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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이 왜 이렇게 많아요?" "너 먹이려고!"..두로령에서 '트레일 엔젤'을 만나다

글‧사진 김채울 @_whereismypizza 입력 2021. 09. 17. 21:54 수정 2021. 09. 17.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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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천사의 백두대간 일시 종주기 <14> 횡계~진고개~오대산 노인봉~두로봉~내면분소
어린이재활병원 기부하는 28세 여성 마라토너, 홀로 백두대간 670km 종주 도전
구경하는 재미가 있던 횡계 마을.
일시종주 37일차 : 횡계~진고개, 오대산 노인봉
내 생애 첫 장거리 산행이 오대산이었다. 19살 당시 입사했던 회사에서는 6주간 신입사원 교육이 진행되었는데, 교육 중에 무박2일로 오대산 종주 산행을 하는 것이 있었다. 첫 무박 산행이었고 첫 도전이었다.
어떤 코스로 갔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그래도 기억이 나는 건 늦은 오후에 산행을 시작해서 다음날 동 틀 때까지 걸었다는 것, 그리고 엄청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오대산에 단 한 번도 다시 와보지 않았다. 그렇게 9년이 지난 오늘, 다시 이 곳을 찾았다.
오전 06시 40분, 숙소를 나서 자욱한 안개 속에서 오늘의 운행을 시작했다. 오늘은 다시 탐방로가 시작되는 진고개 정상 휴게소까지 간 뒤 진고개에서 노인봉을 다녀올 계획이다. 횡계에서 진고개정상휴게소까지 24.5km의 아스팔트길을 걸어야 한다. 횡계는 번화 되어있는 것 같으면서도 시골 느낌도 나고, 묘한 경계선에 있는 동네인 듯 하다.
웬만한 편의시설은 다 갖추고 있고, 유동인구도 꽤 많은데 또 걷다 보면 밭도 있고 작은 산도 있다. 어제 저녁에도 마을을 구경하며 나중에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오늘도 또 한 번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지리산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동네가 10곳 정도, 그리고 백두대간 마루금 아래 산장을 짓고 싶었던 곳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언젠가 작은 산장을 지어 백두대간을 걷는 사람들과 함께 그 날의 여정을 공유하고 내일의 계획을 이야기하며 맥주 한 잔 기울이는 저녁을 보내는, 그런 상상을 해봤다. 매일 여행하는 기분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아, 그리고 산장의 주인이 된다면 꼭 모든 숙박객에게 서비스로 1인 1콜라를 지급할 것이다.
출발할 땐 안개가 자욱하더니 어느덧 안개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아주 맑은 날씨가 되었고, 덕분에 내 기분도 덩달아 맑아진다. 뭉게구름이 있는 맑은 하늘을 볼 때면 매번 기분이 좋아진다. 아스팔트길에 반사되는 열이 고스란히 나에게 와서 갈수록 더 더워졌지만, 예쁜 하늘은 물론이고 도로 위 풍경도 생각보다 다채로워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2시간을 조금 더 걸은 뒤 버스정류장에서 잠깐 더위를 식히며 휴식을 가졌다. 평소엔 산행 중 사람을 거의 못 만나서 마스크를 안 끼고 다니는데, 오늘은 마을을 지날 때마다 혹여 사람을 만날 까봐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주말에 국립공원 등 등산객이 많이 다니는 산에서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 때, 서로 상대방을 마주치면 허겁지겁 입을 가리거나 마스크를 쓴다. 그럴 때마다 코로나는 언제쯤 잠잠해질까 싶은 생각이 들어 씁쓸하고 속상하다.
중간휴식시간에 먹은 전날 대관령휴게소에서 받은 오이.
확실히 아스팔트를 걷는 게 발목에 부담이 더 크다. 평소 흙길을 걸을 때는 아프지 않았던 발바닥도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발목은 종주 초반부터 계속 아프다 안 아프다 하면서 꾸준히 나를 괴롭히고 있는데, 최근엔 계속 괜찮더니 오늘 아스팔트 길을 계속 걸으니 다시 좌측 발목이 욱신거린다.
날도 좋고 기분도 좋아 흥얼거리며 걸었지만, 역시 몇 시간 동안 아스팔트길을 걷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후반으로 갈수록 발바닥과 발목에 더해 골반에도 조금씩 통증이 느껴져 갈수록 페이스도 떨어지고 힘들었다. 그래도 오늘 감사했던 건, 2번이나 지나가던 차량이 멈춰서 “태워줄까요?” 하고 물어봐 줬던 점. 전체적으로 통증이 조금씩 있긴 했지만 잔잔한 통증이라 진고개까지 남은 거리를 충분히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괜찮다고 말씀드리며 사양했다. 하지만 가시던 길을 멈춰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고 다시 출발하기 전에는 힘내라고 응원까지 해주는데, 그게 정말 큰 힘이 되었다. 나도 앞으로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운전하다 도보 여행하는 여행자를 만나면 꼭 차를 멈춰서 물어봐야겠다.
