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명소 '최참판댁'은 세트장, 진짜 하동 천석꾼 집은 여기

손민호 입력 2021. 9. 20. 07:00 수정 2021. 9. 20.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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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 화사별서 안채 마루에서 내다본 풍경. 멀리 보이는 두툼한 봉우리가 구재봉이다. TV 드라마 세트장으로 최참판댁을 지을 때 본보기로 삼았던 고택이 화사별서다.

대하소설 『토지』로 뜬 관광지가 있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의 ‘최참판댁’이다. 악양 들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고택으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코로나 사태 전 최참판댁 연 입장객은 20만 명이 넘었다.

최참판댁은 『토지』 무대로 유명하다. 『토지』가 어떤 책인가. 고(故) 박경리(1926∼2008) 선생의 대표작을 넘어 한국 문학이 이룬 성취라 일컬어지는 대작이다. 1969년 집필을 시작해 1994년 8월 15일 완결했으니 집필 기간만 26년에 이른다. 권수로 모두 21권이고, 원고지로는 3만1200장이다. 등장인물은 700명을 웃돈다. 수차례 TV 드라마로 방영됐고, 영화·가극·창극으로도 제작됐다. 『토지』를 끝까지 읽은 독자는 손에 꼽을 정도지만, 『토지』를 모르는 국민은 정말 손에 꼽는다.


최참판댁의 정체


경남 하동 평사리 최참판댁은 TV 연속극의 무대로 쓰려고 새로 지은 한옥이다.
‘평사리 논길을 따라 들어가면 들판 가운데에 소나무 두 그루가 우뚝 서서 정겹게 맞이하고 지리산 자락에는 초가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 중턱에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최참판댁이다.’

하동군청 홈페이지에서 인용했다. 하동군의 설명처럼 최참판댁은 한 폭의 그림처럼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다. 그러나 하동군의 설명은 가장 중요한 대목이 사실과 다르다. 최참판댁은 박경리 소설 『토지』의 배경이 아니다. 수많은 관광객이 거장의 숨결을 느꼈다고 여기는 공간은 사실 TV 드라마 세트장이다. 2004∼2005년 방영된 SBS 드라마 ‘토지’ 세트장으로 이 건물을 지었다. 초창기엔 세트장이라고 명시했었으나, 언제부터인가 세트장 문구를 뺐다. 2016년 하동군청은 최참판댁 뒤에 박경리문학관도 지어 가상의 스토리텔링을 완성했다. 여기서 의문. 평사리 최참판댁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격동의 한국사가 『토지』의 줄거리인데, 작가는 어디서 소재를 얻었을까.


불편한 심사


하동 악양 들판의 부부송.
“『토지』는 6ㆍ25사변 이전부터 내 마음 언저리에 자리 잡았던 이야기예요. 외할머니가 어린 나에게 들려주던 얘기가 그렇게 선명하게 나를 졸라대고 있었거든요. 그것은 빛깔로 남아있어요. 외가는 거제도에 있었어요. 거제도 어느 곳에, 끝도 없는 넓은 땅에 누렇게 익은 벼가 그냥 땅으로 떨어져 내릴 때까지 거둘 사람을 기다렸는데, 이미 호열자(콜레라)가 그들을 죽음으로 데리고 갔지요. … 삶과 생명을 나타내는 벼의 노란색과 호열자가 번져오는 죽음의 핏빛이 젊은 시절 내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어요(박경리,『가설을 위한 망상』, 320쪽, 2007).”

『토지』를 완성하기 전에 박경리는 하동에 가본 적도 없다. 외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로 줄거리를 구상한 뒤 지도에서 배경에 어울리는 장소를 찾다가 지리산 남쪽 평사리를 발견했던 것뿐이다. 『토지』를 마치고 평사리에 들렸던 작가가 “마을이 상상했던 모습과 흡사해 깜짝 놀랐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물론 그때 세트장은 없었다. 훗날 최참판댁을 직접 본 박경리는 되레 불편한 심기를 남겼다.

