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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One] 한국엔 추석, 스위스엔 베니숑

신정숙 통신원 입력 2021. 09. 19.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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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프리부흐 지역의 풍성한 가을 잔치
그뤼에르 전통복을 입고 시내 중심가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 © 신정숙 통신원

(그뤼에르=뉴스1) 신정숙 통신원 = 해외에 사는 교포라면 한 번쯤은 '명절 앓이'를 할 것이다. 음력 명절을 꼬박꼬박 새면서 기다리지 않아도 때가 되면 몸과 마음은 명절이 다가오고 있음을 저절로 알게 된다. 그맘때쯤 가족들과 함께 만들어 먹었던 음식이 생각나 입엔 침이 고이고,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와 웃음소리도 환청처럼 들린다. 그렇게 쌓였던 추억을 더듬어 인터넷 검색까지 해서 만든 음식은 흉내는 냈지만 이상하게도 맛은 그 맛이 아니다. 각자의 기억 속에 있는 맛은 추억으로 남아 그때를 떠올리며 해외에서도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아쉽다면, 스위스 프리부흐(Fribourg)주에서 매년 가을에 열리는 베니숑(Bénichon) 축제를 경험해 보는 건 어떨까?

베니숑 축제는 자연이 준 모든 것과 한 해 동안 지은 농사로 수확한 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하는 종교적 의식으로 1443년 프리부흐에서 시작됐다. 음식과 술을 마시고 함께 춤을 추며 축하하는 행사다. 당시 축제는 마을마다 며칠 씩 열었고 사람들은 장소를 옮겨가며 즐겼다.

그러나 종교적인 의미보다 세속적 행사로 발전하면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자 정부는 축제의 규모와 방식을 여러 번 수정했고, 결국 수세기에 걸쳐 종교적인 의미는 거의 사라지고 맛있는 향토요리를 맛볼 수 있는 대중적이고 미식적인 축제로 오늘 날 남게 되었다. 매년 5월 봄부터 시작해서 12월 겨울까지 프리부흐 주 전역에서 진행되는데, 주로 여름과 가을에 집중적으로 행사가 열린다.

베니숑은 가족들이 풍성한 음식들로 준비된 식탁에 다같이 둘러 앉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날 준비되는 메뉴는 샤프란을 넣어 구운 빵 뀌숄(cuchaule)과 함께 발라먹는 무따드 베니숑(mourtarde de Bénichon 일종의 겨자잼)으로 시작, 양배추 수프에 이어 잠봉 훈제 소시지와 야채(양배추, 당근, 감자), 양고기와 뿌아르 아 보치(Poires à botzi, 달게 졸인 배), 삶은 강낭콩과 으깬 감자가 메인 요리로 서빙된다. 디저트에는 더블크림과 머랭, 브리슬레(Bricelets, 얇게 구워 말은 바삭한 와플), 큐케트(Cuquettes, 얇게 벗겨지는 패스트리), 빵다니스( Pain d’anis) 등이 있다.

베니숑 메인 메뉴인 양고기 라구와 뿌아르 아 포치, 디저트류. © 신정숙 통신원

한국인 이 씨는 결혼해서 처음으로 온 가족이 다 같이 만난 날이 베니숑이어서 항상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처음엔 무슨 날이지도 몰랐고, 다 같이 모여서 식사하는 날이구나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의 추석처럼 그 해 추수한 곡식과 과일들로 만든 음식을 나눠 먹고 그동안의 수고에 대해 감사하는 날이란 걸 알았어요. 음식도 풍성하고, 맛있고, 무엇보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게 좋았죠. 작년에는 시어머니와 함께 전통 디저트를 같이 만들어 나눠 먹기도 했어요. 만약 이곳에 살지 않았다면 이런 좋은 경험도 못 했을 거예요."

같은 동네에 사는 한국인 오 씨는 스위스에 처음 방문했을 때가 마침 베니숑 축제 때였다고 한다. 지인의 집에 초대되어 직접 만든 베니숑 음식들을 맛봤고, 저녁 무렵엔 큰 강당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춤을 췄다고 한다.

베니숑 메뉴는 푸짐하기도 하지만 가짓수도 많고 칼로리도 적지 않다. 점심 때쯤 모여 먹기 시작한 식사는 오후 다섯 시쯤에 끝나고 이후 다 같이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남은 음식들로 저녁 식사까지 함께 하는 것도 한국의 추석 명절과 비슷하다.

축제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부터는 도시나 마을의 중심에 어린이들을 위한 회전목마나 기차, 펌프카 등 놀이기구들이 설치된다. 이쯤 되면 아이들도 베니숑 축제가 시작된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최신의 현란한 놀이기구는 아니지만 어린 동심을 설레게 하기엔 이런 소박함으로도 충분하다.

베니숑 음식이 간단해 보일 수도 있지만 준비하려면 한국의 추석 명절처럼 며칠 전 또는 더 일찍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 부모님이 직접 모든 메뉴를 준비하기도 하고 가족 구성원이 나눠서 준비하기도 한다. 미리 만들어진 잠봉이나 훈제 소시지, 디저트 등은 주문하면 쉽게 구입할 수도 있고, 메뉴 전체를 레스토랑에 주문할 수도 있다. 그뤼에르 지역에는 베니숑 음식을 먹기 위해 찾아오는 관광객들도 많다.

꽃을 장식하고 산에서 내려오는 소들, 데잘프(désalpe). © 신정숙 통신원

가을에 베니숑 축제가 열리는 곳에서는 봄에 산으로 올라갔던 목동과 소들이 내려오는 데잘프(désalpe) 행사도 함께 열리기도 한다. 머리에 꽃으로 장식한 소들이 커다란 방울을 매고 줄을 지어 목동들과 함께 농가가 있는 마을까지 내려온다. 이 행사는 스위스 전역에서 열리고, 지역에 따라 시기가 다르다. 소 머리에 장식하는 꽃들의 모양도 다양하고, 소방울끈도 지역 전통 문양이 있다. 어린 목동들은 수레를 타고 참가하기도 한다.

몇 년 전부터 데잘프 행사는 다양하게 발전해서 프리부흐 주에서는 건초 마차 경주, 박람회, 공예품장터, 트랙트 베니숑 등이 열리고 있고, 몇백 명 또는 몇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 함께 식사하는 행사도 진행된다. 오래된 전통을 이어가고자 하는 프리부흐 사람들의 애착과 열정이 오늘날 다양한 행사를 만들었고 가족들뿐만 아니라 이웃, 즉 공동체와도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한국의 추석은 선조들에게 감사하는 제사를 지내고 추석 전후로 성묘를 하러 가는 반면, 스위스의 베니숑은 신에게 감사하는 축제의 날이고 성묘는 11월 1일, 뚜상(Toussaint)이라는 기념일에 한다. 프리부흐 주를 비롯해 가톨릭을 믿는 주는 이날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신과 자연에, 직접 농사와 목축을 하는 농부들과 목동들에게, 그리고 한 해 동안 열심히 일해 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베니숑 음식들. 푹 삶아 익히거나 끓이거나 혹은 튀김의 간단한 요리법으로 만들어진, 소박하지만 정성이 듬뿍 담긴, 투박하지만 푸근한 엄마의 밥상 같은 메뉴들. 멀리 있어 추석 명절을 함께 보낼 수 없는 허기진 이들의 배를 이 소박한 음식들로도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sagadawash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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