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땅에 지은 '씨앗 창고'..우리의 미래를 지킬 수 있을까?[밭]

이재덕 기자 입력 2021. 9. 17. 20:58 수정 2021. 9. 28.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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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밑줄 치며 읽는 농업·로컬 ②캐리 파울러 <세계의 끝 씨앗 창고>

지난 5월 중국의 ‘영웅’이 숨을 거뒀다. 농학자 위안룽핑(袁隆平, 1930~2021). 그는 1970년대 초 중국 최남단 하이난섬의 야생벼를 이용해 수확량이 20% 늘어난 잡종벼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아프리카, 인도 등 많은 나라들이 기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위안룽핑과도 그의 제자들이 개발한 잡종벼를 도입하고 기술을 배웠다. 그가 사망한 날, 유엔경제사회국(UNDESA)이 트위터에 이런 글을 남겼다. “오늘 우리는 진정한 식량 영웅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중국의 과학자 위안룽핑은 최초의 잡종벼를 개발해 수많은 사람들을 굶주림에서 구했습니다. 그는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기아 종식’이라는 그의 유산과 사명은 계속 이어질 겁니다.”

노르웨이 스발바르 제도 롱위에아르뷔엔에 있는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소’. 사암으로 이뤄진 플라토베르게 산의 바위를 뚫어 창고를 만들었다. 입구 위 반짝이는 사각형은 노르웨이 예술가 뒤베네 산네가 디자인한 조명 작품이다. 유리와 금속을 여러겹 덧대고 뒤에는 200개의 광섬유 케이블을 설치해 푸르스름한 녹색 빛을 내도록 했다. | 마농지 출판사 제공

녹색혁명기에 활약했던 ‘식량 영웅’들이 있다. 다수확 밀 개발에 성공한 미국의 농학자 노먼 볼로그(Norman Ernest Borlaug, 1914~2009)가 대표적이다. 노먼 볼로그는 멕시코의 국제옥수수밀연구소(CIMMYT)에서 엄청난 양의 이삭을 맺고도 잘 쓰러지지 않는 밀 품종을 연구 중이었는데, 키 작은 일본의 개량종 ‘농림10호’를 이용해 쓰러지지 않는 다수확 품종 ‘소노라64호’를 만들었다. 농림10호의 작은 키는 한국의 토종 ‘앉은뱅이밀’에서 유래한 형질이다.

미국에 노먼 볼로그, 중국에 위안룽핑이 있다면, 한국에는 허문회 교수(1927~2010)가 있다. 그는 일본 훗카이도 지방의 쌀 ‘유라카’와 대만의 개량종 쌀 ‘TN1’, 그리고 국제미작연구소(IRRI)가 개발한 다수확 품종 ‘IR8’을 교잡해 ‘통일벼(IR667)’를 만들었다. 일각에서는 녹색혁명기에 만들어진 ‘기적의 작물들’에 대한 성과가 지나치게 과장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특히 당시 한국이나 중국처럼 권위적인 정권들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육종가들이 ‘국민 영웅’으로 키워졌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지만, 이들의 연구가 식량 생산을 늘리고 기아를 막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식량문제를 해결해 ‘추장’이 된 한국인도 있다. 나이지리아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으로 사용되는 카사바가 1970년대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로 수확량이 감소해 많은 이들이 굶주리게 되자, 국제열대농학연구소(IITA)의 한상기 박사가 병해에 강한 새 품종을 만들어냈다. 그는 카사바 원산지인 브라질에서 야생종을 도입해, 재배종과 교배해서 개량종을 만들었다. 나이지리아 이키레 마을 사람들은 그를 명예직이 아닌, 진짜 추장으로 추대했다.

책 <세계의 끝 씨앗 창고> 표지

1950년~1970년대에 이런 '식량 영웅'들이 나올 수 있었던 건 ‘앉은뱅이밀’ ‘야생종 쌀’ ‘야생 카사바’ 등 지구 상에 다양한 종자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학자 캐리 파울러가 쓴 ‘세계의 끝 씨앗창고’는 종자와 종자가 가진 유전자원을 남기려는 과학자들의 노력을 조명하고, 빙하가 어는 노르웨이 스발바르 제도에 거대한 종자 저장고를 만들게 된 이야기를 다룬다. 캐리 파울러는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 프로젝트를 직접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농업과학자들이 경종을 울리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였다. 세계를 휩쓸던 현대식 개량종자, 소위 ‘녹색혁명’ 때 등장한 품종들이 재래 품종들을 대거 대체하면서 멸종으로 몰아가고 있음을 알아챈 것이다. (중략) 한때 얼마나 많은 다양성이 존재했고, 얼마나 많은 다양성이 소실됐건, 남은 다양성만으로 상상할 수 있는 먼 미래까지 농업을 유지해야 한다.”(p.90)

