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 일병, 가혹행위에 극단 선택"..군인권센터 "함장은 2차 가해·배 떠나 수사도 어려워"

오경민 기자 2021. 9. 7.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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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피해자, 가혹행위 호소에도 가해자와 분리 조치 안 해
가해자들 불러 한 자리에서 대화도 ‘2차 가해’ 저질러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이 7일 오전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에서 해군 강감찬함 소속 일병 사망 사건과 관련한 기자회견문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가혹행위를 당한 해군 일병을 부대 지휘관이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피해자는 함장에게 가혹행위를 호소했으나 가해자들과 분리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피해자가 자해를 시도하자 피해자와 가해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 대화하게 하는 등 ‘2차 가해’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후 해당 일병은 목숨을 끊었고, 군이 제대로 조사하지 않는 사이 가해자들은 40여일 일정으로 출항을 나간 상태여서 ‘말 맞추기’ 가능성도 제기된다.

군인권센터는 7일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 교육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해군 강감찬함에서 선임병 등으로부터 구타, 폭언, 집단 따돌림을 겪은 정모 일병이 휴가 중 자택에서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다”며 “함장, 부장 등 간부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도 피해자 보호 구제조치를 취하지 않아 사실상 방치했다”고 밝혔다.

군인권센터에 따르면 정 일병은 지난해 11월 해군에 입대해 지난 2월1일 강감찬함에 배속받았다. 열흘 뒤 정 일병의 아버지가 사고를 당해 정 일병은 간호를 위해 2주간 청원휴가를 다녀왔다. 이때부터 선임병들의 집단따돌림, 구타, 폭언 등이 시작됐다고 한다. 3월16일에는 선임병 두 명이 근무 중 실수한 정 일병의 가슴과 머리를 밀쳐 갑판에 넘어뜨리고, 정 일병이 일어나자 거듭 넘어뜨렸다. 정 일병이 “제가 어떻게 해야 되나”라고 묻자 “뒤져버려라”라고 했다. 이밖에 승조원실 등에서 욕설, 폭행이 여러 차례 있었다는 진술도 나왔다. 가해자들은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군인권센터는 이 사실을 알게 된 함장 등 상관이 피해자와 가해자들을 분리시키지 않는 등 피해자를 방치했다고 주장했다. 군인권센터에 따르면 3월16일 정 일병은 피해 사실을 함장에게 신고했다. 그러나 함장은 피해자와 가해자들을 분리하지 않았다. 피해자의 보직을 변경했을 뿐 하선시키지 않아 피해자는 같은 배 안에서 가해자들을 계속 마주했다. 함장은 군 수사기관에 신고하거나 지휘관에게 보고하는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군인권센터는 함장이 정 일병과 가해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 대화하게 하는 등 2차 가해도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군인권센터에 따르면 함장은 지난 3월27일 새벽 1시쯤 정 일병을 불러 ‘가해자들에게 사과를 받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한 뒤 가해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 대화하게 했다. 군인권센터는 “바다로 출항해 일정기간 승조원끼리 항상 붙어있어야 하는 해군 특성상 피·가해자 분리는커녕 화해시킨다는 명목으로 한 자리에 불러 사과시킨 것은 엄연한 ‘2차 가해’이자 매우 부적절한 조치”라고 비판했다.

정 일병은 피해 사실 신고 이후 자해를 하는 등 정신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모습을 보였지만 이 때도 제대로 된 조치는 없었다고 군인권센터는 밝혔다. 군인권센터는 “함장은 정 일병의 자해 사실을 알고도 정 일병을 하선 조치하지 않았고 ‘도움병사 C등급’ 이상으로 지정하지 않는 등 정 일병을 방치했다”고 했다. 정 일병은 지난 4월6일이 되어서야 배에서 내려 정신과에 입원했다. 병원에서 6월8일 퇴원하며 휴가를 나온 정 일병은 열흘 뒤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군인권센터는 “군사경찰대가 유가족에게 중간 수사브리핑을 하는 과정에서 정 일병의 입대 전 정신병력을 언급하고, 함장 등 지휘관의 변명을 전달했다”며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의지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군인권센터에 따르면 정 일병은 입대 전 정신과 진료를 받은 이력이 사실이지만 건강한 상태로 입대했다. 훈련소를 좋은 성적으로 수료하고, 자대 배치 이후에도 부장으로부터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등 건강하게 지냈다고 설명했다.

김형남 군인권센터 사무국장은 “건강했던 정 일병이 우울증을 호소하고 자해 등을 한 뒤 결국 사망에 까지 이르게 한 것은 결국 군대 내의 가혹행위와 방치”라며 “정 일병의 정신병력을 유가족에게 언급한 것은 결국 ‘죽을 사람이 죽었다’는 식으로 몰아간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군인권센터는 군에서 제대로 된 수사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강감찬함은 지난 6월27일 코로나19 확진자가 속출한 해군 청해부대 함정을 귀항시키는 임무를 위해 파견됐다. 함장, 부장 등 ‘2차 가해’를 한 것으로 지목된 이들은 아직 이 배에 타고 있다. 군인권센터는 “진술이 오염될 가능성이 있음에도 군사경찰은 배가 돌아오면 조사할 예정이라며 태평한 소리만 하고 있다”면서 “가혹행위 가해자들 역시 변사 사건 수사에 대한 ‘참고인’으로만 조사받아 제대로 된 수사는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국방부는 “정 일병에 대한 선임병들의 폭언 사실은 확인됐으며, 폭행과 병영 부조리에 대해서는 수사 중에 있다”며 “긴급파견을 나간 간부들에 대해서는 임무를 마치고 복귀한 후에 추가 조사를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국방부 관계자는 “가해자들이 참고인에서 용의자로 바뀌었는지 여부는 수사 중인 사안이어서 확인이 어렵다”고 말했다.

오경민 기자 5k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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