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벤처신화로 수천억 자산가라 했지만, 나를 자유롭게 해준 건 돈이 아닌 책이었죠

김유태 입력 2021. 9. 17. 15:48 수정 2021. 9. 17.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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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end Interview] 골프존 대표직 내려놓고 예술인 후원 앞장 김원일 소전문화재단 이사장
김원일 소전문화재단 이사장을 서울 강남구 청담동 소전서림에서 만났다. 스크린골프로 창업해 벤처 신화를 이뤘던 그는 현재 예술인 지원과 창작자 후원에 몰두하고 있다. [김호영 기자]
외환위기 파고를 넘고 있던 2000년. 한국 나이 26세의 한 청년이 회사를 창업한다. 몸집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회사는 2011년 코스닥에 상장된다. 청년은 회사 최대주주였고 상장 당일 언론은 이 청년 1인의 보유 주식 가치를 4000억원으로 추정했다.

자, 세상은 이 청년을 딱 여기까지만 기억한다. 코스닥 시가총액 8위를 기록한 상장식 행사에 아이언을 손에 쥐고 사진을 찍었던 청년. 그러나 그는 3년 뒤 대표직을 사임하고 공식석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세상에 얼굴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고, 언론 인터뷰 요청에 응하지도 않았다. 자유, 그 이상을 허락해줄 부(富). 그러나 그는 손에 돈이 아니라 책을 쥐고 다른 길을 가고 있다. "대표를 사임하고 7년간 책만 읽었다"고 그는 소회한다. 그렇다고 책을 덮은 후에 자기 안에만 갇히지도 않았다. 사비를 털어 장학금을 꾸준히 세상에 건넸고, 젊은 작가들의 예술활동을 후원했으며, 이제 강원도 산골에 인문학 레지던시를 건립하는 중이다.

매일경제신문 2011년 5월 21일자 기사. 오른쪽 두 번째가 김원일 이사장이다. 골프존은 상장일 시가총액 1조1000억원을 기록하며 시총 8위를 기록했다. [매경DB]
김원일 소전문화재단 이사장(47)을 청담동 소전서림 2층 집무실에서 만났다. 단테 알리기에리, 무라카미 하루키, 도스토옙스키, 조리 카를 위스망스, 버트런드 러셀 등의 고서와 신작이 서가에서 묘한 동거 중이었다.

―이사장이란 직함에 어울리지 않을 젊은 외모다. 근황이 궁금하다.

▷소전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임하고 있다. 어디 가서 이사장이라고 말씀드리면 '아드님이 대신 오셨느냐'고 물어보신다(웃음). 하지만 저도 이제 쉰이 되어간다. 이 일을 소명으로 여긴다.

―재단을 간략히 소개해달라.

▷문학, 그리고 철학·역사에 관한 창작자 후원이 재단의 소명이다. 예술가가 사회와 개인에 대한 생각을 풀어내는 것이 예술이고, 언어예술로 풀어낸 결과물이 문학이라고 보는데 독자는 예술로서 공감의 과정을 거쳐 변화의 단초를 얻는다. 문학의 가치를 독자에게 확산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버는' 게 아니라 주로 '쓰는' 직업이겠다.

▷아직 내세워 자랑할 일은 못 될 액수지만 인문학부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고 문학과 인문학 가치를 보급하는 소전서림을 운영한다. 매년 예술인 3인에게 창작금을 드리면서 소전서림 상주작가로도 모셔 후원한다. 아직 적은 금액이지만 나누려 한다.

◆ '행복의 정복'을 덮으며
김원일 이사장의 서가에 꽂힌 책들. 문예지 `문학사상` 창간호와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
―과거로 돌아가보자. 최근 몇 년간 칩거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오늘 인터뷰가 처음이라 긴장되지만 다 털어놓겠다(웃음). 상장 즈음에 날 깊이 돌아봤고 문득 궁금해졌다. '사업을 계속하는 건 내게 어떤 의미일까.' 젊은 나이에 창업했지만 개인적으론 열심히 돈 벌려 했던 직장인들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빠르게 달려온 시간을 되돌아보니 '내가 너무 불행하다'고 느꼈다. '나'를 발견하고 싶었다.

―왜 하필 책이었나. 또 무슨 책이었나.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 책을 열었다. 7년간 책만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 이 책 때문에 인생이 많이 바뀌었다. 애초에 집이 부유한 건 전혀 아니었고, 생활의 여유가 생겨 세상이 소위 말하는 '자본가'가 됐다. 그런 시기에 친구가 선물한 러셀의 책을 깊게 읽었다.

