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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경성] 펜 던지고 금 캐러간 채만식, 김기진..1930년대 조선의 황금광 열풍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입력 2021. 09. 25. 06:01 수정 2021. 09. 25.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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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法服과 청진기 던지고 너도나도 광산 투자
작가 채만식은 1938년 금광 브로커로 뛰어들었다. 사금 시추 전문가였던 형들의 금광 개발을 돕기 위해서였다. 금광은 허탕이었지만 창작엔 도움이 됐다. 채만식은 1939년 금광꾼 경험을 토대로 쓴 장편 '금의 정열'을 매일신보에 연재했다.

‘모든 광(狂) 시대를 지나서 이제는 황금광(狂)시대가 왔다…너도 나도 금광, 금광 하며 이욕에 귀밝은 양민들이 대소몽(大小夢)이다. 강화도는 사십 간만 남겨놓고 모두가 소유자 있는 금땅이라 하고 조선에는 어느 곳이나 금이 안 나는 곳이 없다 하니 금 땅 위에서 사는 우리는 왜 이다지 구차한지?’

만문만화가 석영 안석주(1901~1950)는 대공황 여파가 불어닥친 1932년 ‘황금광시대’(조선일보 1932년11월29일)란 만평을 실었다. 조선 땅에 금광 붐이 일기 시작한 때였다.

'모든 광 시대를 지나서 이제는 황금광 시대가 왔다. ' 1930년대 조선땅에 금광 개발 붐이 휩쓸었다. 안석영은 1932년 11월29일자 조선일보에 실은 만평 '황금광시대'에서 '조선에는 어느 곳이나 금이 안 나는 곳이 없다 하니 금 땅위에 사는 우리는 왜 이다지 구차한지?'라고 꼬집었다.

20~30대가 ‘영끌’해서 아파트 구입에 올인하고, 대학생까지 비트코인에 목매는 요즘의 투자 광풍과도 비교할 수 없는 광적(狂的) 열기가 1930년대 조선을 휩쓸었다. 골드 러시(Gold Rush), 금광(金鑛) 열풍이었다.

1929년 10월 월가 주식대폭락으로 시작된 경제대공황은 1930년대 내내 세계를 지배했다. 화폐가치는 폭락하는 반면, 금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조선의 금광열풍은 대공황과 함께 폭등한 금값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1933년 한 해에만 5025개 광산이 개발됐고, 그 중 금은광이 3222개나 됐다. 1934년 금광 출원은 5972건, 1935년은 5813건에 달했다.금 생산량도 1931년 9031kg에서 1만1508kg(1933), 1만4710kg(1935), 2만2548kg(1937)로 급증하더니 1939년 3만1173kg으로 정점을 찍었다. 한해에만 31톤이 넘는 황금이 채굴된 것이다.

◇사회주의, 여성운동, 독립운동가까지 금광 투신

1938년 11월 잡지 ‘삼천리’엔 ‘광산하는 금광신사기’란 기사가 실렸다. 신간회 경성 지회장이자 연희전문 교수를 지낸 유석 조병옥, 조선일보 영업국장 출신 김기범, 상하이 임정에서 활동하던 최현, 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 출신 사회운동가 정운영, 근우회 집행위원장 출신 여성운동가 정칠성 등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여성운동가 할 것없이 금광채굴에 뛰어들었다는 내용이었다. 의사, 변호사, 문인, 기자 등 지식인들도 펜이나, 법복, 청진기 대신 곡괭이를 들었다.

‘금광 3부작’을 낸 작가까지 있었다.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단편 ‘소낙비’·원제 ‘따라지 목숨’)로 등단한 김유정(1908~1937)이다. 등단 첫해인 1935년 ‘금 따는 콩밭’(개벽 1935년3월) ‘노다지’(조선중앙일보 1935년3월2일~9일) ‘금’(영화시대 1935년3월)을 발표했다.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인 1934년 충청도 예산 일대의 금광을 전전한 그의 체험이 녹아있다.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김유정. 김유정은 등단 첫해 '금따는 콩밭' '노다지' '금' 등 '금광3부작'을 발표했다. 그는 등단 전 충남 예산 일대 금광을 전전하며 체험을 쌓았다.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1등 당선된 김유정 단편 '소낙비' 첫회. 연재소설처럼 삽화까지 더해 6회까지 실렸으나 일제에 의해 연재가 중단됐다.

