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픔 달랬던 '한 봉지' 이젠 참기 힘든 '아는 맛'

기자 2021. 9. 23.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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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웠던 시절과 형편을 상징하는 음식이었다가 이제는 추억의 음식이자 일상의 주찬(主餐)이 된 라면. 한국인의 연간 라면 소비량은 70봉지. 1년 1095끼 중 70끼가 라면인 셈이다.
이우석 놀고먹기연구소장
서대문외할머니라면의 다슬기 라면.
삼숙이라면의 라면.
훼드라의 최루탄해장라면.
라스타의 얼큰해물라면.
권참치의 랍스터라면.

■ 이우석의 푸드로지

- 남녀노소 즐기는 라면

日 2차대전 패전 후 식량 부족

美서 받은 밀가루로 라멘 생산

한국에는 1963년 처음 들어와

1986년 농심 신라면 출시 후

‘매운맛 vs 순한맛’시장 양분

고급화·다양화…세계로 수출

韓,인스턴트 라면의 강국으로

‘드디어’ 라면이다. 그 시원이야 어쨌든 한국인이 가장 많이 먹는 음식 중 하나다. 1인당 매년 70개 이상을 먹는다. 노인도 어린아이도 해당하는 통계다. 그만큼 우리 삶에 단단히 자리 잡은 음식이다. 이쯤 되면 밥과 빵처럼 주식(主食)이라 해도 되지만 그리 규정하면 괜히 ‘쓸쓸해지니’, 끼니를 돕는 조식(助食)이라 하는 게 좋을 듯하다.

중국에서는 라면의 기원이나 형식을 생각하지 않고 ‘인스턴트’의 장점만을 염두에 둔다. 방피엔미엔(方便面)이라 부르는데 간편한 국수란 뜻이다. 대만이나 홍콩에서도 마찬가지다. 종주국에서 그러니 ‘라면이 어디서 왔니’하는 도래설은 별로 의미가 없어 보인다. 영어로는 즉석 국수(instant noodles)라 부르고 완성된 것은 누들 수프(noodle soup)라 한다. 요즘은 그냥 라멘(ramen)으로 부르기도 한다. 인스턴트 라면을 개발한 일본 제품으로 첫인상을 익혔던 탓이다.

중국의 것을 일본이 즉석식품으로 만들어 널리 알렸지만 이젠 세계적으로 많이 먹는 식품이 라면이다. 세계 어느 곳이나 재난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라면이 구호품으로 날아간다. 전쟁 난민이나 대지진 이재민에게도 그랬다. 라면은 그 탄생 배경 자체가 구황식품이었던 까닭이다. 패전 후 일본에 식량 부족 사태가 벌어지자 미국에서 원조한 밀가루를 이용해 만든 값싸고 편리한 국수가 바로 라멘이다.

1958년 대만 출신 귀화 일본인 안도 모후쿠(安藤百福·1910∼2007)가 최초의 라면 ‘치킨 라멘’을 만들었다. 저렴한 데다 끓일 물과 젓가락만 있으면 됐다. 든든한 한 끼를 대신하며 단숨에 시장을 사로잡았다. 한국에는 1963년 일본 묘조(明星)식품과의 기술 제휴로 처음 들어왔으며, 쌀 부족에 허덕이던 당시 사회에 단비 같은 대체식으로 각광 받게 됐다. 라면이 도입되는 데 삼양식품 전중윤 회장의 공이 컸음은 삼양의 기업 비사를 통해 잘 알려졌다.

처음엔 고전했다. 삼양식품이 최초로 내놓은 건 치킨 라면이었는데 당시 10원으로 가격이 그리 저렴하지 않았다. 한국인 입맛에도 맞지 않았다. 튀긴 면이라 느끼한 데다 일본인 입맛에 맞춰진 라면을 들여온 탓에 얼큰하지도 않았다. 이후 롯데(농심)와 동명식품 등이 뛰어들며 한국 인스턴트 라면 산업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1960년대 말에는 수많은 중소 라면 회사가 생겨났다 사라졌다. 삼양과 농심의 쌍두마차 시대에 터진 공업용 우지 파동 이후에는 청보식품, 팔도식품(야쿠르트), 빙그레, 오뚜기식품 등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라면의 전성시대는 1980년대 중반 이후다. 자고 일어나면 무슨 무슨 라면이 줄줄이 명멸했다. TV CF의 상당 부분은 당대 내로라하는 인기 스타들이 등장하는 라면 광고였다.

1986년 매운맛을 앞세운 농심 신라면이 등장한 후 국내 라면 시장은 매운맛과 그렇지 않은 맛으로 양분 재편됐다. 일반 순한 맛의 제품도 매운맛 버전이 따로 나오니 매콤한 맛이 좀 더 많다. 이후 고급화·다양화된 라면은 세계로 수출되며 한국은 인스턴트 라면의 최강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해외에서 한국 라면의 인기는 국산 스마트폰 못지않다. 이처럼 한국에서 라면 산업이 발전하게 된 것은 사실 내수에서 치열한 경쟁을 거쳐온 덕이다. 대부분 라면이 맛있고 든든했지만 한국 소비자의 입맛은 까다로웠다. 라면 한 봉지를 사더라도 자신의 입맛을 추구했다. 저마다 레시피가 있었다.

인스턴트 라면의 활약은 가히 놀랍다. 세계인의 입맛과 시장을 사로잡는 데 반세기도 채 걸리지 않았다. 세계에서 연간 1000억 개 이상이 소비되는 인스턴트 라면. 인류의 식생활을 바꾼 음식이라 할 만하다.

