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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이벤트'가 열렸다..'인간 제물' 위로 쌓은 신라의 권력

노형석 입력 2021. 09. 15. 05:06 수정 2021. 09. 15.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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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의 시사문화재][노형석의 시사문화재] 경주 월성 인신공희 흔적의 비밀
지난 7일 경주 월성 서성벽 발굴 현장에서 장기명 학예연구사가 인골이 나온 기저부 조성층 위의 출토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부엽 공법 등을 써서 태운 볏짚들을 올린 까닭에 거멓게 변색된 기저층 위에 2017년과 올해 발굴된 남녀 인골과 여성 인골을 프린트한 대형 종이 표시가 보인다. 출토 지점 위쪽에는 길쭉한 큰 돌을 잇따라 놓고 그 위에 돌들을 쌓아올린 성벽의 중심골조 부분, 그 옆으로 흙을 덧쌓아 성벽의 너비를 넓힌 성토 흔적이 나타난다.

“1500년 전 참수된 백제 성왕의 죽음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지난 7일 낮 신라 천년 왕성인 경주 월성의 발굴 현장을 돌아보며 조사단 총책임자인 김성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이런 소회를 털어놓았다. 연구소는 이날 놀라운 뉴스를 발표한 참이었다. 월성 서성벽과 성벽에 연결된 옛 서문터 부근의 단면을 발굴조사하다 내부 바닥층에서 2017년에 이어 또다시 인골이 나왔으며, 성벽을 쌓을 때 사람 제물을 바친 신라인들의 인신공희 희생자로 판명됐다는 내용이었다. 김 소장은 이 소식을 들으며 월성 건물터 어딘가에 묻혔을지 모를 성왕의 머리를 생각했다고 했다.

최근 경주 월성 서성벽 기저층에서 인신공희의 제물로 발견된 20대 여성의 인골.

월성 성벽에서 나온 인골과 백제 성왕의 머리는 대체 어떤 연관이 있을까? <삼국사기>에는 554년 신라군이 점령한 관산성(충북 옥천)을 태자 창(위덕왕)이 치러 갔다가 고립됐다는 소식을 듣고 성왕이 구원하러 정예군을 끌고 갔다가 매복한 신라군에 잡혀 살해당한 기록만 전한다. 하지만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인 <일본서기> ‘흠명기’조에는 상세한 후일담이 나온다. 고도라는 신라 노비가 포로인 성왕의 목을 베어 구덩이에 파묻었다고 전하는 한편으로, 다른 책 기록에 주검의 몸은 백제에 돌려보냈으나 머리는 경주 월성 북청 계단 아래 묻었고, 왕이 신하들과 정사를 논의하던 그 관청을 일컬어 도당이라 부른다는 내용이 있다고 명기한 것이다. 성왕의 참수로 신라와 백제는 철천지원수 사이가 된다. 그 배경엔 <일본서기> 내용대로 왕의 머리를 월성 관청 지하에 묻고 밟고 다니게 한 굴욕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런 매장의 의미가 마냥 간단치 않은 의식적·종교적 의미를 품고 있다는 것을 발굴 결과는 일러준다.

2017년 월성 서성벽 아래 기저층에서 발견된 50대 남녀의 인골. 두 사람의 인골에서 북동쪽으로 약 50㎝ 떨어진 지점에서 최근 20대 여성의 인골이 출토됐다. 모두 성벽의 안전을 기원하는 인신공희의 희생자들로 판명됐다.

