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의 아프간 철수, '다 계획이 있었구나'

남문희 기자 2021. 9. 7.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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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주한미군의 분산배치 등을 검토하는 기준은, 보수 매체의 주장과 달리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가 시키는 대로 따르는지 않는지'와는 관계가 없다. 북한의 위협 여부가 기준이다.
2011년 7월 오바마 미국 대통령 재임 시절, 철군 계획에 따라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공군기지에서 미군들이 수송기에 탑승하고 있다. ⓒAP Photo

한국행을 희망한 아프간인 협력자 391명을 구출한 한국 정부의 ‘미라클 작전’에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부장관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지난 8월22일 열린 아프간 관련 20여 개국 외교차관회의에서 한국행을 희망하는 아프간 협력자 전원을 버스에 태워 카불 시내를 통과시키는 해결책을 셔먼 부장관이 제시했다는 것이다. 미국과 거래하는 아프간 버스회사의 차량을 대절해서 미군과 탈레반이 함께 근무하는 검문소를 통과한 뒤 카불 공항에 이르는 방법이었다. 카불 공항까지 협력자들을 데려갈 수단을 찾지 못하던 암담한 상황에서 셔먼 장관의 제안은 결정적이었다. 셔먼 장관으로서도 자신이 힘들었던 순간 한국 정부로부터 받았던 ‘특별 선물’에 대한 답례를 톡톡히 한 셈이다.

지난 7월25~26일 셔먼 장관의 중국 방문은 그에게 매우 치욕적인 여행이 될 뻔했다. 미·중 관계가 최악인 상황에서 중국에 북한과의 대화를 주선해달라고 부탁하러 가야 했다. 중국 외교부는 “미국은 부탁할 일이 있을 때만 우리를 찾는다”라는 볼멘소리와 함께 3월17일 알래스카 회담의 복수혈전을 벼르는 듯했다.

그런데 대반전이 일어났다. 그가 중국에 굳이 북한과의 관계를 부탁하지 않아도 된 것이다. 셔먼 장관은 7월22일 청와대로 문재인 대통령을 예방했는데 그 자리에서 문 대통령이 남북한의 통신선 복원 추진을 귀띔했다고 한다. 원래는 두 사람의 면담 일정이 잡혀 있지 않았는데 대통령이 직접 그를 부른 것으로 알려졌다. 셔먼 장관은 문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한국은 미국의 본격적인 파트너이자 진정한 파트너”라고 강조했다는 것.

7월26일 중국 톈진에서 열린 미·중 회담은 중국의 예상과 다르게 전개됐다. 중국에 더 이상 부탁할 게 없어진 웬디 셔먼 부장관이 알래스카에서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보다 더 강경하게 중국을 몰아붙였다. 북한이 중국에 통신선을 복원키로 했다는 사실을 통보한 것은 공식 발표 하루 전이었다. 셔먼 장관이 미국으로 돌아간 직후다. 중국은 영문도 모른 채 당한 셈이다.

7월27일의 남북 연락 통신선 복원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총비서가 친서를 통해 큰 그림을 그린 것이다. 김 총비서로서는 8월부터 본격화될 식량난으로 속이 타들어가는 마당에 정작 돕겠다던 중국은 미적대기만 했다. 더 이상 중국만 바라볼 수는 없었을 터이다. 그러자 중국이 바빠졌다. 남북 통신선이 복원된 7월27일부터 7월31일 사이에 중국산 식량과 정제유가 평양 시내에 쫙 깔렸다고 한다. 중국이 5월 말부터 주겠다던 식량 10만t이 이때에야 비로소 북한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곧바로 8월1일, ‘김여정 담화’가 나왔다. 그는 통신선 연결에 대해 ‘끊어졌던 것을 물리적으로 다시 연결했을 뿐, 남북 정상회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한편으론 8월의 한·미 연합훈련이 재개되는지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이어서 8월6일에는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이 아세안 지역안보포럼(ARF) 외교장관회의에서 한·미 연합훈련의 중단을 촉구했다. 거의 같은 시기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와 합동 군사훈련을 하고 있는 중국의 외교부장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7월22일 서울 외교부를 방문한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부장관(왼쪽)과 정의용 외교부 장관. ⓒ연합뉴스