인스턴트 라면의 원리는 간단하다. 밀반죽을 면으로 뽑아내면서 뜨거운 수증기로 바로 익힌다. 이후 꼬불꼬불한 면발을 일정한 형태(사각형이나 원)로 정형한 다음 기름에 튀겨 말린다. 애초 면 반죽에 양념을 해서 나왔지만 요즘은 거의 가루로 된 수프를 별첨한다. 가볍고 부피가 작으며 보존 기간이 길다. 탄수화물과 지방이 대부분이라 열량도 높다. 성인 한 끼의 칼로리를 충분히 충족시킨다. 처음에 나온 라면은 대부분 배를 채우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요즘은 건더기 별첨이나 레토르트 수프 등을 통해 영양을 보강한 제품도 나오고 있다.

뉴욕타임스가 라면에 대해 쓴 칼럼이 걸작이다. 탈무드 구절을 인용하며 라면을 예찬했다. “인스턴트 라면을 끓일 수만 있으면 신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사람이 평생 먹을 수 있도록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주면 된다고 했지만, 인스턴트 라면을 주면 그 무엇도 가르쳐줄 필요가 없다.”

라면 전문점의 다양한 라면 메뉴처럼 만두와 햄, 어묵, 콩나물 등이 추가로 들어가면 인스턴트 라면이라 할지라도 한 그릇에 든 영양가는 더욱 풍성해지게 마련이다. 값비싼 식재료를 넣은 고급 라면까지 등장했다. 각종 해산물을 넣은 해물라면부터 대게나 홍게, 랍스터를 넣은 라면, 삭힌 홍어를 넣어 끓여낸 홍어라면도 등장했다. 한우 국물과 고기 건더기를 넣었다는 라면도 나왔다.

과거에 라면은 가난했던 시절을 상징했다. 운동선수가 매일 라면만 먹고 달렸다거나, (변변한 도시락도 없이) 컵라면 하나 챙겨 일터로 나갔다는 식의 고생담에 익숙했다. 하지만 이제 한국인에게 라면이란 그저 대체식, 증량식이 아니다. 추억의 음식이자 일상의 주찬(主餐)이다.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에너지를 담당하는 조식이자 야식, 등산객이나 캠퍼들의 낭만이다. 학생들의 공부의 지루함을 덜어주는 조력자이기도 하다. 가난한 이들도 먹지만, 부자들도 먹는다. 편도에 몇백만 원 이상 하는 국적기 상위 클래스에선 언제나 라면을 식사나 간식으로 주문할 수 있다.어쩌면 우리는 라면 앞에서 누구나 평등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놀고먹기연구소장

■ 어디서 먹을까

◇서대문외할머니라면 = 다슬기가 라면에 들어간다면 가공할(?) 해장력을 낸다. 다슬기 특유의 진한 풍미가 연녹색 국물에 스몄다. 자칫 진한 다슬기 향이 모든 맛을 집어삼킬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쌉쌀한 다슬기 맛이 얇은 라면 수프에 부드럽게 착 들러붙어 “으싸 으싸” 시너지를 낸다.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6길 59. 다슬기라면 7000원.

◇삼숙이라면 = 종각 뒤에서 해물라면, 부대라면 등을 끓여 파는 라면집이다. 대표 메뉴는 매운 국물에 콩나물과 파채를 넣은 삼숙이라면. 라면은 그 기본일 뿐 국밥집이라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해물라면에 홍합과 새우, 절단꽃게가 들어간다. 서울 종로구 종로11길 30. 6000원.

◇훼드라 = 1973년 개업해 오랫동안 신촌을 지켜오며 연세대생과 인근 대학생 술꾼들에게 대대로 유명한 선술집. 라면 메뉴는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맵대서 ‘최루탄’이란 이름이 붙었다. 조개와 청양고추를 넣어 얼얼하면서도 시원한 맛을 낸다.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5길 32. 최루탄해장라면 5000원.

◇라스타 = 라면을 요리처럼 취향에 따라 종류별로 즐길 수 있는 라면 전문점이다. 분위기도 딱 파스타집의 느낌. 시그니처 메뉴인 얼큰해물라면을 많이 찾는다. 새우와 조개, 오징어 등을 넣고 매콤하게 해물탕 식으로 끓였다. 서울 강서구 강서로45라길 36 1층. 얼큰해물라면 7000원.

◇서촌계단집 = 해물 전문 소줏집으로 유명한 곳. 바다라면이란 이름에 걸맞게 해물을 넣어 라면을 끓여준다. 국물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오징어와 홍합, 피조개 등을 잔뜩 넣었다. 조개의 감칠맛이 가득 우러난 국물은 살짝 매콤한 편.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1길 15. 바다라면 7000원.

◇권참치 = 직접 참치를 해체해 가격에 맞춰 다양한 코스로 내는 참치 전문점이다. 이곳에 듣기만 해도 탄성을 자아내는 랍스터 라면이 있다. 중간 크기의 랍스터를 잘라 넣고 끓여낸 라면이다. 랍스터 특유의 진한 풍미가 국물에 녹아들어 참치 회식의 깔끔한 마무리로 좋다. 따로 팔지는 않고 참치 코스에 포함된 메뉴다. 서울 동작구 사당로30길 142 2층.

◇동아매점 = ‘매점라면’의 진수, 해장라면이 맛있다. 콩나물과 김치, 고춧가루 정도만 넣었는데 입맛을 확 당긴다. 라면에 넣기 딱 좋게 담근 김치가 시원하고 새큼한 맛으로 숙취에 깔깔해진 혀를 씻어주는 역할을 한다. 서울 중구 남대문로 117 지하 1층. 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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