야생종은 재래종에 밀려났고, 재래종은 개량종에 자리를 내줬다. 캐리 파울러의 연구에 따르면, 1800년대 미국에서 재배된 콩 578종 가운데 1983년까지 남아있는 콩은 32종에 불과했다. 양배추는 544종에서 28종으로, 당근은 287종에서 21종으로, 호박은 341종에서 40종으로 줄었다. 개량종에 의해 밀려난 재래종과 야생종은 더이상 찾을 수 조차 없다. 태국에서는 1975년부터 20년동안 야생벼 자생지 다섯곳을 조사했는데, 1990년에 자생지 4곳이 완전히 소멸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연구가 진행됐다. 1985년 국내 182개 농촌 지역에서 5171종의 재래종을 재배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8년 뒤인 1993년 다시 조사해보니 이 중 남아있는 건 908종(17.6%)에 불과했다. 벼는 22종 중 4종, 오이는 14종 중 1종, 밀은 22종 중 4종, 감자는 44종 중 3종만 남았다. 고추, 호밀, 목화는 남아있는 재래종이 없었다. (Ahn,W.S. 1996. Genetic erosion of crop in Korea 논문 참고)

Jametlene Reskp/Unsplash 이미지

심각한 질병이 발생해 사라진 종자도 있다. 사라진 작물들이 어떤 모양이고, 어떤 맛이었는지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다. 예컨대 우리가 마트에서 구입하는 바나나는 모두 ‘캐번디쉬 바나나’이다. 1950년대까지 전세계 식탁을 점령했다가 파나마병으로 사라진 ‘그로미셀 바나나’보다 맛은 떨어진다고 하는데, 그로미셀의 맛을 아는 사람이 한국에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캐리 파울러가 정작 우려하는 건 잊혀진 맛이나 모양 따위가 아니다. 그는 사라진 종자가 가진 형질이 언젠가 우리를 구원하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소실된 형질은 어쩌면 재난급의 흉작, 혹은 더 심각한 사태가 닥쳤을 때 해당 작물을 보호해줄 형질이었을지도 모른다.”(p.84)

한국의 농촌진흥청 같은 각국의 농업연구기관들은 이런 이유로 저마다 종자은행(유전자은행)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운영 이슈가 많았다. 녹색혁명의 상징적인 기관인 국제옥수수밀연구소(CIMMYT)는 종자은행에 보관한 옥수수 씨앗의 절반 이상이 발아가 되지 않았다. 저장 전에 제대로 건조되지 않았거나 전력이 끊겨 냉각시설이 멈추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2011년 태국의 유전자은행이 홍수로 침수됐을 때는 벼 종자 2만 종이 사라졌다. 아프리카 부룬디의 종자은행은 1990년대 전쟁 등으로 초토화됐다. 종자표본 8만 개를 보유한 이탈리아 바리의 유전자은행은 2004년 7월 냉각장치가 고장나면서 영하 20도였던 내부온도가 영상 22도까지 치솟았다. 수리하는 데 몇 달이 걸렸다.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가 있는 스발바르 제도의 험준한 절벽들. 무수히 많은 새들이 집으로 삼고 있는데, 수천 년에 걸쳐 새똥으로 비옥해진 부분에 식물이 자란다. | 마농지 출판사 제공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 전경 | 마농지 출판사 제공

2008년 2월 영구 동토층인 노르웨이 스발바르 제도의 산 속에 ‘국제종자저장고’가 만들어졌다. 전세계 종자은행들이 자신들이 보유한 같은 종자들(중복표본)을 스발바르로 보냈다.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는 지질학적으로 안정적이고, 고도가 높아 해수면 상승 문제에서도 자유롭다. 무엇보다도 스발바르의 영구 동토는 천연 냉동고가 돼 준다. 기계식 냉각 장치를 이용해 국제 표준인 영하 18도까지 얼릴 수 있는데, 혹여나 냉각 시스템에 문제가 생길 경우 수리될 때까지 영구 동토가 종자를 냉동 상태로 유지하는데 보조 장치 역할을 해 준다.

“스발바르 종자저장고에는 수돗물이 안 나온다. 상주하는 직원도 변기도 없다. 이동식 간이화장실이 하나 있는데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단순화하기, 저비용 유지하기, 시설이 인간의 지나친 개입이나 잠재적 오류에 가능한 한 노출되지 않고 사실상 스스로 작동하게 하기, 기계적 냉각 시스템이 고장나더라도 알아서 온도가 유지되게 하기, 이러한 원칙이 스발바르 종자저장고를 오랫동안 안전하고 경제적으로 지속할 수 있게 하는 핵심이다.” (p.131)

입구에서 130미터 가랑 뻗어 있는 터널을 따라 영구 동토 안으로 들어가면, 총 세 개의 저장실이 있다. 모두 표본 450만 종을 수용할 수 있다. “이 수용 능력이 나 자신이나 내 자식 세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한계에 이르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내 계산이 틀리더라도 터널을 조금만 더 파면 보관실을 하나 더 만들 수 있다. 어쨌든 어마어마하게 큰 산이니까.” 아직 저장실 한 곳도 다 채우지 못했다. 두 곳은 비어있다.

