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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속 SF..인권·역사를 바꾸다

이향휘 입력 2021. 09. 17.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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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연대기 / 셰릴 빈트·마크 볼드 지음 / 송경아 옮김 / 허블 펴냄 / 1만7000원
마거릿 애트우드의 SF 소설 `시녀이야기`에 나오는 시녀 복장을 한 시위대가 2017년 백악관 앞에서 보수적 판사의 대법관 인준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 =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 첫해인 2017년 텍사스주 의회에 여성 수십 명이 모여들었다. 낙태수술을 제한하는 법안 상정에 항의하는 차원이었다. 시위대의 기묘한 복장이 눈에 띄었다. 얼굴을 거의 감싼 하얀색 보닛에 붉은 망토를 온몸에 휘둘렀다. 누가 봐도 마거릿 애트우드의 SF(Science Fiction·과학소설) '시녀 이야기'(1985년)를 패러디한 복장이었다. 이 소설에선 전쟁과 환경오염으로 대부분의 여성들이 불임 상태고, 출산용으로만 관리되는 씨받이 여성들을 일컬어 '시녀'라 불렀다. 시녀는 빨간 망토를 입고 임신하지 못하면 강제추방됐다. 시녀 복장이 여성 인권운동의 상징이자 오늘날 낙태 규제 반대의 상징이 된 이유다.

미소 냉전이 한창이던 1983년 3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미사일방어망 구축을 촉구하는 '스타워즈' 연설을 한다. 스타워즈란 대기권에 첩보위성과 요격 위성을 띄워 소련이 쏘아 올리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요격하여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 계획에 SF 작가들을 실제로 기용했고, 결과적으로 냉전 종식을 이끌었다.

SF는 흔히 우주선, 레이저 총, 로봇이 나오는 미래 공상 소설로 여겨졌다. 머나먼 미래에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됐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 등 기술 발전과 가까워진 우주여행, 트럼프 극우 시대,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SF적 상상력이 현실과 맞물리며 상호작용을 벌이고 있다.

영미권 문학 교수인 셰릴 빈트와 마크 볼드가 공저한 책 'SF 연대기'는 우리 현실을 뒤흔드는 SF의 기원과 역사를 꼼꼼하게 추적한다. 그간 SF 역사를 치밀하게 서술하는 책이 국내에 적었기에 희소성의 가치가 있다. 더욱이 2019년부터 대한민국을 달궈온 SF 열풍의 뿌리를 탐색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2019년 테드 창의 '숨',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수 없다면'이 국내 서점가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과학소설 장르 돌풍이 시작됐고 지금까지 이 열기가 이어져 오고 있다.

SF의 시작을 어디에 둬야 할까. 혹자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기원으로 꼽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소설가이자 편집자인 휴고 건스백을 출발점으로 본다. 건스백은 1916년 과학적 소설(scientifiction)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고, 1926년 4월 처음 출간된 최초의 SF 잡지 '어메이징 스토리스'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이 용어를 쓴다. SF계 최고의 상이라 불리는 휴고상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는 추리 소설가인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도 SF 계열로 편입시킨다. '천일야화 1002번째 이야기'에서 포는 과학적 지식에 의지해 소설을 지어내고 과학적 데이터의 카리스마적 권위를 동원한다. SF 장르가 황금시대를 맞이한 건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다. 'SF 3대 거장'에 손꼽히는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C 클라크, 로버트 A 하인라인이 모두 이때 활동을 시작했다. 빅브러더가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미래를 경고한 조지 오웰의 '1984'도 1949년에 탄생했다. 신인 작가를 발굴하고 SF 수준을 비약적으로 높였던 편집자 존 W 캠벨이 막강한 영향력을 떨치던 때였다.

1950년대 소비팽창 시대를 거쳐 아폴로 달 착륙이 있었던 1960~1970년대는 새로운 목소리와 관점이 힘을 얻었다. 베트남 반전 시위에 여성 해방, 성소수자 운동이 폭발하면서 페미니즘 SF가 태동했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처럼 SF 영화가 블록버스터급으로 팽창하던 시기였다.

1980~1990년대는 신자유주의가 힘을 얻고 냉전이 종식되며 SF의 보수화가 이뤄졌다. 한편에선 기계와 인간의 대등한 융합을 시도하는 사이버펑크가 유행처럼 번졌다.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는 사이버펑크의 효시로 꼽힌다.

저자들이 주목하는 사실은 SF가 하나로 고정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시대에 따라 끊임없는 변화를 겪는다. 때로는 가부장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도 하고, 때로는 체제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SF와 현실 세계는 서로 맞물리는 톱니바퀴처럼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무엇보다 자명한 사실은 독자들은 늘 자신들이 빠져들고 싶은 세계를 찾아 기꺼이 시간여행을 할 준비가 돼 있다는 점이다.

[이향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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