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사소해서 잊고 지낸 일상이 모인 '한 폭의 세밀화'..연극 '천만 개의 도시' [리뷰]

선명수 기자 입력 2021. 9. 15. 22:27 수정 2021. 9. 15.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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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무수한 삶 순간 포착한 47개 장면
13명 배우가 100여개 캐릭터 연기
“하나의 도시가 아닌 각자의 도시”

오는 19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하는 <천만 개의 도시>는 주인공도, 뚜렷한 서사도 없는 독특한 연극이다. 서울시극단 제공

사소하고 평범한 보통의 일상이 모여 도시의 풍경을 만든다. 지난 3일 막이 오른 서울시극단의 <천만 개의 도시>는 그 제목처럼, 한때 인구가 1000만명에 육박했던 거대 도시 서울을 이루는 무수한 삶의 순간들에 집중한 연극이다.

이 연극엔 주인공도, 뚜렷한 서사도 없다. 13명의 배우가 행인 등 평범한 사람들부터 연못의 잉어, 새, 고양이까지 100여개의 캐릭터를 연기한다. 공연이 시작되면 우리가 수없이 일상에서 마주한,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일상적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무대는 도시의 축소판이다. 평범한 버스 정류장과 일정한 도시 소음이 들리는 지하철 안, 층간 소음이 울리는 다세대 주택, 입시 학원과 코인 빨래방, 광장과 공원, 시멘트를 뚫고 자란 잡초가 싱그러운 기운을 뿜어내는 어느 골목의 담벼락까지. 연극은 이 모든 공간을 암전 한 번 없이 한 무대 위에서 구현한다.

그 안의 대화들도 너무나 사소하고 흔해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다. 둘셋씩 짝을 이룬 배우들은 연봉 걱정이나 틀어진 여행 계획, 순대를 소금에 찍어 먹는지 아니면 쌈장에 찍어 먹는지, 헬스장에서 개인지도(PT)를 받을지 말지 따위의 대화를 쉼 없이 이어간다. 완결성 있는 서사, 개성이 뚜렷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연극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낯설게 느낄 수 있다.

결국 연극이 보여주는 것은 일상 그 자체다. 도시에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순간순간을, 165분의 러닝타임 동안 47개 숏폼(short-form) 장면에 담아냈다. 각각의 개별 장면들이 흐르듯 나열되며 작품을 완성한다. 너무도 흔하고 당연해서 잊고 지낸 풍경이 팬데믹 시대에 특별하게 다가온다.

골목길을 걷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는 연극의 주제 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몇 백년쯤 지난 뒤 사람들은 지금을 ‘스티브 잡스의 시대’로 기억할지 모르지만, 어떤 시대를 제일 잘 말해주는 것은 한두 사람의 영웅이 아니라 “그냥 자기 삶을 살았던 사람들”, “물처럼 이렇게 흐르는, 우리 같은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연극은 그런 사람들에게 집중해 서울의 풍경을 한 폭의 세밀화처럼 그려보인다.

서울시극단은 “너무나 사소해서 기억조차 뚜렷하지 않은” 일상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다양한 나이대와 직종을 가진 시민들을 인터뷰하는 리서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1년간 사전 작업을 거친 뒤 지난 2월부터 넉 달에 걸쳐 인터뷰한 내용을 재조합해 무대 위에 실감나게 구현했다. 도시의 생활감 넘치는 소리들이 입혀진 음향이 입체감을 더한다.

<도덕의 계보학> <스푸트니크> 등의 작품을 연출하고 지난해 김상열연극상을 수상한 연출가 박해성이 연출을 맡았다. 박 연출은 “1000만명이 살고 있는 도시는 각자의 맥락과 시선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이것이 이 도시를 무대 위에 담기 위해 포착한 시작점”이라며 “이 도시는 천만 명을 포함한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천만 명이 삶의 순간을 스쳐가는 각자의 도시”(‘연출의 글’)라고 설명했다.

작품의 전 과정이 ‘배리어 프리(Barrier Free)’를 지향하며 진행됐다. 무대 진입로에는 경사로가 설치됐으며, 연습 과정부터 관람 환경까지 장애인 배우와 관객의 여건을 고려해 제작했다고 한다. 연습 단계부터 수어 통역사가 상주했고, 일부 공연 회차에선 수어 통역사가 배우들의 그림자처럼 자연스럽게 무대 위에 상주한다. 이밖에 모든 공연에서 배우들의 대사를 자막으로 제공한다. 공연은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19일까지.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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