산 표면의 입구에서 터널을 따라 130미터 정도 들어가면 저장실이 나온다. | 마농지 출판사 제공
저자 캐리 파울러가 저장실에 보관된 종자 박스들을 바라보고 있다. | 마농지 출판사 제공

저장실을 둘러본 캐리 파울러는 이렇게 말했다. “선반 사이의 통로를 돌아다니면 경이로운 동시에 긍정적 확신이 느껴진다. 위탁 기관들이 상자 하나하나에 식별 라벨과 로고를 부착해 보낸 덕에, 얼마나 많은 나라들이 종자 보호 노력에 동참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아주 폭넓은 지정학적, 정치적 스펙트럼이 드러난다. 미국과 러시아의 유전자은행에서 보낸 종자들. 대한민국에서 보내온 상자들. 그 옆에 나란히 보관된 북한에서 보내온 어두운 자홍색의 묵직한 나무 상자들…” (p.136)

이곳에는 종자회사가 소유한 종자나, GMO 종자는 한 알도 없다. 종자회사들은 유통하면 돈을 벌어다주는 자신들의 종자를 굳이 북극권 냉동창고에 보관할 필요가 없었고, GMO 종자의 경우, 노르웨이 법이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가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부터 GMO 종자의 반입과 저장을 일체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예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저자 캐리 파울러(앞)와 동료 올라 베스테니엔이 새로 도착한 종자를 저장실 선반에 올리고 있다. | 마농지 출판사 제공

이 책의 백미는 국제건조지역농업연구센터(ICARDA)에서 온 종자에 대해 다룬 부분이다.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시리아의 알레포에 본부를 뒀던 ICARDA에서 보관 중이던 종자의 중복 표본들을 스발바르로 보냈다. 총 11만 6000종, 종자 수로는 5800만 개에 달했다. “우리는 아랍권 다른 나라들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데 동의했지만, 시리아와 ICARDA 컬렉션은 그 소용돌이를 비켜 갈 거라고 장담했다.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 가능한 한 빨리 스발바르에 예치하도록 했다. '만일을 대비해'가 스발바르 종자저장고의 존재 이유 아닌가.” (p.155)

몇 달 후 시리아에서 전쟁이 터졌다. ICARDA 연구원들은 수십년간 연구해 온 종자들을 빼내지 못하고 결국 철수했다. 내전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진행 중이다. ICARDA는 2015년 모로코와 레바논으로 이전하면서, 스발바르에 “2011년 위탁했던 종자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최초의 종자반출은 분명 획기적인 사건이다. 동시에 씁쓸한 순간이기도 하다. 보험용 위탁분을 실제로 사용하게 되는 상황은 아무도 바라지 않는다. 이번이 스발바르 종자저장고를 애초의 건립 목적에 따라 이용하는 마지막 사례이기를 모두가 바란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p.156)

책은 170페이지 정도로 양이 많지 않은 편이다. 사진이 많아서 금방 읽는다. 좀더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책들을 소개하자면, 종자 다양성의 중요성을 실제 바나나 산업 사례로 흥미진진하게 풀어낸 <바나나:세계를 바꾼 과일의 운명>(댄 쾨펠 지음, 절판), 우리 식탁에 올라가는 먹거리와 종자들의 산지를 찾아가는 <밥상 위의 세계>(남지원 등 지음, 글항아리) 등이 있다. 전세계 종자를 수집하고 연구했던 바빌로프의 이야기를 담은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게리 폴 나브한 지음, 절판), <바빌로프 20세기 최고의 식량학자>(피터 프링글 지음, 절판), 함경남도 흥남의 비료공장부터 통일벼 개발까지의 역사를 쉽게 설명한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김태호 지음, 들녘), 세계 작물의 9대 기원지를 소개하는 <작물의 고향>(한상기 지음, 에피스테메) 등도 추천한다.

얼음으로 뒤덮힌 세계의 끝에 ‘씨앗 창고’라는 보험을 들었으니 이제 안심해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100년 뒤 스발바르의 냉동창고에서 씨앗을 꺼냈을 때, 그 씨앗이 새로운 기후에서 싹을 틔울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씨앗은 창고가 아닌, 땅에 뿌어졌을 때 환경에 적응하며 스스로 진화한다. 어쩌면 답은 냉동창고가 아닌 땅에 있는 게 아닐까. 캐리 파울러는 다음과 같이 글을 마무리 한다. “살아 숨 쉬는 이 유산이 나 아닌 누군가의 책임이라고 단정 짓지 말기를 바란다. 바로 당신의 책임이니까. 아니,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p.162) 결국은 우리의 미래를 스발바르의 저장고에만 맡겨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다음 편에서는 이 종자들을 키우고, 모으고, 빌려 주는 또다른 ‘영웅’들에 대한 책들을 소개하려 한다.


글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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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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