비로소 북한에 전달된 중국의 식량

이 같은 왕이의 무리한 발언은 사실 북한을 겨냥한 것이다. 7월 말 중국의 쌀을 받았으니 ‘밥값을 하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자 한·미 연합훈련 시작일인 8월10일에 다시 ‘김여정 담화’가 나왔다. 한·미 연합훈련을 거론하며, “미국이야말로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파괴하는 장본인이다. 조선반도에 평화가 깃들자면 미국이 남조선에 전개한 침략무력과 전쟁장비들부터 철거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언론들은 북한이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할 것처럼 행세하더니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며 흥분했다. 그러나 전후 맥락을 따져보면 북측은 중국의 밥값 요구에 립서비스를 해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밥값으로 폭탄을 요구했는데 폭탄 대신 ‘말 폭탄’으로 갈음한 형국이다.

그러나 ‘말 폭탄’도 폭탄인 만큼 남북 통신선으로 겨우 이어놓은 남북 채널이 또다시 동력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성 김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이고리 모르굴로프 러시아 북핵 수석대표 겸 외무차관이다. 두 사람은 주말인 8월21일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해 월요일인 8월23일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한·미 북핵 대표회담 결과는 자세하게 알려진 반면 그날 오후 있었다는 성 김 대표와 모르굴로프 대표 사이의 회담에 대해서는 일절 알려진 사실이 없다. 공식적으로는 한 번 만난 것으로 돼 있지만 소식통에 따르면 한 번 더 만나기로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즉, 미국이 북한을 다시 대화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한·미 채널과 미·러 채널을 동원했는데 한·미 채널을 통해서는 공개적인 메시지 발신에 주력하고 미·러 채널을 통해서는 비공개적인 대북 직접 설득에 주력하겠다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공개 메시지의 효과를 증폭하기 위해 미국 국무부가 한·미 북핵 대표회담이 진행된 8월23일 월요일에 맞춰 ‘미국과 북한 관계 성명’이라는 이례적인 문건을 발표하기도 했다. 북한과 미국 관계를 5가지 주제로 나눴다. 문건은 첫 번째 항목인 ‘북한과의 관계’에서 미국의 궁극적 목표는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이라고 규정했다. 두 번째 항목에서는 미국의 대북 원조에 대해 ‘과거 북한이 기근과 자연재해를 겪을 때 북의 요청에 따라 식량과 긴급 지원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대북 지원은 성 김 대표의 최근 두 차례 방한과도 연결되는 대목이다. 미국 바이든 정부는 대북 인도적 지원에 관심과 의지를 보여왔다.

사실 대북한 인도적 지원에 대해서는 지난 5월21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 정상이 합의한 바 있다. 그 뒤 6월21일 서울을 방문한 성 김 대표가 국내의 대북 인도적 지원 단체 대표들을 만났다는 얘기가 있었다. 이번에도 8월23일 그와 노규덕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의 회담 내용을 보면 “한·미 양측이 보건과 감염병 방역, 식수 위생 등 분야에서 북한과의 인도적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라고 되어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대북 인도적 지원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것 말고는 마땅히 북한을 끌어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바이든의 대북정책이 제재 완화 등 선제적 조치를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사실상의 ‘전략적 인내’ 전략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미국 의회의 견제라는 현실적 제약을 과소평가한 주장이다. 8월 초 미국 의회조사국(CRS)이 발간한 대북 외교 현황 보고서는 “바이든 행정부가 북한의 점진적 비핵화에 상응해 부분적 제재 완화를 추진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관련 법안에 담긴 제한을 감안할 때 의회의 지지 없이는 점진적 제재 완화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의회의 지지 없이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제재 완화를 강행하려 할 경우 거센 저항에 부딪힐 것이란 얘기다.

7월28일 왕이 중국 외교부장(오른쪽)이 톈진에서 탈레반 2인자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와 만났다. ⓒAFP PHOTO

이런 상황에서는 인도적 지원조차 마음 놓고 하기 힘들다. 대신 한국의 대북 인도적 지원을 미국이 뒷받침해주는 게 최대치인 것으로 보인다. 바로 2018년 모델이다. 먼저 남북 채널이 열리고 대북 인도적 지원 문제가 떠오르면 미국이 자연스럽게 참여해 북·미 채널을 열어가는 방식이다. 남북 간 인도적 지원 문제가 떠오르면 한·미 간, 북·미 간 대화가 동시에 굴러가게 된다. 이때 미국은 뉴욕 채널과 베이징 채널을 가동할 수 있다.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7월27일 통신선을 복원하는 ‘플랜 B’를 시작했을 때도 미국의 예상되는 움직임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지난 4월까지만 해도 북한의 시야에는 오직 중국뿐이었다. 한국과 미국은 없었다. 그러나 중국이 약속했던 지원은 않고 무리한 요구만 계속하자 중국과의 관계는 김여정 선에서 대응(플랜 A)하며 김정은 본인은 보다 큰 그림에 주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등장의 각별한 의미

