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불도저에 밀릴 집과 논밭..마지막으로 가본 고향 동네

조남대 2021. 9. 1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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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조남대의 은퇴일기(24)

가을비가 그친 뒤라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 있다. 벌초하기 위해 아침 일찍 출발하였기에 여유가 있어 휴게소에서 아메리카노 한잔을 샀다. 커피 맛을 음미하며 차창 밖 풍경에 도취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운전을 한다. 오랜만에 친척 만날 생각을 하자 마음이 설레어 가속기에 올려진 발에 힘이 들어간다.

고향 집 마당에 도착하자 벌써 건너편 종중묘지에서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간식과 음료수를 챙겨 묘역에 오르자 아지매와 동생 몇 명이 와서 풀을 베고 있다.

벌초하기 전 잡초가 무성한 종중묘지. [사진 조남대]


지난해 조성한 묘역에는 8대조 이하 조상님과 아버지와 형님을 비롯하여 23기의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묘역을 만들면서 잔디를 심었는데 3분의1 정도는 세력이 강한 잡풀로 뒤덮여 있다. 조카와 젊은 동생들이 예초기를 돌리고 나이 드신 분들은 갈퀴로 긁어내거나 비석 주변의 풀을 낫으로 벤다. 열댓 명의 친척이 모여 작업을 하자 3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끝났다.

벌초를 마친 후 간단하게 술 한잔을 올리고 인사를 드렸다. 말끔히 해 놓으니 덥수룩하던 머리를 단정히 깎은 것처럼 시원해 뿌듯하다. 종중묘지 조성은 7대 종손인 아버지께서 살아 계실 때 염원한 일이었는데 자식 대에 와 마무리했으니 흐뭇해하면서 칭찬해 주실 것 같다. 후손들이 관리를 잘해야 할 텐데 바쁘게 살아가는 젊은 조카들이 여력이 있을지 의문이다. 먼 훗날의 일까지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는데,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 모양이다.

종중묘역에서 벌초를 하고 있는 친척들.


벌초에 참석한 절반 정도는 60~70대이며, 더 연배가 높은 사람은 산에 오르는 것조차 힘들어 한다. 조카는 몇 안 되고 나머지는 40~50대 동생이다.

벌초하고 시제 지내는 것도 50~60년대 태어난 우리 세대가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베이비붐 세대만 하더라도 시골에서 자라면서 유교 풍습을 이어받아 온 집안이 많다. 자정이 지나 제사를 지내고, 그 야밤에 담 넘어 이웃집에서 보내온 제삿밥을 자다 일어나 눈 비비며 허겁지겁 먹던 추억을 가진 세대다. 명절에는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차례를 지내느라 온종일 시간을 보냈고, 설에는 동네 어른들을 찾아뵙고 세배를 드렸다.

핵가족과 도시화로 친척이지만 명절에도 만나기 어려워 남남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나도 만날 일이 거의 없고, 혼사나 장례 때 겨우 얼굴 한번 스칠 뿐이다. 누구를 탓할 것도 아니고 시대의 흐름이 그렇게 만들었다. 카톡이나 줌 같은 것으로 인터넷에서 영상을 통해 소통할 수 있으니 잘만 하면 그런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고향 집을 방문하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이 될 것 같다. 동네에 산업단지가 들어와 발전되는 것은 좋을지 몰라도 고향이 사라지게 된다. 태어나 중학교까지 다닌 유년기 추억이 깃든 곳인데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니 서운하고 안타깝다.

집 뒤 담장에는 300년이 넘은 시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있다. 단옷날에는 동네 어른들이 동아줄로 그네를 만들어 높이 올라가기 시합도 했었고, 어머니가 일년에 몇 번씩 정화수를 떠 놓고 기도했던 우리 동네의 수호신이다.

오래전에 안동댐 만들 때 고향을 물속에 잠겨 두고 떠난 친구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일도 있구나’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는데 내가 그 친구처럼 고향을 잃게 될 줄이야.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지만, 집이 뜯기고 불도저로 논밭을 흔적 없이 밀어붙인다면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슬픔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겪을지도 모를 것이다.

벌초를 마쳐 말끔해진 종중묘역.


친척들과 어울려 뒷산에서 땔감을 마련하고 들에서 소 풀 뜯으며 지냈던 추억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일이 그리워질 때면 지나가는 길에 가끔 들리기도 했는데 이제는 어디로 찾아가야 할지 막막하다. 마을과 농토는 사라질지라도 선산은 그대로 남아 있어 벌초하고 시제 지내러 일 년에 몇 번이라도 고향을 찾을 수 있으니 그나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종중묘지를 조성한 후 처음으로 벌초를 했다. 친척들이 많이 모여 서로 안부를 나누고 소식도 들을 수 있어 뿌듯했다. 하지만 올가을이 지나면 고향 집과 동네를 다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쓸쓸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이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은 없듯이 다음 세대도 우리가 해 온 것처럼 세월의 흐름에 잘 적응하며 살아갈 것이므로 앞날의 일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동북아경제협력위원회 행정위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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