산업혁명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의 영국인의 행복과 불행을 다루는 책인데 이 책을 깊이 읽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과연 너는 행복한가?' 러셀의 책은 나를 지금의 위치로 다시 '내려오게 한' 책이다.

―책 한 권이 삶을 바꿨다는 얘기인데.

▷책은 유년 시절부터 좋아했다. 삶의 해답은 언제나 책에 있었다. 대표직을 사임한 뒤 지금의 재단 건물을 지었다. 원래는 미술관을 하려 했다. 상업 갤러리가 아닌 작은 미술관 개념이었는데 막상 개관식을 하면서 미술은 내 힘에 부친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개관전 직후 준비를 시작한 전시가 폐관전이었다(웃음). 그 즈음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내게는 다름 아닌 독서가 '제1취미'였다는 것을. 그래서 책을 재단의 업으로 선택했다.

◆ 책, 두 번째 생을 열다
―유복한 예술인 미술, 박복한 예술인 문학의 간극이 커 보인다.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길을 찾으려 책을 열었다. 새 삶의 방식을 결정해야 했던 그때, 책과 관계되는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폐관전 제목도 히치콕 감독의 1959년 영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와 동명으로 정했다. 북은 'Book', 서는 '書'를 의미한다. 책과 관련된 컬렉션이 많아 책과 관련된 작품만 모아 폐관전을 열었다. 이후 소전서림을 열어 지금에 이르렀다.

―어떤 책을 주로 봤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지금껏 열댓 번 읽었다. 하루키는 언제나 내게 문학의 재미를 들려준다. '문학이란 이런 의미를 갖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 책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었다. 그리고 내게 가장 중요한 한 권은 프랑스 19세기 작가 위스망스의 '거꾸로'다. 귀족 가문의 후예가 세상에서 벗어나 탐미적인 낙원을 구축하는 내용이다. 이 위대한 탐미주의 소설은 진정 나만 알고 싶은 즐거움이었다. 물론 러셀의 '행복의 정복'만큼 아끼는 책은 없다.

―집필실 책장에 시인 이상의 국내 전집 전질(全帙)이 전부 모여 있다. 대단한 컬렉션이다.

▷이상을 읽기 시작하면서 국내 출간됐던 전집을 전부 구매했다. 한 작가의 책을 모두 읽으려 노력하는 편인데 이상은 소설은 읽혔지만 시는 잘 읽히지 않았다. 파이프를 문 시인 이상의 그림(구본웅 화백이 1930년대 그린 '친구의 초상')이 그려진 저 책은 문예지 '문학사상' 1972년 창간호다. 이쯤 되니 '오타쿠적' 수집욕이 있는 건 확실한 것 같다. 독서는 일반인 수준인데 컬렉션 욕심만 일반인을 넘어섰으니 아이러니다(웃음).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는 독서를 하나.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면서 그랬다. 스토리의 흥미를 넘어 문학의 매혹적인 세계로 본격 빠져드는 계기였다. 요즘은 단테를 깊게 읽으며 고전과의 맥락을 파악한다. 재단이 우리나라 현대문학 작가를 지원하고 있는 만큼 동시대 한국 소설도 함께 읽고 있다.

◆ 선한 의지와 선한 결과

―독자 아닌 후원자로서 삶을 이야기해보자.

▷소전문화재단은 국가나 대기업이 후원하는 곳이 아니다. 저 개인이 지분 100%를 가진 재단법인이다. 그래서 크게 욕심 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늘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한 대학과 제휴해 문사철(文史哲)을 공부하는 학부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한다. 매년 70~80명이 지원하는데 보통 3명을 뽑는다. 많은 숫자는 아니다. 그러나 지원서를 직접 다 읽고 인터뷰해 선발한다. 함께하는 위원들도 계시다. 나로서는 학생들과 교류를 하고 싶었다. 또 요즘엔 홍천에 레지던시 건립을 준비 중이다. 최근 직원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마쳤다.

―직접 프레젠테이션까지 하나.