“다만 죄스러움이 가끔 마른 침 삼키듯 마음 바닥에 떨어지곤 한다. 필시 관광용이 될 최참판댁 때문인데 또 하나, 지리산에 누를 끼친 것이나 아닐까(『토지 1부 1권』, 2002년판 서문, 16쪽).”


천하 명당


화사별서 안채 마루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조한승 옹과 이상윤 숲길 이사장.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최참판댁 세트를 지을 때 본보기로 삼았던 고택이 남아 있다. 평사리에서 직선거리로 2.5㎞ 떨어진 정서리의 ‘화사별서(花史別墅)’다. 화사별서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57호로 지정된 지방문화재다.

화사별서는 조선 개국공신 조준(1346∼1405)의 25대손 조재희(1861∼1941)가 1890년대 초반 지은 집이다. 화사(花史)는 조재희의 아호이며, 별서(別墅)는 농사 짓는 별장이란 뜻이다. 별장 터를 물색하던 조재희에게 나라의 풍수를 보는 국풍(國風)이 명당을 찍어줬다고 한다. 현재 이 집엔 입택조 조재희의 손자인 조한승 옹이 혼자 살고 있다. 1926년생이니 올해 아흔여섯 살이다. 귀는 어두운 편이나 말씀이 정확하다. 오랜만의 손님이었는지, 반가이 맞아주셨다.

“할아버지가 집을 짓는데 너무 궁궐 같은 거라. 그래서 하동 원님이 방해했었다네. 할아버지가 보통 어른이신가? 한양에서도 권세가 대단했던 어른인데. 아주 혼쭐을 냈었다고 하네.”

화사별서 조한승 옹이 어릴 적 손수 적었다는 서책을 펼쳐보이며 읽고 있다.

조옹이 기거하는 안채 마루에서 내다보니 천하 명당이 실감 났다. 천왕봉에서 내려온 형제봉의 아랫자락이 뒤에서 껴안듯이 집을 감싸준다. 앞으로는 들이 펼쳐지고, 악양천 건너 멀리 비둘기 등처럼 누운 구재봉이 보인다. 악양천을 따라 너른 들로 나가면 섬진강에 이른다.


평행이론


화사별서 흙담. 동학농민운동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내부가 많이 훼손됐다지만, 옛날의 위엄은 남아 있다.
마을에서 화사별서는 ‘조부자 집’으로 통했다. 조부자 네는 악양에서 알아주는 천석꾼 집안이었다. 『토지』에서의 최참판댁처럼, 조부자 집에서 내다보이는 전답은 모두 조부자 네 재산이었다.

화사별서도 격랑의 현대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동학농민운동(1894) 때 화재로 소실됐다. 조재희는 16년에 걸쳐 다시 집을 지었고, 1921년 회갑 잔치를 열었다. 한양에서 명창들이 내려와 공연했는데, 공연을 보러 인파가 몰렸다가 한 명이 압사하는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중에도 피해가 있었다. 두 번이나 난을 겪으면서 화사별서는 왜소해졌다. 사랑채와 행랑채, 후원에 있던 초당과 사당 등이 불타 없어졌다. 지금은 안채와 연못, 그리고 흙담만 남았다. 『토지』의 최참판댁도 동학 난의 소용돌이를 피하지 못했다.

화사별서 방지. 네모난 연못을 방지라 한다. 집안의 기운이 빠져나가지 않게 하려고 연못을 팠다고 한다.

‘1879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고개가 무거운 벼 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 놓은 새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추석은 마을의 남녀노유,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강아지나 돼지나 소나 말이나 새들에게, 시궁창을 드나드는 쥐새끼까지 포식의 날인가 보다.’

『토지』는 한가위 풍경에서 시작한다. 박경리가 묘사한 평사리의 추석은 평화롭고 풍성하다. 긴 세월 흘렀어도 하동의 가을은 여전히 평온하다. 악양 들판의 벼도 이제 제법 고개를 숙였겠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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