바로 이 시점에 러시아가 등장했다는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김여정의 두 번째 담화로 인해 한·미 연합훈련 이후에도 남북 채널 재가동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가 촉매제 역할로 등장한 것이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미·러 북핵 대표회담을 마친 뒤 모르굴로프 차관이 본국으로 돌아가면 러시아가 적절한 시점에 북한에 특사를 파견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미국이 러시아에 기대하는 비공식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한·미는 공개 메시지로 북한을 설득하고 러시아는 직접 대면으로 김 총비서를 설득하는 것이다.

미국이 러시아 카드를 쓴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지난 5월19일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을 만나 6월16일 미·러 정상회담까지 북·미 대화에 대한 김 총비서의 전향적 반응을 이끌어내 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당시 라브로프 장관이 직접 외교 채널을 동원해 북한을 설득했다고 한다. 북한은 이에 대해 미·러 정상회담 다음 날인 6월17일 김정은 총비서가 직접 “대화에도 대결에도 다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라며 처음으로 대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즉 러시아가 움직이면 북한이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두 번째에 해당하는 이번 러시아 카드는 웬디 셔먼 부장관이 중국을 통해 북한을 끌어내려던 노력이 사실상 무산되면서 본격 가동됐다고 한다. 미국의 요청에 푸틴 대통령이 직접 라브로프 외무장관에게 협조를 지시했다. 라브로프 장관은 이번에 모르굴로프 차관에게 방한을 지시하는 등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미군의 아프간 철군과 탈레반의 재집권 등 급변하는 아프간·중앙아시아 사태에 대해 러시아는 겉보기에 중국과 보조를 맞추는 것 같다.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테러 방지를 위한 중·러 합동 군사훈련을 벌인다. 서방 외교관들이 다 떠난 카불 외교가를 중국 대사관과 함께 러시아 대사관이 지키고 있다. 그러나 아프간 문제에서 러시아는 중국과 보조를 맞출 생각이 별로 없는 듯 보인다.

중국은 7월28일 왕이 외교부장이 톈진에서 탈레반 2인자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를 만날 때만 해도 탈레반의 집권이 신장웨이우얼 지역에 미칠 영향에 대해 주로 관심을 보이며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왕 부장은 직접 ‘동투르키스탄 이슬람운동(ETIM)’을 거명하며 ETIM 등 모든 테러단체와 선을 그으라고 탈레반에 요구했다. 아프간 재건을 위해 중국의 경제지원이 필요한 바라다르는 “어떤 세력도 아프간 영토를 이용해 중국에 해를 끼치는 일을 허락하지 않겠다”라는 극히 외교적인 수사로 몸을 낮췄다. 실제로는 ETIM 등 이슬람 과격단체들의 상당수가 파키스탄 북서부 산악의 근거지에서 아프간 영토를 통과하지 않고 중국을 위협할 수 있기에 하나 마나 한 소리였다. 중국도 그것을 모를 리 없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점차 아프간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아프간의 재건과 평화를 위해서라지만, 1조 달러어치에 이른다는 아프간의 막대한 광물자원과 시진핑의 숙원사업인 일대일로 사업 추진 등을 염두에 두며 점점 더 빠져들고 있다.

반면 러시아는 아프간에 발을 담글 생각이 전혀 없다. 1980년대에 10년간 아프간에서 겪은 혹독한 경험을 통해 끔찍한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보는 아프간의 미래는 비관적이다. 탈레반이 집권해도 내전이 끝나지 않으리라 본다.

