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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글로-색슨' 왕따에 분노한 프랑스.. NYT‧BBC "현실 인정하라" 충고

이철민 선임기자 입력 2021. 09. 22. 15:49 수정 2021. 09. 22.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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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글로-색슨’의 미‧영‧호주 3국이 프랑스의 수십억 달러짜리 호주 디젤 잠수함 건조 프로젝트를 하루아침에 폐기하고 별도로 안보 동맹을 맺은 데 대한 프랑스와 유럽연합(EU)의 반발이 뉴욕의 유엔총회장으로 번졌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녹화 영상으로 하려던 연설도 포기했고, 프랑스의 부추김 속에 EU의 26개국 외무장관들은 뉴욕에서 미국의 ‘배신’을 비난하는 성명을 냈다. EU는 ‘미‧영‧호주의 핵 잠수함 건조 딜’에 반발해, 29일로 예정됐던 EU-미국 무역기술위원회(신설) 준비 모임도 연기했다.

2018년 5월2일, 호주를 방문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 두번째)이 말콤 턴불 당시 호주 총리(가운데)와 함께 시드니 항에 정박한 호주 해군의 콜린스급 잠수함 월러(Waller)의 갑판에 서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AFP 연합뉴스

프랑스는 이번 사태를 통해 ’앵글로-색슨’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不信)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쥐고 있는 카드는 별로 없다. BBC 방송은 “평정심을 되찾고 잔인한 진실을 받아들이라”고 프랑스에 충고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번 주말쯤 마크롱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위무(慰撫)’에 나설 예정이다.

◇ EU 차원에선 ‘비판’ 쏟아져도, 정작 26개 회원국 정상들은 ‘조용’

EU 수반인 우르술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20일 인터뷰에서 “우리 회원국[프랑스]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대우를 받았다”고 말했다. 조셉 보렐 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도 프랑스와의 “유대감”을 강조했다. 독일의 유럽외교 담당 장관인 미카엘 로스는 “이번 잠수함 사태는 EU에겐 정신을 확 깨게 만드는 벨 소리였다”며 “우리[EU]는 차이를 극복하고 (프랑스를 위해)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럽 각국 정상들은 조용하다. 유럽연합이 사실은 ‘분열’돼 있기 때문이다. 독일에게 미국은 전후(前後) 재탄생의 은인이고, 폴란드‧헝가리는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프랑스의 이익을 지키는 것보다는, 나토(NATO)를 통해 미국의 보호를 받는 게 급선무다.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구(舊)동구권 국가들에게 프랑스가 외치는 ‘유럽의 주권’은 재앙을 부르는 말이다. 도미니크 모아시 프랑스 정치학자는 “잠수함 딜(deal)은 마크롱의 평소 말처럼 ‘우리가 옳지만 우리는 혼자’라는 사실을 재확인할 뿐”이라고 뉴욕타임스(NYT)에 말했다.

◇프랑스 “대선 앞두고 개처럼 취급당해” vs. 호주 “호주군 수만 명, 프랑스에서 죽었다”

마크롱 대통령으로선 내년 4월10일 대선을 반 년 앞두고, 이런 모욕이 있을 수 없다. 게다가 지난 6월 나토 정상 공동성명에선 미국에 양보해 “중국의 명시된 야망과 공격적인 행동은 법치에 기초한 국제질서에 제도적 도전을 제공한다”는 문구까지 넣었다. 보수적 일간지 르 피가로의 외교분석 전문가인 르노 지라르는 “마크롱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을 돕고, 영국과는 군사 작전을 함께 하고, 인도‧태평양에서 호주를 도우며 ‘우리가 당신들 뒤에 있다’고 했는데, 개처럼 취급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너비 조이스 호주 부총리는 “호주군 수만 명이 두 차례 대전에서 프랑스 땅에서 프랑스를 지키려고 죽었다”고 반박했다.

◇BBC 방송 “평정심 찾고, 현실 받아들여라” 충고

영국의 BBC 방송은 “프랑스는 냉혹한 지정학(geostrategy)에는 감정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울분 터뜨리기는 그만하라”고 충고했다. BBC는 “세상에 어느 나라가 상대국의 비위 맞추려고, 자신의 국방 우선순위를 대충 처리하느냐”며 “호주는 중국의 위협을 과소평가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이에 맞게 억지력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평했다. “그게 국가의 존재 이유이고, 할 일”이라고 했다.