▷보통 다른 곳은 직원들이 이사장에게 보고하는 형식을 취하겠지만 난 내가 생각하는 재단의 방향을 직원들에게 알리고 공유하고 싶었다. 홍천 레지던시 이후 '예술인 마을'을 만드는 것이 최종 바람이다. 현재는 건축가 선정 단계로 완공되려면 4~5년은 걸릴 듯하다. 전문가들이 설계해주시겠지만 창작자 집필 공간만큼은 내가 직접 설계하고자 조언을 구하는 중이다.

―후원의 철학이나 원칙이 있을까.

▷시작한 마음 자체가 선(善)했다면 운영하는 과정도 선해야 하며, 결과도 선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나 개인이 주도하는 일이라 하여 '내 돈 쓰는데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건 금물이다. 선한 의지로 시작했으면 결과도 선해야 한다. '크고 말도 안 되는 목표를 제시하지 말고 작더라도 선한 결과를 이루자'는 것이 원칙이다.

◆ 소전서림의 항해

―소전서림의 도서 큐레이션은 유명하다.

▷많게는 4만권 정도를 넣을 수 있고 현 보유 권수는 3만권이다. 큰 도서관이 아니니 어떤 책을 넣을지 선별해야 했다. 소전서림 사이즈를 키울 생각은 없다. 그건 국가나 대학에서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다. 대신 소전의 미션은 '시대를 넘어, 책을 읽히게 하는 것'이다.

―책장 목록은 어떻게 정하나.

▷분야별 전문가들의 도움을 이미 받았다. 최근엔 '교양인을 위한 독서체계 연구'를 진행 중이다. 전문가들이 20개 테마에 관한 20개 어젠다를 가지고 각각 5권의 문학 책을 뽑는다. 이렇게 모인 100권에서 과학, 역사, 철학, 예술 등 분야의 책들이 무한한 가지처럼 확장된다. 소전서림 책장에 꽂힌 어떤 책을 펼쳐 읽어도 손해 보는 책이 없도록 하는 것이 궁극의 목표다.

―서가에 진귀한 책들이 상당수다.

▷10월부터 단테의 '신곡(La Divina Commedia)' 북아트 전시를 시작한다. 북아트란 예술도록을 뜻하는 아트북과 다른 개념이다. 예술가의 삽화가 들어간 고전들의 컬렉션을 의미한다. 소전문화재단은 블레이크, 달리 등이 단테의 '신곡'을 그린 책을 소장 중이다. 이를 다음달 공개한다. 직접 도슨트로 참여해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라 요즘 준비로 한창 바쁘다.

―책의 가치를 확산하려는 시도로 이해한다.

▷소전서림을 두고 '왜 도서관이 유료 운영하냐'는 비판도 있었다. 왜 더 어려운 분들이 아닌, 문학을 후원하는지를 이해 못 하는 분도 계셨다. 그러나 난 소전이란 이름을 통해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정말 쿨하고 멋진 일이야'라는 인식을 알리고 싶다. '굉장히 멋진 일'로서의 독서를 알리고 또 능력껏 후원하고자 한다.

◆ 소멸 너머의 영속

―소전이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나.

▷좀 자극적인 말일 수 있지만 정확히는 기억이 안 되고 싶다(웃음). 인간은 모두 자기 사후의 영속을 바라면서 해야 할 일을 안 한 채 다른 일에 힘쓰다가 결국 폐해를 발생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기업도 권력도 국가도 그러했다고 책은 기록한다.

―소멸을 이야기하는 재단은 처음 본다.

▷동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뒤 누군가에게 바통을 넘겨주고 싶다. 더 나은 재단이 있다면 훗날 그곳에 흡수되더라도 무관하다. 영속을 꿈꾸느라 지금 해볼 수 있는 힘과 노력을 무소용한 곳에 낭비하지 않으려 한다.

―행복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내가 걷고자 하는 행복한 삶이란 책을 읽는 사람들이 책 읽는 재미를 극대화하도록 이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돌아보면 난 독서라는 정말 멋진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독서의 의미를 알릴 수 있다면 그보다 나은 영속은 없을 것 같다.

▶▶ 김 이사장은…

△1975년생 △현 소전문화재단 이사장 △고려대 산림자원학과 졸업 △2000년 골프존 창업 △골프존뉴딘그룹 최고전략책임자(CSO) 겸 공동대표 등 역임 △2011년 골프존 코스닥 상장 △2014년 대표이사직 사임 △2016년 소전문화재단 설립 △2020년 소전서림 개관 △강원 홍천에 인문학 레지던시 건립 중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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