대신 러시아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관심이 높다. 러시아는 2014년 크림반도 침략으로 인한 미국과 서방의 경제제재로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2016년의 미국 대선 개입 의혹, 시리아 사태 개입 등으로 트럼프 정부 당시에 이미 미국 의회엔 여러 건의 대(對)러시아 제재 법안이 발의되어 있었다. 공화당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 민주당 봅 메넨데스 상원의원 등이 발의한 법안은 ‘러시아 국채 거래 금지, 미국 내 러시아 국영은행 활동 금지, 테러지원국 명단 포함, 대러시아 투자 금지, 푸틴 대통령과 측근들에 대한 개인 제재’ 등 역대 최고 수준의 제재 조치들을 담고 있다. ‘지옥의 제재’ 법안으로 불리는 이 발의안이 그대로 실행된다면 러시아 경제는 파탄에 직면한다. 지옥의 제재 법안은 트럼프 정부에서 대통령의 반대로 채택되지 못했다. 바이든은 트럼프와 다르게 대처할 것이라는 얘기들이 많았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 역시 북한·이란·아프간 등이 얽힌 지정학적 상황에서 러시아의 협조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대통령이 러시아 제재 관련 법안들을 붙들고 버틸 수밖에 없다. 대신 러시아에 강경한 의회의 압력을 버텨내야 한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으로서는 바이든이 의회에 맞서 버티게 하기 위해서라도 미국 정부에 손을 내밀 수밖에 없다.

성 김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왼쪽)와 이고리 모르굴로프 러시아 북핵 수석대표. ⓒ연합뉴스

미국 바이든 정부 역시 미·러 관계를 개선할 인센티브를 갖고 있다. 이란과 북한 문제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상원의원 시절부터 미군의 아프간 주둔에 회의적이었다. 아프간 전쟁은 9·11 테러를 응징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테러 위협을 제거하는 데서 종료해야 한다고 믿었다. 미국이 아프간 국가의 재건까지 감당하려 한 것이 큰 오류였다는 뜻이다. 이 같은 신념은 미군 철수 직후 아프간 정부의 극적인 붕괴를 지켜보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바이든 대통령의 이 신념은 어떤 면에서 러시아의 아프간에 대한 인식과 통한다. 바이든은 블링컨 국무장관과 설리번 안보보좌관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한다. “미국이 뭘 하든 아프간은 또다시 내전에 돌입할 것이 분명하다. 미국은 절대로 아프간의 내전을 막을 수 없다. 아프간으로 끌려 들어가면 안 된다.”

따라서 바이든 대통령에게 아프간 철군은 필연적인 사건이었다는 의미다. 미국 측이 철군을 서두르게 된 배경은 따로 있다. 바로 미국의 대전략 변화이다. 1990년 냉전 종식 이래 미국은 중동과 동아시아라는 두 개 지역분쟁에 비중을 두는 전략을 펼쳤다. 그러나 중국·러시아라는 강대국이 미국에 도전하는 시대가 되었다. 러시아와는 협력관계가 가능하지만 중국과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중국과의 ‘초경쟁(hyper-competition)’이라는, ‘강대국 대 강대국’ 구도의 경쟁에 초점을 둔 대전략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에 이어 바이든 행정부가 발표하는 각종 전략문서의 핵심이기도 하다.

두 개의 지역분쟁 대비 전략에서 중국과의 초경쟁 대비 전략으로 전환하려면 당연히 전 세계 미군 배치의 변화가 필요하다. 지난 2월4일 바이든 대통령은 국무부 연설에서 국방부에 ‘전 세계 미군 배치태세 재검토(GPR)’를 주문했다. 이는 아프간과 중동에서 미군을 철수시켜 동아시아 또는 인도·태평양 지역으로 재배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바이든 대통령의 아프간 미군 철수는 미국의 대전략 변화에 따른 GPR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당초 미국 국방부는 GPR 결과를 올해 중반까지 발표하기로 했다. 그러나 8월 말 현재까지도 결과가 나온 것 같지 않다. 흘러나오는 얘기들에 따르면 내부 진통이 있는 듯하다.

