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Y 출신도 입사하면 코딩 과외.. 기업들 "뽑을 사람이 없다"

박건형 기자 2021. 9. 7. 03:3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채용 미스매치] [中] 원하는 인재 뽑는 기업은 20%뿐
반도체공장 한번 안가본 반도체 신입사원.. 장기간 재교육 필요
전문가 "대학들 수십년째 낡은 이론 교육만, 실무능력 가르쳐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대졸 신입 사원을 뽑으면 장기간의 재교육을 진행한다. 2주간의 기본 오리엔테이션 이후에 3개월 이상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현장 실습을 한다. 반도체 설계 담당 직원의 경우 3~4개의 칩 설계 프로그램을 사용하는데 입사 후에 프로그램을 익히는 데만 1년 가까이 걸린다. 일부 반도체 계약학과 출신을 제외하면 대부분 대학에서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20년 차 대기업 반도체 개발자는 “학사 졸업생뿐만 아니라 석·박사 출신도 이론으로만 반도체를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아 실제 성과를 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코딩 수업중인 삼성 아카데미 - 지난달 23일 서울 강남구 삼성소프트웨어아카데미에서 한 강사가 코딩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고운호 기자

취업 시장에는 구직자가 넘쳐나고 있지만, 정작 기업들은 현장에서 쓸 만한 인재를 뽑기 어렵다는 불만이 높다. 본지가 지난 8월16일부터 19일까지 기업 최고기술책임자(CTO) 단체인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소속 263개 기업을 설문조사한 결과, “원하는 인력 확보가 쉽다”고 응답한 기업은 19.6%에 불과했다. ‘인재 확보가 어렵다’(37.0%)와 ‘아주 어렵다’(12.5%)가 전체 기업의 절반 수준이었다. 기업들은 우수한 인재 확보를 위해서는 대학의 역할이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학 교육에서 가장 보강되어야 할 부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현장에서 바로 적용 가능한 실무 능력’을 꼽은 기업이 65.8%로 3분의 2를 차지했다.

전문가들은 수십 년 묵은 학과 체계와 과목을 유지하면서 현실에 안주해온 한국 대학들이 기업 현장과 담을 쌓으면서 채용 시장의 미스매치가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인공지능(AI), 바이오, 배터리, 반도체처럼 한국의 미래를 좌우할 첨단 분야 인재 양성을 위해서는 대학이 앞장서서 산업의 흐름을 내다보고, 그에 맞는 새로운 과목과 교수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민구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서울대 명예교수)은 “한국 대학은 인재의 수요자인 기업에 대한 고려 없이 낡은 시스템만 고집하고 있다”면서 “기업과 함께 교육 과정을 개발하고, 3학년 이후에는 현장 인턴십을 의무화하는 등 대대적인 교육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게임회사는 신입에 코딩 과외, 배터리 회사는 물리학 수업 개설

판교의 한 대형 게임 업체는 신입 개발자에게 개발 업무 대신 숙제를 내준다. 게임 개발에 필요한 컴퓨터 언어를 공부한 뒤 간단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과제다. 대학 2~3학년 때 배워야 할 기초적인 수준이지만 상당수 신입 사원이 이 과제를 어려워한다. 대학에서 정형화된 문제풀이식으로 코딩(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운 이들은 조금만 창의적인 주문을 하면 헤매기 일쑤라고 한다. 이 회사의 간부급 개발자는 “신입들이 회사 기출 문제를 달달 외우고 입사 시험을 보는 경우가 많아 실제 프로그램 개발 능력은 엉망인 경우가 수두룩하다”며 “1대1로 붙어서 기초부터 가르쳐야 하니 답답하다”고 말했다.

최근 기업마다 인사 담당자들이 “고스펙 졸업생은 넘치는데 원하는 인재가 안 보인다”고 하소연한다. 한국 산업에서 반도체·배터리·소프트웨어 같은 첨단 기술 비중이 커지면서 기술 인력 수요가 급증했지만, 대학 졸업생들의 수준이 기업 눈높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반도체 업체 고위 임원은 “신입 사원 상당수는 전공 교과서만 봤을 뿐 반도체 라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견학 한번 못해봤다”면서 “대학의 반도체 관련 학과 교수들에게 10년 넘게 변화를 호소하고 있지만 있지만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고 말했다.

◇”SKY 출신 뽑아도 현장 적응까지 1년”

게임·소프트웨어·AI(인공지능) 업계에서는 “최근 모든 산업 분야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개발자 구인난은 대학 교육에 원인이 있다”는 말이 나온다. 실제로 상위권 대학 컴퓨터 관련 학과에서조차 코딩을 직접 하는 것보다는 이론적인 배경을 가르치는 데 집중한다. 수도권 4년제 대학 컴퓨터공학 전공 교수는 “코딩 수업은 교수가 아닌 강사가 맡는 경우가 일반적이고, 혼자서 많은 학생을 가르치기 힘들다 보니 원론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데만 주력한다”고 말했다. 게임이나 인터넷 업계에서 실제로 쓸 수 있는 코딩 응용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구조라는 것이다.

배터리 업계에선 아예 연구직 뽑기가 힘들다. 삼성·LG·SK 등 대기업들은 최근 들어 전기차 배터리 사업 비중이 커지면서 전해질·전극 소재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화학 전공자뿐 아니라 이들 소재를 효율적으로 포장하는 모듈 분야 엔지니어 수요도 커졌다. 하지만 기업들은 개발 인력의 60~70%는 화학 관련 전공자로 충원할 수 있지만 모듈 개발에 필요한 물리 전공자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막상 물리학 전공자를 뽑으면 화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가 다반사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배터리 회사 내에서 별도의 물리학 강좌가 개설되는 경우도 흔하다. 한 배터리 업체 개발자는 “LG 가 최근 오창 공장에 세계 최초로 배터리 전문 교육기관을 세우겠다고 발표했는데, 반대로 말하면 한국 대학에선 이런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재 양성 여력 없는 중소기업 “키워도 대기업 이직”

중소 업체들은 인재 부족 문제가 더 심각하다. 성적이 좋은 상위권 대학 출신은 대기업이 싹쓸이하는 데다, 대기업과 달리 자체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여건도 안 되기 때문이다. 한 전자기기 중소 업체 대표는 “사비를 털어 신입 직원들에게 2~3년씩 직무 교육을 시켜줬더니 10명 중 9명이 대기업으로 가더라”며 “최근엔 아예 대졸자 대신 정년 은퇴를 한 시니어 개발자를 뽑고 있다”고 했다. 연매출 1조원 규모 중견 화장품 업체 대표는 “업계 평균보다 연봉 수백만원을 더 주고 스펙 좋은 수도권 대학 출신을 데려오지만 실험실 연구 경험조차 없는 경우가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대학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산업 현장과 거리가 먼 이론식 교육에만 몰두한 탓에 인력 미스매치가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조대곤 KAIST 경영대학 교수는 “미국 MIT·프린스턴대, 싱가포르 난양공대와 같은 해외 기업들은 HP·인텔 등 글로벌 기업과 합작 연구소를 운영하며 대학과 기업에 필요한 개발 인력을 길러낸다”며 “산학 협력에 소극적인 대학이 현장형 인재 양성을 가로막고 있다”고 말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