진고개정상휴게소는 오대산 노인봉을 오르는 최단거리 코스이자, 동대산을 거쳐 두로봉으로 오를 수 있는 들머리이다. 휴게소에는 카페, 매점, 식당 등이 있는데 식당은 코로나로 인해 운영이 중단됐다. 매점에는 주류와 음료, 아이스크림, 과자 등을 판다. 오전 내내 땡볕에서 걸은 뒤 먹는 콜라와 아이스크림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맛있다. 평소엔 아이스크림도, 초코바도, 과자도 잘 먹지 않는데, 백두대간에서는 뭘 먹어도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아마 지난 한 달간 5년 동안 먹을 간식거리를 먹지 않았을까?
휴게소에서 1시간정도 푹 쉬며 더위를 식힌 뒤, 얼른 노인봉에 다녀와야겠다 싶어 다시 움직일 채비를 했다. 선자령부터 노인봉까지의 구간은 비법정 탐방로 및 사유지 구간으로 운행이 불가하여 우회해서 왔고, 노인봉만 남진 방향으로 다녀온 뒤 오늘은 진고개에서 야영을 한 뒤 다시 북진 방향으로 오를 계획이다.
노인봉 정상.
진고개~노인봉은 왕복 8km의 거리였는데, 휴게소 사장님께서 길이 쉬워 3시간이면 충분히 다녀오고도 남는다고 알려주신다. 하지만 백두대간을 걸으며 깨달은 건 쉽고 어려움의 기준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쉬운 길이 나에겐 어렵고, 나에겐 쉬웠던 길이 누군가에겐 어렵다. 그래서 큰 기대를 안 하고 운행을 시작했는데 노인봉 구간은 신기할 정도로 길이 완만했다. 마치 대관령에서 선자령 구간을 오를 때의 기억을 다시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1시간정도 걸려 노인봉 정상에 도착했다. 진고개는 해발 960m이고, 노인봉은 1,338m이니 약 400m정도의 고도를 올라온 건데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스틱을 갖고 올라왔는데, 정말 말 그대로 갖고만 왔다. 길이 너무 좋아서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나중에 가족들이랑 와도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경치도 좋고 길도 좋은 곳이었다.
오르기 전 4시간정도 걸리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기대 이상으로 길이 좋아 왕복 2시간 만에 노인봉을 다녀오고, 모처럼 여유 있는 오후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야영은 어디서 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휴게소 사장님께서 배려를 해주신 덕분에 좋은 자리에서 야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운행 종료 후 오후 내내 앞으로 가야 할, 남은 구간에 대한 루트 조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대산 구간은 내일 끝나지만, 이제 마의 설악산 구간이 남았다. 백두대간 종주는 설악산에서 시작해서 설악산에서 끝난다고 할 정도로 설악산이 힘들다고 하는데, 이미 꽤 지쳐있는 상태라 걱정이 많이 된다. 비법정탐방로도 많아서 자료 조사를 잘 해야 할 듯 하다. 오늘은 남은 구간에 대한 거리와 일정을 모두 정리해두었는데, 계획대로만 운행한다면 딱 일주일 후인 다음주 금요일이면 진부령에 도착할 것 같다.
일시종주 38일차 : 진고개~두로봉~내면분소
어제는 하루 종일 남은 비법정탐방로 구간을 어떻게 돌파할까를 고민하며 저녁시간을 다 보냈다. 설악산관리사무소에도 전화해서 한참 통화하고, 지인에게도 물어보고, 선답자 후기도 찾아봤다. 하지만 최근에 다녀온 일시종주자가 많지 않고, 또 인터넷에 잘 정리된 글이 많지 않아 생각보다 자료조사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길이 열려 있다면 하루 만에 갈 수 있으련만 우회하려니 시간은 두 배가 더 걸리고 노선도 훨씬 더 번잡해진다. 하지만 그래도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것만 생각하면 다시 힘을 내게 된다.
오늘은 특별히 더 힘이 나는 날이다. 오랜만에 트레일 엔젤이 찾아와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코오롱등산학교에서 인연을 맺은 문성욱 선생님과 양유석 선생님께서 응원차 방문해주시기로 했다. 저녁 6시쯤 내면분소에 도착한다고 하셨고 진고개에서 거리도 멀지 않기에 여유 있게 출발해도 되었지만, 빨리 뵙고 싶은 마음인지 이른 아침부터 운행 준비를 끝내게 되어 평소보다 일찍 운행을 시작했다.
느닷없이 내린 비.
