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이데일리

"남자도 총리 되나요"..독일인 인식 바꾼 메르켈 리더십 막 내린다

김보겸 입력 2021. 09. 23. 17:04 수정 2021. 09. 23. 19:36

기사 도구 모음

음성 기사 옵션 조절 레이어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16년 집권 마치고 오는 26일 퇴임
퇴임 앞두고도 선진국 16개 국민 77% 지지받아
정치보다 정책, 정치 양극화 탈피, 여성참여 강화
메르켈 떠난 자리엔 아프간 난민 문제 남아
메르켈 독일 총리가 오는 26일 16년간의 총리직을 내려놓고 정계에서 은퇴한다(사진=AFP)
[이데일리 김보겸 기자] “남자도 총리가 될 수 있나요?”

독일 청소년들 사이에선 총리는 여성이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1990년대 중반 이후에 태어난 독일 청소년들은 어릴 때부터 여성 총리를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여성 총리를 뜻하는 단어 ‘칸츨러린(Kanzlerin)’은 익숙하지만 남성 총리 ‘칸츨러(Kanzler)’는 생소하다.

독일 국민을 넘어 국제사회의 존경과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오는 26일(이하 현지시간) 16년간의 총리직을 내려놓고 정치에서 떠난다. 스스로 총리에서 물러나는 사람은 역대 독일 총리 중 메르켈이 유일하다.

퇴임을 앞둔 메르켈의 인기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퓨리서치센터가 22일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16개 선진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에서 77%는 “메르켈이 국제정세에 대해 옳은 일을 할 것이란 확신이 있다”고 답했다. 메르켈은 러시아와 중국, 프랑스 정상은 물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제치고 가장 신뢰하는 정치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BBC와 가디언,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외신들이 주목한 메르켈의 성과 세 가지를 추려 분석했다. ‘정치보다는 정책’, ‘정치 양극화 탈피’, ‘여성의 대표성 제고’다.

지난 2000년 독일 보수우파 기독민주당 첫 여성 대표로 선출된 메르켈(사진=AFP)
정치보다는 정책 토론

정치학자 매슈 크보트럽은 그의 저서 ‘앙겔라 메르켈: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에서 메르켈의 영향력에 대해 “독일 정치를 정치보다는 정책에 대한 토론으로 바꿔 놓았다”고 평가한다. 테스토스테론 가득한 남성들의 모임이었던 독일 정치가 메르켈 총리 하에서 훨씬 정책 지향적으로 바뀌었다는 설명이다.

이는 메르켈이 과학자 출신이라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카를 마르크스대학(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그는 정계 진출 전 동독에서 양자물리학자로 일했다. 그러면서 동독의 공산주의 통제에 반기를 들며 동독 정보기관과의 협조는 단호히 거부했다. 사실을 기반으로 접근하는 물리학자로서의 태도가 정치에도 적용돼 정책 위주의 토론을 활성화할 수 있었다고 BBC는 평가했다.

또한 코로나19 사태 대응에 있어서도 과학자 출신 메르켈의 공이 컸다. 총리가 직접 나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며 마스크 착용과 백신 접종 등 국민들을 설득했고, 정부와 방역전문가들이 한 목소리로 국민들을 방역지침에 동참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독일은 코로나19 대응에 있어서 세계보건기구(WHO)는 물론 중국, 유럽연합(EU), 그리고 미국보다도 방역에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메르켈이 정치 스승 헬무트 콜 전 총리와 함께 있다(사진=AFP)
정치 양극화 탈피

메르켈은 지난 2000년 보수 우파 기독민주당 최초의 여성 대표가 됐다. 그가 이끄는 기민당은 2005년 총선에서 2차대전 이후 최초로 중도좌파 성향의 사회민주당과 좌우 대연정을 이뤘다. 과반 정당이 탄생하지 못해 연정을 꾸려야만 하는 독일 정치 체제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측면이 있지만,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서라면 성향이 달라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메르켈 리더십을 보여줬다.

여성의 대표성 제고

메르켈은 재임 기간 동안 여성의 대표성을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우선 그 자신부터가 독일 최대 보수정당인 기민당에서 처음으로 여성 대표에 오른 데다 2005년에는 첫 여성 총리 기록을 세웠다. 정치적 스승인 헬무트 콜 총리와 함께 재임기간 16년으로 역대 최장수 총리에 올랐으며, 지난 2011년에는 미국 주간지 타임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뽑히기도 했다.

퇴임을 앞둔 지난 8일 여권신장 운동가들과의 간담회에 참석해서는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 모두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재임 기간 독일의 첫 여성 국방장관에 오른 우르술라 폰데어라이엔은 현재 EU 역사상 첫 여성 집행위원장을 맡는 등 독일에서 과제가 되고 있는 여성의 정치 참여를 크게 늘렸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트럼프 당선 직후 베를린으로 날아가 메르켈에게 4선 연임을 설득했다(사진=AFP)
국제사회 신뢰 뒤로한 채 퇴장하는 메르켈

메르켈 리더십은 많은 국제사회 지도자들로부터 신뢰를 얻었다. 특히 메르켈 집권 16년간 대통령이 네 번 바뀐 미국과의 유대관계가 돈독하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두 번째 임기 때 총리에 오른 메르켈을 텍사스주로 초대해 이렇게 말했다. “텍사스에서 누군가를 집에 초대하는 건 따뜻함과 존경의 표현이다. 내가 메르켈 총리에게 느끼는 감정이 바로 그렇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때에는 미국 최고의 영예인 ‘자유의 메달’을 받기도 했다. 당시 오바마 전 대통령은 메르켈을 향해 “지혜와 솔직함, 리더십, 그리고 실용적인 접근을 높이 산다”고 설명했다. 오바마는 지난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독일 베를린으로 날아가 4선 도전을 고민하던 메르켈을 설득했다고도 한다.

정반대 스타일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거쳐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지금 미국과 독일은 2차대전 이후 최고 수준의 밀착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의 혈맹인 영국이 최근 아프가니스탄 철군 과정에서 미군으로부터 정보를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반면 독일은 유대관계를 과시했다. 영국이 지난 2016년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를 선언한 뒤 EU 내 독일의 위상도 점점 커지고 있다.

지난 16년간 독일을 이끌어온 메르켈 리더십이 막을 내리면 포스트 메르켈을 뽑는 차기 총선이 치러진다. 메르켈이 떠난 빈자리에는 당장 아프가니스탄 난민 문제가 남아 있다. 새로운 과제를 앞둔 국제사회는 벌써부터 메르켈을 그리워하는 분위기다.

김보겸 (kimkija@edaily.co.kr)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

포토&TV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