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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검찰의 '청부 고발'과 '총풍'의 추억

이종규 입력 2021. 09. 16. 16:26 수정 2021. 09. 16.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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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8일 오후 국회 소통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최근 불거진 ‘고발 사주’ 의혹에 대한 입장을 밝힌 뒤 나서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선거는 ‘바람’과 불가분의 관계다. 바람을 잘 타야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 ‘조직은 바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도 회자된다. 그런데 더러 음습한 바람이 선거판에 끼어드는 게 문제다.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는 1997년 대선 때의 ‘총풍’을 꼽을 수 있다. 청와대 행정관과 대북 사업가 등 3명이 중국 베이징에서 북쪽 인사를 만나 판문점에서 총격을 해달라고 요청한 사건이다. 대선을 불과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당시 여당이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안보 불안감’을 부추겨 표를 얻으려 했다는 점에서 과거 ‘분단 기득권 세력’이 선거 때 애용하곤 했던 ‘북풍’의 아류라 할 수 있겠다. 판문점에서 총질을 해달라고 했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수준의 황당한 이야기로 들리지만, 김대중 정부 출범 뒤 검찰 수사로 확인된 사실이다. ‘총풍 3인방’은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영화 같은 이야기는 실제로 영화 <공작>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꾸민 ‘북풍’ 공작과 국세청이 주도한 ‘세풍’ 사건도 잇따라 드러나 검찰 수사 대상에 올랐다. ‘북풍’은 안기부가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 한 재미동포에게 ‘김대중 후보가 북한 김정일한테서 자금을 받았다’는 내용의 거짓 기자회견을 열도록 한 사건이다. ‘세풍’은 이회창 후보 캠프 쪽에서 재계에선 ‘저승사자’와 다름없는 국세청을 동원해 기업들한테서 선거자금을 뜯어낸 사건이다. 97년 대선은 사상 첫 정권교체가 이뤄질 가능성이 큰 선거였기 때문인지, 집권세력의 ‘정치 공작 바람’이 유난히 거셌다. 정권교체 이후 검찰 출입 기자로 ‘3풍’ 사건의 수사 상황을 지켜봤는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이 일어나는 ‘다이나믹 코리아’를 실감했었다.

‘3풍’이 보수 정치세력의 기획이었다면, ‘병풍’은 보수 정당을 겨냥한 것이었다. 물론 집권세력과 무관하다는 점에서 ‘3풍’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병풍’은 2002년 대선 때 의무 부사관 출신인 김대업씨가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 아들의 병역 비리를 은폐하기 위해 한나라당과 병무청이 대책회의를 열었다’고 주장한 사건이다. 이후 검찰 수사로 김씨가 제기한 의혹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검찰의 ‘고발 사주’ 의혹이 불거지자 정치권에선 각자의 입맛에 맞게 과거의 ‘바람’을 소환하고 있다. 여권 정치인들은 ‘검찰발 총풍’이라며 공세의 고삐를 조이는 반면, 국민의힘 쪽에선 ‘병풍’에 비유하며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만으로도, 검찰 조직의 연루 개연성은 꽤 높아 보인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도 손준성 전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을 김웅 국민의힘 의원에게 건네진 고발장의 전달자로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만일 언론에 제기된 의혹처럼 검찰이 선거에 영향을 미치거나 윤석열 전 검찰총장 ‘보위’를 위해 고발을 사주한 게 사실로 드러난다면 ‘총풍’에 버금가는 ‘국기 문란’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고소·고발이 난무하는 나라에서 고발 좀 사주했기로서니 뭐가 그리 큰 문제냐고 하는 이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주체가 검찰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검찰은 수사권, 영장청구권, 기소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다. 고발을 빌미로 전방위 압수수색과 먼지털이식 수사를 벌일 수도 있고, 탈탈 털어서 뭐 하나라도 걸리면 기소도 할 수 있다. 설사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되더라도, 그건 한참 뒤의 일이다. 그 전에 수사 대상자는 만신창이가 된다. 선거를 앞둔 시기라면 선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문재인 정부는 어느 정권보다 검찰개혁을 강조해왔다. ‘내전’ 수준의 갈등을 감수하면서까지 검찰개혁을 추진했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의 검찰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소리만 요란했을 뿐 결과적으로 개혁이 불철저했음을 방증한다. 실제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에는 ‘미완’이라는 꼬리표가 붙곤 한다. 참여연대가 해마다 펴내는 ‘검찰 보고서’를 보면,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이 길을 잃어 가는 과정을 반추할 수 있다. 2018년 5월 발간된 ‘문재인 정부 1년 검찰 보고서’의 제목은 ‘잰걸음 적폐수사, 더딘 걸음 검찰개혁’, 2년차 보고서의 제목은 ‘백년하청 검찰개혁, 날개 다는 검찰권력’이었다. 적폐 청산을 위해 검찰에 힘을 실어준 탓에 검찰개혁이 후순위로 밀렸다는 진단이었다. 정권 초기 실기와 오판을 거듭하다 검찰의 칼끝이 정권을 겨누자 부랴부랴 ‘몰아치기식’ 개혁에 나섰으니, ‘미완성 검찰개혁, 철옹성 검찰권력’(4년차 보고서)이라는 박한 평가는 필연적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총풍’은 발상은 섬뜩했을지언정 치기 어린 행동으로 치부할 구석이 없지 않았다. ‘총풍 3인방’에게 ‘모의’를 실행시킬 능력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러나 검찰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손봐줄’ 힘을 갖고 있는 조직이다. ‘청부 고발’은 실재하는 위협이다. ‘검찰에 집중된 권한의 분산’이라는 검찰개혁의 본질을 되새길 때다.

이종규 논설위원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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