오늘 가는 진고개~구룡령 구간은 원래의 백두대간 마루금을 잇기 위해선 진고개에서 두로봉과 신배령을 거쳐 구룡령으로 가야하는데, 두로봉~신배령 구간이 비법정탐방로여서 나는 두로봉까지 간 뒤 두로령을 거쳐 내면분소로 내려가는 것으로 계획했다.
걷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소나기인 줄 알았는데, 떨어지던 빗방울은 갈수록 굵어지고 비는 그칠 줄 모른다. 원래의 나였더라면 비 오는 걸 질색했겠지만, 몇 번의 폭염을 경험하고 나니 이제 비는 꽤나 반가운 존재다. 바닥이 미끄러워져 운행이 느려지지만, 또 한편으로는 덥지 않으니 속도를 낼 수 있기도 하다. 덥지 않으니 그거로 좋다.
주말이라 그런지, 두로봉을 향하는 길에 반대편에서 내려오시는 등산객을 많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중 3번이나 두로봉~신배령 구간을 국립공원공단 직원이 단속 중이니 조심하라고 귀띔을 해준다. 세 번째 만난 사람이 “어디로 가냐”는 물음에 단속 때문에 말을 거시는 걸 알아차리고 “비로봉 거쳐 내면분소로 내려갈 거예요. 비법정탐방로 구간은 안 가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라고 대답하니, 어떻게 알았냐고 하며 웃음을 짓는다.
두로봉을 지나 1.7km를 내려오면 두로령을 만나는데, 두로령은 대간길을 벗어나야 만날 수 있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희한하게 ‘백두대간 두로령’이라고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오늘 트레일 엔젤과 6시에 내면에 만나기로 했기에 여유롭게 천천히 움직일 생각이었는데, 비가 계속 오다보니 마땅히 쉴 곳이 없어 안 쉬고 계속 걸었더니 12시가 되기도 전에 두로령에 도착했다. 두로령에서 계속 직진하면 오대산 최고봉인 비로봉을 다녀올 수 있어 잠깐 동안 비로봉을 다녀올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괜히 늦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이내 내면분소로 다시 이어서 하산한다.
구로령에서 내면분소로 향하는 하산길.
두로령 바로 앞에 내면분소까지 10.1km가 소요된다는 안내판이 있는데, 현재는 낙석 위험으로 임도 따라 걷다가 중간에 가로질러서 내려가는 흙길이 생겨 내면분소까지 6.1km가 소요된다. 전날 월간<山> 신준범 기자님과 통화할 때 이 내면분소 내려가는 구간이 지루하고 길다고 들었는데,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기엔 딱 좋은 구간이라 생각보다 금방금방 내려올 수 있었다.
오늘은 5시쯤 내면 분소에 도착하는 걸 목표로 했는데, 중간에 잠깐 계곡에서 놀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일찍 도착해서 열목어마을까지 내려와 마을의 정자에 누워 여유를 누렸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 하늘이 다시 개어 화창해진 덕분에 젖은 우비와 신발, 양말을 말리기 위해 펼쳐 두고, 배낭과 신발도 벗어 던졌다. 정자에 누워 바람을 느끼고 있으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오늘의 트레일엔젤, 문성욱 선생님과 양유석 선생님.
저녁 6시, 선생님들이 도착했다. 처음엔 먼 길의 수고로움에 너무 죄송스러웠는데, 막상 이 멀리 홍천에서 선생님들을 뵈니 이렇게 반갑고 좋을 수가 없다. 선생님께서 근처에 좋은 캠핑 사이트를 알고 있다고 하셔서 그 곳으로 이동해 오늘의 아지트를 구축했다. 선생님들이 타고 오신 차량에 발 디딜 틈도 없이 짐이 꽉 차 있어 “짐이 왜 이렇게 많냐”고 여쭈니 “다 너 먹이려고 가져온 거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 짐들은 정말 다 나를 위한 음식들이었다. 각종 야채들부터 명이나물, 김치, 콜라, 그리고 단백질 섭취를 위한 고기까지!
그 여느 때보다도 든든하게 배를 채운 뒤, 마지막은 커피로 마무리했다. 백두대간 중에 드립커피를 마시게 될 줄이야, 너무 호화로운 백두대간 종주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이제 내일 모레면 길을 나선지 40일차인데, 40일 동안 5번의 트레일 엔젤이 다녀갔다. 다 미리 예정되어 있던 것이 아니라 며칠 전 혹은 당일에 갑자기 연락을 주시고 찾아와 줬던 건데, 그래서 그런지 더 반갑고 더 힘이 되었고 너무나도 큰 힘이 되었다.
혼자 걷지만 혼자가 아닌, 오늘도 감사한 마음으로 가득한 백두대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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