성벽 안 인골이 연속 출토된 데 대해 국내 학계는 신라인들의 종교적 의식 세계와 권력자들의 사고방식 일단이 드러난 것이란 해석을 내놓고 있다. 문터와 건물, 토목구조물 아래 생명을 희생시킨 인간 제물을 놓아 땅 신에게 건조물의 안전과 번영을 비는 것은 고대 인류사에서 널리 퍼진 습속이었다. 성벽, 특히 성벽의 문터 앞에서 인간을 희생물로 삼아 제례를 지내는 것은 유럽의 고대 켈트족 사회나 중국의 선사시기인 룽산(용산)문화, 상나라 때 성행했다. 2017년 월성 서성벽 단면을 발굴하면서 그 속에서 50대 남녀 인골이 나오자 인신공희의 흔적일 것이라는 추정이 제기됐지만, 무덤이나 집단 살해의 흔적일 것이란 반론도 있었다. 그러나 추가 발굴 결과 장신구를 착장한 여성의 인골과 술을 따른 듯한 제례용 토기, 늑골 부분만 자른 각종 동물 뼈까지 나오면서 인신공희는 사실로 굳어져가는 분위기다. 무덤 특유의 시설이 없고 인골들이 일정한 방향축을 형성하면서 놓여 있다는 점도 그렇다. 더욱이 1985년 서문터 북쪽을 당시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시굴한 결과 3구의 인골을 확인했고, 90년에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무려 23구의 인골을 발굴한 사실도 재조명되면서 인신공희 흔적임이 뚜렷해졌다.

1985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월성 서성벽 서문지 앞을 시굴조사하다 출토된 인골. 2017년과 올해 서성벽에서 나온 인골과 출토 지점이 지척이다.

재밌는 건 이런 습속이 기원후 국가체제가 등장하면서 사라졌는데 유독 신라만 1천여년 시차를 두고 나타났다는 점이다. 왜 이런 지체 현상이 나타난 걸까? 연구자들은 분명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인골의 희생 의식에 대해 좀 더 가지를 쳐 해석해보면 당혹스러운 실상도 떠올리게 된다. 1700년 전 신라의 천년 왕도 서라벌(경주)의 월성 성벽 앞에서 성스러운 제전을 내세운 죽음의 이벤트가 벌어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신라의 제왕과 성골·진골 왕족들은 4세기 초중엽 자신들의 거처인 도읍 경주의 월성을 둘러싼 거대 성벽을 쌓으면서 성문 앞 너른 문터에서 평민과 노비들을 희생시켜 성벽이 들어설 자리 위에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렀다. 인신공희는 권력을 치장하고 과시하기 위해 기획한 제전 성격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섬뜩한 참극으로 비치겠지만, 당시엔 신성한 국가 행사로 간주됐고, 희생자들 또한 영광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연구소나 학계의 추정이다. 발굴된 인골 어디에도 저항의 흔적이 없고, 목걸이로 장식되고, 짚과 목재덮개 등으로 덮은 의식의 흔적이 확인된다는 점이 근거다.

지난 7일 월성 서성벽 서문 추정터의 발굴 현장을 찍은 사진. 부엽 공법 등을 써서 태운 볏짚층 때문에 거멓게 변색된 기저층 위에 2017년과 올해 발굴된 남녀 인골과 여성 인골의 프린트 종이들이 각각 놓여 있다. 출토 지점 위쪽에는 길쭉한 큰 돌을 잇따라 놓고 그 위에 돌들을 쌓아올린 성벽의 중심골조 부분이 보인다. 중심골조 옆으로는 흙을 덧쌓아 성벽의 너비를 넓힌 성토 흔적이 드러나 있다.

서성벽 단면 발굴 현장에는 부엽 공법 등을 써서 태운 볏짚층 때문에 거멓게 변색된 성 기저층 바닥에 2017년과 올해 발굴된 남녀 인골과 여성 인골의 프린트 종이들이 각각 놓여 있었다. 출토 지점 위쪽에는 길쭉한 큰 돌을 잇따라 놓고 그 위에 돌들을 쌓아올린 성벽의 중심골조 부분이 보였고, 중심골조 옆으로는 흙을 덧쌓아 성벽의 너비를 넓힌 성토 흔적이 드러났다. 백제 풍납토성과 비견되는 높이 10m 이상, 너비 40m 이상의 웅장한 성벽과 그 안에 깔린 인골들의 자취를 보면서 당시 마립간이란 왕호를 쓰면서 국력이 뻗어나가던 신라인들의 옹골찬 힘과 신비로운 내면 세계가 느껴지는 듯했다.

경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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