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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의 그래도 진보정치] 전태일 정신의 잃어버린 한 고리

한겨레 입력 2021. 09. 23. 16:56 수정 2021. 09. 24.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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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의 그래도 진보정치]

장석준|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전태일 열사의 삶을 그린 애니메이션 <태일이>가 올해 11월 개봉을 목표로 제작되고 있다. 전태일재단 등이 공동제작자인데, 시민도 십시일반으로 참여할 길이 열려 있다. 시민 투자자인 1970인의 제작위원을 모집하고 있으며, 후원자는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에 이름이 올라갈 예정이다.

그러나 1970명을 목표로 했던 제작위원 모집이 쉽지 않다고 한다. 제작진은 지역별로 시민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지난 7월 광주에 이어 최근 대구에서 이소선 여사 10주기 행사와 함께 제작위원 협약식을 했다. 앞으로 제주, 부산 등에서도 제작위원 협약식이 열린다고 하니, 늦게나마 뜻있는 이들의 더 많은 참여가 있길 기대한다.

제작 과정에 이렇게 곡절이 많아진 것은 제작진이 예상하지 못한 한 가지 문제 탓이라 한다. 노동조합의 집단적 참여가 생각보다 저조하다는 것이다. 만약 노동조합들이 좀 더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면, 개봉을 코앞에 두고 제작위원을 조직해야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한 편의 영화 제작을 둘러싼 일화만으로 노동운동 전반을 논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이는 현대 한국 사회운동의 원점이나 다름없는 전태일 정신과 지금 우리 현실 사이의 거리를 새삼 곱씹게 만드는 사례임이 틀림없다.

전태일을 기억하며 누구나 가장 먼저 떠올리는 외침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이다. 전태일은 이 부르짖음을 통해 지배자들에게 그들의 약속을 법전 속 문구 그대로 지키라고 요구했다. 이후 한국의 사회운동은 이 정신에 따라 국가와 자본에 ‘민주주의’라는 말에 값하는 그들의 의무를 끊임없이 따져 물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 점에서 전태일 정신은 단절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태일의 삶에서 건져낼 수 있는 유산은 아니다. 전태일은 재단사였고, 재단사는 봉제 작업장에서 남성이 주로 맡는 숙련직이었다. 어린 여성 노동자들과는 처지가 달랐다. 만약 전태일이 요즘의 어떤 정규직 노동자들처럼 이들과 자신이 ‘다른’ 존재라 느꼈다면, 지금껏 기억되는 ‘전태일 정신’이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태일은 ‘우리’라는 말을 결코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되물었고, 그래서 어린 여성 노동자들과 한편에 서는 ‘우리’에 도달했다. 그 ‘우리’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다.

아쉽게도 전태일 정신의 이런 측면은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다.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은 더 넓은 ‘우리’를 새롭게 구성하고 실체화한다는 과제를 소홀히 했다. 대신에 지배 질서가 그어놓은 길을 따라 걷다 머물렀을 뿐인 기업이나 학교에서 ‘우리’를 찾았다. 이게 너무 협소하다 싶으면 더 큰 ‘우리’를 불러내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추상적인 민족이나 국민일 뿐이었다. 더러 계급도 이야기됐지만, 구체적인 ‘우리’로 풀어내지 못하는 한 공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현실의 좁디좁은 ‘우리’와 그 추상적 대안이라는 두 극 사이의 거리는 너무 멀었고, 결국 그 광활한 중간지대에서는 서로 경쟁하고 질시하는 부족들만 창궐한다.

‘우리’가 이렇듯 편협하거나 실체가 모호하다 보니 지배자들을 향한 요구 역시 날카로움과 힘을 잃는다. 가진 자들에게 뭔가를 계속 요구하기는 하지만,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을 때처럼 저들의 가슴을 때리고 뒤흔들지는 못한다. 여기가 노동운동이 멈춰 있는 지점이다. 더불어 한국 사회 전체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를 극복하자면, 간단치 않은 논의가 있어야 하고 지난한 실천이 필요하다. 하지만 출발은 역시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어떤 형식으로라도 모이는 것일 수밖에 없으리라. 50년 전에 그도 그랬다. 바보회를 만들고 삼동회로 발전시켰으며, 그가 떠나자 남은 이들이 더 넓게, 더 열렬히 모이기 시작했다. <태일이> 제작에 참여하는 작은 실천을 비롯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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