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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고 최후호소 "폐교는 막아달라"..당국 "특성화고도 안돼"

남궁민 입력 2021. 09. 15. 05:00 수정 2021. 09. 15.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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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횡성군 민사고 교정. 남궁민 기자

학생 수가 줄면서 지방 학교가 폐교한다는 소식은 드문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최근 한 산골 학교가 문을 닫으려 한다는 소식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전국에서 우수 학생이 모이는 민족사관고가 그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자율형사립고(자사고) 폐지 정책에 따라 2025년 일반고교 전환을 앞둔 민사고는 왜 폐교를 고민하고 있을까.

강원 횡성군 민사고에서 만난 한만위 교장은 "일반고로 전환하면 전국에서 학생을 뽑아 최고의 인재를 키우는 지금의 교육 방식을 유지할 수 없다"며 "건학이념을 지키지 못한다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민사고가 일반고가 되면 전체 인구의 3%에 그치는 강원도에서만 학생을 뽑아야 한다.


국·영·수 30%뿐..."일반고 되면 민사고 교육 못 해"


강원 횡성군 민사고의 스페인어 교실. 민사고는 교사마다 연구실 겸 교실을 담당하는 교과교실제를 운영한다. 남궁민 기자
민사고는 현재 약 300개 과목을 운영하고 있다. 매 학기 학생 수요를 확인해 새로운 수업을 개설한다. '천체 관측'이나 '임진왜란의 이해' 같은 소규모 교과가 상당수 운영된다. 국어·영어·수학은 전체 수업의 30%에 그친다.

하지만 자사고 지위가 사라지면 이런 교과를 유지할 수 없다. 일반고가 되면 지금보다 필수교과 편성을 대폭 늘려야 하기 때문이다. 교사 선발권도 사라져 현재 전체 교직원의 90%에 달하는 석 박사급 인력 채용도 어려워진다.

민사고 측은 대안학교로 전환하는 방안도 검토했지만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한 교장은 "대안학교로 전환하려면 민사고를 폐교한 후 다시 문을 열어야 한다"며 "현행법상 학교법인은 문을 닫으면 모든 재산을 국가에 헌납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명재 설립자는 파스퇴르유업을 통해 번 돈 1000억원을 민사고 건립과 운영에 투자했다고 알려져 있다. [중앙포토]

민사고는 1996년 최명재 전 파스퇴르유업 회장이 사재 약 1000억원을 들여 만들었다. 128만 제곱미터(약 39만평) 넓이의 교지에 20여년간 투자가 이어지면서 현재는 교육시설이 약 20동에 이른다. 모든 시설은 민사고가 한 번 문을 닫으면 다시 대안학교에서 활용할 수 없게 된다.


'대안교육 특성화고' 원하지만…교육청 '반대'


민사고 교장실에서 만난 한만위 교장. 남궁민 기자
민사고 측은 교육 당국에 '대안교육 특성화고' 지정을 요청하고 있다. 특성화고교의 한 종류인 대안교육 특성화고는 전국에 25곳(지난해 기준)이 있다. 자유롭게 교과를 편성하고 교원을 뽑을 수 있는 데다 전국에서 학생을 선발하는 권한도 있다. 지금의 민사고 교육 방식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대안이다.

하지만 지정 권한을 가진 강원도교육청은 대안교육 특성화고 전환에 부정적이다. 강원도교육청 관계자는 "일반고 전환이라는 교육부 정책의 큰 틀을 벗어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교육청이 나서서 개별 학교의 지위를 바꾸진 않겠다"고 말했다.

교육계에서는 민사고를 어떤 형태든 존속시키는 대안을 진보교육감이 용납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민병희 강원도 교육감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결성에 참여한 해직교사 출신 진보 교육감이다. 한 교육계 관계자는 "민사고의 교육 방식이 '평준화'를 강조하는 진보 교육감의 철학과 어긋난다"며 "소수정예를 강조하는 민사고를 그대로 존속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문학 영재학교' 전환도 안 된다는 교육 당국


수업을 마친 후 자유시간을 보내는 민사고 학생들. 음악 편집, 코딩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남궁민 기자
영재학교 지정도 대안으로 꼽힌다. 문제는 교육 당국이 인문학과 융합을 강조하는 민사고를 영재학교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재교육법은 영재학교의 교육 대상을 '재능이 뛰어난 사람'으로 넓게 정의하지만, 현재 운영 중인 영재학교는 모두 과학·수학에 관련된 곳뿐이다.

김혜림 교육부 고교교육혁신과장은 "법적인 부분을 좀 더 따져봐야겠지만, 영재교육은 특정한 분야에 능력을 갖춘 학생을 가르치는 거라고 본다"며 "'과학예술영재학교'도 있지만, 과학고랑 유사한 점을 고려하면 민사고가 영재학교의 취지에 맞는지 따져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몇 년째 해결책이 나오지 않자 민사고는 전환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이창규 민사고 사무국장은 "융합형 인재를 키운다며 수능에서 문·이과 구분도 폐지하면서, 영재교육은 칸막이를 쳐놓고 있다"며 "해외에는 인문학 영재를 키우는 학교가 많지만, 유독 우리는 이공계 영재만 인정한다"고 꼬집었다.

교육 전문가들은 영재교육에 대한 시각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수학이나 과학에만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보는 건 낡은 사고방식"이라고 말했다. 이어 "사람 간의 소통이나 여러 학문 간 융합 능력이 중요하다"며 "특정 분야로 영재교육을 제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올바른 엘리트 키워야"


한만위 민사고 교장. 장진영 기자
한 교장은 민사고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엘리트 교육'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그는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는 영향력이 큰 사람이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며 "능력이 있는 학생을 제대로 가르쳐 제대로 된 인재로 만드는 곳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자사고 일괄 폐지'가 대표하는 교육 평준화 정책에 대한 비판도 내놨다. 한 교장은 "모든 학교에서 똑같은 교육만 하게 하면 인재는 결국 해외로 나간다"며 "이런 학생을 모아서 민족, 역사를 가르치며 키워내는 곳이 한 곳은 있어야 하지 않냐"고 말했다.

교육부는 지난달 31일 "고교 체제 개편은 차질없이 추진하겠다"며 자사고 폐지를 밀어붙이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일괄 폐지'를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육부 관계자는 "학생 모집도 못 하는 자사고는 문을 닫아야 하지만, 역사도 길고 제대로 운영되는 곳도 있다"며 "몇몇 학교 때문에 자사고 폐지를 뒤집을 순 없어서 난감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남궁민 기자 namgu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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