◇ “프랑스가 나토(NATO) 떠나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샤를 드골 대통령 이래 프랑스는 줄곧 핵무기와 자국의 힘에 기초해 ‘독자적인 군사력’을 발휘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프랑스는 드골 때인 1966년 나토를 탈퇴했고,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때인 2009년에야 나토에 복귀했다. 마크롱 대통령도 2019년 “나토는 뇌사(brain-dead)했다”며 독자적인 EU 방위군 신설을 줄기차게 외쳤지만, 결과는 미미했다. 이번에 프랑스에서 ‘나토 탈퇴’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BBC 방송은 “중국이 4년마다 프랑스의 전체 보유 전함 수만큼 전함을 새로 건조하는 상황에서, 호주는 미국이라는 수퍼파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NYT “프랑스가 열 받은 진짜 이유는 그토록 의심해 온 앵글로-색슨에 왕따 당한 탓”

뉴욕타임스(NYT)는 21일 “프랑스의 디젤 잠수함 건조 프로젝트는 사실 선체(船體)와 엔진은 호주에서 제작하고, 전자부품과 장착 무기는 미국 록히드 마틴사(社)에서 수입하는 것이어서, 계약이 취소됐다고 프랑스 방위산업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 것도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또 “프랑스도 디젤 잠수함으로는 중국의 위협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는 것이다.

NYT는 “프랑스가 열 받은 진짜 이유는 바로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그토록 싫어했던 ‘앵글로-색슨’족인 영어권 국가들에게 ‘왕따’를 당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드골은 “앵글로-색슨 국가들은 한 번도 우리를 진짜 동맹국으로 대우한 적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이 앵글로-색슨에 맞서 프랑스의 위엄을 지키고 독자적인 역할을 자임(自任)하려고, 나토군 지휘체계에서 탈퇴했고, 프랑스에서 나토 기지도 철수시켰다. 프랑스는 심지어 유럽연합의 전신(前身)인 유럽경제공동체(EEC)에 영국이 가입하는 것을 두 번이나 거부권을 행사했다. 드골은 캐나다를 방문해서는 프랑스어권인 퀘벡주의 ‘자유 퀘벡 만세(Vive le Québec libre!)’를 외쳐, 외교적 마찰로 방문 일정이 단축되기도 했다.

프랑스는 ‘왕따’ 사건 이후 호주와 미국의 자국 대사는 소환했지만, 그러나 주영(駐英) 프랑스 대사는 부르지 않았다. 프랑스 언론에선 “프랑스 정부가 영국을 그저 미국의 하수인 정도로 본다는 얘기”라는 해석이 나왔다.

◇미국의 프랑스 불신

‘앵글로-색슨’ 국가들도 역시 드골을 인정하지 않았고, 의심했다. 1945년 2월 전후(戰後) 질서를 잡기 위해 스탈린‧루즈벨트‧처칠이 얄타에서 만났을 때에 드골은 초청하지 않았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당시 드골을 ‘자유 프랑스의 정상’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프랑스는 2003년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지 않았다. 미 의회에선 ‘감자튀김인 ‘프렌치 프라이즈’를 ‘프리덤 프라이즈’로 바꿔 불렀다.

◇영미권 매체들 “미국‧프랑스 갈등, 오래가지 않을 것” 전망

그러나 마크롱은 드골이 아니다. 그는 프랑스 국력의 한계와 현실주의 국제정치를 잘 안다. NYT는 “마크롱이 미국과의 갈등을 계속 이어가지는 않을 것”이라며 “바이든도 프랑스와 화해하려 들 것이고 그렇게 세상은 돌아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프랑스의 2003년 이라크 침공 반대, 오바마 대통령의 2013년 시리아 공습 일방 취소 등으로 양국 관계는 악화됐지만, 다 사그라졌다. 이 신문은 “다만, 미국의 ‘아시아 선회’ 정책이 미국 독립전쟁 때 영국에 맞서 미국을 도운 가장 오래된 동맹국인 프랑스를 모욕하는 방식이 돼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BBC 방송은 “유럽이 단일 군대를 갖고 독자 노선을 가는 것이 요원한 만큼, 프랑스는 영국에 항상 문을 열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은 프랑스가 유럽에서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군대다운 군대를 가진 유일한 나라다. 그리고 두 나라는 국제정치와 전쟁 경험이 많고 군이 서로 존중해, 두 나라간 국방 협력은 너무나 논리적인 결론이라는 것이다. 이 방송은 “이게 마크롱이 깨달아야 할 최후의 진실”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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