사실 미군 재배치 검토는 트럼프 정부에서도 진행되어온 일이다. 트럼프 정부에서 논의의 초점은 중동이나 아프간에서 미군을 철수해 동아시아나 인도·태평양으로 집결시킨다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이 논의의 핵심은 ‘동아시아에 붙박이처럼 전진 배치되는 주한미군과 주일 미군을 중국을 겨냥해 어떻게 재배치할 것인가’였다. 지난해 7월17일 미국 육군대학원 산하 전략연구원(SSI)이 발표한 〈군의 변신:인도태평양사령부의 초경쟁과 미 육군 전역 설계〉 보고서에서도 명확한 결론을 내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보고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보고서는 인도·태평양 지역에 대해 “중국과의 초경쟁을 펼치는 시작점이자 가장 중요한 전역”이라며, “중국은 유사시 미군을 패퇴시키는 것을 염두에 둔 군 현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그런데 현재 미군의 전진 배치 태세를 보면 주로 ‘일본과 한국에 집중’돼 있는데 이는 “한국전과 냉전의 유산에 기반한” 배치라는 것이다. 즉 미군의 현 배치 상태가 “중국과 초경쟁 또는 무력충돌을 염두에 둔 전략으로 반드시 유용하다고 볼 수는 없다”라고 한다. 또한 이렇게 전진 배치된 미군 전력이 중국의 미사일과 잠수함, 유인·무인 공중 무력 시스템의 표적 내에 있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보고서는 첫째로 “향후 역내 배치는 훨씬 더 광범위하고 다양한 장소로 분산해서, 선제공격으로부터 회복할 수 있는 재생성, 특정 시간과 장소에 가장 적절히 전력을 투입할 수 있는 기민성, 한 곳의 전력이 완벽히 소멸하더라도 보충할 수 있는 잉여성 등을 확보해야 한다”라고 제언했다.

8월16일 한·미 연합 훈련이 진행 중인 경기도 평택시 캠프 험프리스 풍경. ⓒ연합뉴스

미국의 대전략 변화에 따른 아프간 철수

보고서는 특히 “북한은 핵, 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와 운반체계의 실전배치를 지속하겠지만 재래식 전력은 오히려 위축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는 결국 한국군이 전시작전권 인수 및 군 현대화를 통해 좀 더 큰 책임을 맡아야 한다는 이야기로 귀결된다. 즉 주한미군이 현재처럼 붙박이로 한국에 주둔하는 것보다는 “대중국 전략에 대해 공동의 인식을 공유하면서 당장 전략의 통합이 가능한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타이완 등 3개국”으로 분산하거나 최소한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고서 작성을 주도한 네이선 프레이어 미국 육군대학원 교수는 당시 이 문제를 취재한 VOA 방송 측에 “주한미군 철수나 감축을 옹호하는 건 아니다”라면서도, “한정된 예산과 자원을 고려할 때 중국의 위협에 초점을 둔 전력 운용의 최적화는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2021년 들어 분위기가 좀 바뀌었다. 주한미군의 분산배치와 통합적 운용 그리고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얘기는 원론적으로 나오지만 지금이 이런 조치를 실행할 시기인지에 대해서는 신중해졌다. 미국 측이 볼 때 지난해까지는 트럼프와 김정은 간의 우호적 관계로 한반도 긴장 상황이 많이 누그러졌기 때문에, 주한미군을 그대로 두기보다는 중국 견제에 효과적인 곳으로 분산배치하거나 유연성을 발휘하자는 주장이 쉽게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바이든 정부 들어 북한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그런 얘기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북한이 미국에 대한 핵과 대륙간 탄도미사일 위협을 강화하고 있다. 긴급히 대처해야 할 사안’이라는 목소리가 워싱턴에서 다시 등장했다. 미국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중국에 초점을 둔 국방전략이 주한미군 배치와 역할에 어떤 영향을 줄지 현 시점에서는 불명확한 부분이 많다’라는 식의 원점 회귀적 얘기들이 많다고 한다.

다시 말해 미국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나 분산배치 등을 검토하는 기준은, 이른바 보수 매체나 거기에 단골로 출연하는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주장과 달리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가 시키는 대로 따르는지 않는지’와는 관계가 없다. 아프간에서 봤듯이 미국은 오히려 그런 단세포적인 태도를 좋아하지 않는다.

주한미군의 유연성과 분산배치 기준을 판단하는 기준은 바로 한반도에 대한 북한의 위협 여부라 할 것이다. 미국 처지에서는 북·미 관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난해 미국 대선까지만 해도 김정은 총비서와 북한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이었던 바이든 행정부가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미국으로서는 문자 그대로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해야 주한미군을 ‘중국과 초경쟁하는 대전략의 현장으로 분산배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왜 필사적으로 북한으로 하여금 분란을 조성케 하는 데 매달리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주한미군을 앞으로 타이완이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맞닥뜨리지 않고 한반도에 묶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문희 기자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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