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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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버리지 못하는 사람

한겨레 입력 2021. 09. 23. 16:56 수정 2021. 09. 23.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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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거의 내 책장이잖아!"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라는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방의 책장을 보고 여자 주인공이 자신과 놀라울 정도로 닮은 취향에 감탄하며 하는 대사다.

이 부분이 인상 깊었던 나는 집으로 돌아와 내 책장을 살펴봤다.

그것들을 종종 꺼내 보거나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싶어 보관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은 만나지 않고 감정도 없는 사람의 사진이 홈 화면에 하루 종일 떠 있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고 누가 보면 오해를 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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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창]

[삶의 창] 정대건 | 소설가·영화감독

“이건 거의 내 책장이잖아!”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라는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방의 책장을 보고 여자 주인공이 자신과 놀라울 정도로 닮은 취향에 감탄하며 하는 대사다. 이 부분이 인상 깊었던 나는 집으로 돌아와 내 책장을 살펴봤다. 책들이 카오스처럼 꽂혀 있어 아무런 취향도, 기준도, 애정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책을 쓰는 사람의 책장이 어떠해야 한다고 정해진 것은 없지만 왠지 부끄러웠다. 내 취향의 지도를 그려볼 수 있는 컬렉션을 갖고 싶어진 나는 10년 넘게 방치 상태였던 책장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인터넷 서점은 책 팔기를 쉽게 해놓았다. 바코드를 찍기만 하면 책값이 오백원부터 만원까지 다양하게 책정됐다. 그럼에도 먼지 쌓인 책들을 쌓고 선별하는 데 종일 걸렸고 세 박스가 나오는 중노동이었다. 가족들은 갑자기 일을 벌이는 나를 보고 돈이 필요하냐고 팔지 말라고 만류하기도 했다. 나는 “근 10년간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책이라면 앞으로도 볼 일이 없을 거”라며 확신을 가지고 대답했다. 정리의 달인 곤도 마리에는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전공 서적이었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벽돌책에 더 이상 설레지 않았고, 과감히 책들을 박스에 집어넣었다.

이런 풍경은 낯선 것이었는데 물건을 좀처럼 버리지 못해 정리 좀 하라고 잔소리 듣는 것은 늘 내 쪽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호더’ 기질이 있는 것일까 의심한 적도 있다. 중학교 때 주고받았던 별 내용 없는 낙서 같은 쪽지, 여행지의 영수증과 기차표는 그렇다 쳐도, 부피를 크게 차지하는 군 복무 시절의 소모품까지 보관하고 있다. 그것들을 종종 꺼내 보거나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싶어 보관하는 것도 아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행동을 어떤 물건에 담긴 행복한 추억이 물건을 버리는 것과 동시에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나의 면모는 디지털 데이터에도 마찬가지였다. 휴대전화 홈 화면에 저절로 사진이 뜨는 위젯을 설정했더니 수년간 들춰보지도 않던 여러 추억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지금은 만나지 않고 감정도 없는 사람의 사진이 홈 화면에 하루 종일 떠 있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고 누가 보면 오해를 살 수도 있다. 휴대전화가 느려질 정도로 용량을 차지한 수천 장의 사진을 매번 지우지 못하는 것도 역시 한꺼번에 추억을 지워버리는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한꺼번에 지우지 못하던 사진을 위젯의 도움을 받아 그때마다 한 장씩 지우는 중이다.

물론 유료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용하면 더 많은 사진을 보관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넓은 공간을 가지고 더 많은 책장을 사면 책을 버리지 않고도 많은 책을 소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과연 더 좋은 방법일까. 애초에 소비 지향적인 사람이 아니고 비우는 삶이나 미니멀 라이프에 특별한 뜻을 두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이런 생각을 한다. 128GB(기가바이트)가 아니라 무한정 용량이 있더라도 결국 소중히 여기고 남기는 추억에는 한계가 있을 거다. 책장이 1개가 아니라 10개 있더라도 결국 손이 가는 책을 선별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구별하는 ‘별애’가 더 자연스러운 존재이고, 소유한 사물에 쏟는 애정도 그러할 것이다.

며칠이 지나 인터넷 서점에서 정산표를 보내주었는데 변색 등으로 매입 불가능한 상태라며 폐기처분하는 책들이 예상보다 많았다. 결국 고객센터에 배송비가 발생하더라도 폐기 예정 책들을 반송해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다시는 펼치지 않으리란 것을 확신하고 버려도 된다는 마음으로 선별했으면서도, 역시 사람이 쉽게 변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래도 비운 칸만큼은 내 취향의 컬렉션으로 책장을 채울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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