루 앞선 30일 오후 11시 59분 카불 국제공항에서 마지막 C-17 수송기가 이륙하자 탈레반이 승리의 환호성을 올렸다. AP통신은 "공항 주변 도로 곳곳에 자동차 경적소리, 휘파람 소리가 울렸고 기쁨의 축포가 터졌다"고 전했다.

탈레반 깃발을 꽂은 자동차들이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거리로 쏟아졌다. 31일 오전 1시 자비훌라 무자히드 탈레반 대변인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완전한 독립을 달성했다"고 선포하자, 탈레반 대원들은 카불 시내 곳곳에서 자축하는 예포를 발사했다. 한 시간 가량 이어진 폭발음에 카불 시민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탈레반 깃발을 꽂은 차량이 거리로 나와 미군 철수와 아프간 독립을 축하하고 있다. 연합뉴스

뉴욕타임스(NYT)는 "환호하는 탈레반과 대조적으로 카불 일대는 체념의 분위기로 뒤덮였다"고 보도했다. 탈출에 실패한 주민들은 날이 밝자 카불 시내 은행으로 몰려가 현금을 인출하기 위해 길게 줄섰다. 아프간 중앙은행은 지난 28일 민간 은행의 영업 재개를 명령하고 1인당 현금 인출액을 일주일에 200달러로 제한했다. 생필품과 식료품 등 물가는 무섭게 치솟고 있다.

11년간 카불에서 철물 장사를 한 누룰라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탈레반이 카불에 진입한 뒤 단 한명의 손님도 없다"며 "돈 있는 사람들은 모두 외국으로 탈출했고 가난한 사람들만 남았다"고 토로했다. 국제신용평가기관 피치는 향후 2년간 아프간 경제 규모가 10~20% 가량 축소할 수 있다고 전망하며, 이는 앞서 국가적 위기를 겪었던 시리아·레바논·미얀마의 상황과 비슷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31일 오전 은행에서 돈을 찾기 위해 길게 줄을 늘어선 카불 시민들. 연합뉴스

미국인·조력자 남긴채 미군 철수…"도덕적 재앙"


남겨진 미국인 및 현지 조력자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당장 탈레반의 보복이 현실이 될 수 있다. 로이터는 전시동맹협회(AWA)의 자료를 인용해 지난 25일 기준 미국 특별이민비자(SIV) 신청자와 그 가족은 6만5000명, 제2 우선순위자(P-2) 자격이 있는 자와 그 가족은 최대 19만8000명이 아프간에 남아있다고 전했다. P-2 자격은 미국 언론사나 비정부기구(NGO) 등에서 일한 사람에게 주어진다.

SIV 소지자이자 미군 수송기를 타지 못한 하마윤은 NYT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나를 배신했다"며 "이웃들은 탈레반에게 내가 미국인과 일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나는 비참한 상태에 놓였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미국 특수부대의 통역사로 일한 마이크(가명)는 "미군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는데 결국 버려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칸다하르에서 왔다는 한 남성은 미군 통역자로 일했다는 서류를 갖고 공항에 남아있었다. 그는 AP통신과 인터뷰를 통해 "공항 주변에서 사흘간 기다렸다"며 "아직 기회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초조해했다.

미국의 민간 프로젝트로 세워진 아메리칸대학의 학생들도 고스란히 남겨졌다. 약 6만명의 학생과 친척들이 카불 공항까지 버스를 타고 갔지만, 끝내 공항 게이트를 통과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메리칸대학은 미국 국제개발처(USAID)의 자금 지원을 받아 2006년에 카불에 개교한 대학으로, 외국인 교수진이 영어로 강의하고 남녀 학생이 함께 공부하는 서구식 교육기관이다. 탈레반은 2016년 캠퍼스에 난입해 총격테러를 벌여 학생과 교수 등 16명이 사망한 바 있다.

아프간 탈출을 위해 미국 수송기 C-17에 탑승한 아프간 사람들. 연합뉴스

美 "구출 약속엔 데드라인 없다"

이날 중동을 관할하는 미 중부사령부 캐네스 프랭크 매켄지 사령관은 언론 브리핑을 통해 "이번 대피와 관련해 많은 비통함이 있다. 탈출을 원하는 모든 사람을 이송하지는 못했다"고 시인했다. 앤서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아프간에 남겨진 미국인 수가 200명 미만으로 100명에 가깝다"면서 "국무부는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미 정부에 따르면 지난 두 달 동안 미군과 연합군이 카불 국제공항에서 국외로 이송한 사람은 12만3000명이다. 이중 미국인은 6000명이고, 대다수가 아프간인이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백악관 루스벨트룸에서 아프가니스탄 상황에 관해 연설하고 있다. 이날 바이든 대통령은 미군이 아프간에 더 오래 주둔할 경우 발생할 안보 위험을 고려해 예정대로 철군을 결정한다고 밝혔다. [AP=뉴시스]

조 바이든 대통령은 "탈레반이 아프간을 떠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세계가 지켜줄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지난 27일 탈레반측 수석 협상자인 모하메드 압바스 스타닉자이는 "적법한 서류만 갖춘다면 국적에 상관없이 누구든 아프간을 떠나는 것을 막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블링컨 국무장관은 "미국을 도운 아프간인을 대피시키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그들에 대해 우리의 (구출) 약속에는 데드라인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워싱턴포스트(WP)는 수많은 사람들을 남겨둔 채 미군이 철수 완료한 것은 "도덕적 재앙"이라고 지적했다. 더힐 역시 "바이든 대통령은 이달 초 철군 종료 시한을 연장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자 '모든 미국인을 대피시키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며 이에 대한 비난에 직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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