◇금광 브로커로 뛰어든 채만식

금광 개발에 뛰어든 대표적 문인은 ‘탁류’ ‘레디메이드 인생’을 쓴 채만식(1902~1950)이다. 셋째, 넷째 형이 사금광 시추 전문가였다. 월급쟁이로 광산을 떠돌던 이들은 1938년 여름 기회를 잡았다. 청주 남택광에서 금광개발권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개발 자금 2000원을 조달할 길이 막막했다. 채만식은 유명작가였지만 형들이 잡은 기회를 모른 채 할 수없었다.

채만식은 1925년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를 시작으로 개벽사, 중앙일보를 거쳐 1934년말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했다. 1936년 1월 퇴사한 그는 1937년부터 장편소설 ‘탁류’(1938년5월까지 총 196회)를 조선일보에 연재했고, 1938년엔 조선일보 월간지 ‘조광’(1월~9월)에 ‘태평천하’(원제는 天下太平春)를 연재했다.

채만식이 금광 개발에 뛰어든 것은 대표작 ‘탁류’, ‘태평천하’ 집필을 마친 직후였다.

투자금 조달이 그의 역할이었다. 몇 달이나 돌아다녔으나 헛수고였다. 천신만고 끝에 그해 11월 전주(錢主)를 구했다. 동아일보에서 같이 일했던 소오(小梧) 설의식(1900~1954)이었다. 혹한을 무릅쓰고 금 캐기에 몰두했지만 허탕을 쳤다. 손해만 5000원 이상이 났는데, 전부 소오의 자금이었다. 채만식은 ‘그 뒤로 1년간 그다지도 가깝던 소오를, 면목이 없어 차마 찾아가지 못했(다)’고 회고할 만큼 민망해했다.

◇메스와 법복, 집어던지고 금광으로

채만식은 1년여 후 금광 개발에 뛰어든 회고담을 썼다. 최재서가 발행하던 문예지 ‘인문평론’ 2권2호(1940년2월)에 실은 ‘금(金)과 문학’이다. ‘의사는 메스를 집어 던지고, 변호사는 법복을 벗어 던지고, 금광에로 금광에로 달려 간다. 기생이 영문도 모르고서 백오원을 들여 광을 출원하는가 하면 현직의 교원이 감석을 들고 분석소엘 찾아 간다.’

너나 없이 광산 개발에 뛰어드는 세태가 담겨있다. 채만식은 ‘하는 덕에 소설쟁이도 금광을 하자고 덤벼 보았었고’라며 금광투신기를 변명하듯 썼다. 채만식은 이 글에서 ‘손수 흙을 파 올려 금을 캔다거나, 정과 망치를 쥐고 돌을 깨뜨린다거나 하기는커녕, 현장에서 벗어 붙이고 인부 감독조차 한번도 못 해본, 천하 알량스런 금광꾼이었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친우의 돈을 빌려 투자한 이상 광산을 떠날 수없었다. 낮엔 광산에서, 밤엔 책상에서 ‘투 잡’을 뛰는 생활을 이어갔다. 꽁트 ‘점경’(조선일보 1938년 12월28일 )과 김남천 신작을 평론한 ‘大河를 읽고서’(1939년1월)는 이 시절 쓴 글이다.

광산 체험은 작가로서는 무익하지는 않았다. 1939년6월19일부터 11월19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金의 정열’은 금광꾼 체험이 바탕이 됐다. 금광으로 돈을 번 주상문을 둘러싼 인간군상을 그린 작품이다.

채만식은 금광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에도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1936년에 쓴 수필 ‘문학인의 촉감’(조선일보 6월7일, 9일)에는 황금광 시대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한 해전 광주(光州) 근교에서 금광을 경영하는 최군을 방문했을 때 들었다는 이야기다. 어느 농부가 자기 집 근처에서 금이 쏟아져나온다고 하니까 자기 집 벽을 헐어서 함지에다 흔들어보았다. 그랬더니 금 세돈이 나왔다는 것이다. 산이나 강이 아니라 집안에서도 금을 캐던 시절이었다.

◇낮엔 금 캐고, 밤에는 글 쓴 김기진

1962년 서울 수유리 팔봉 김기진 집을 찾은 박정희 최고회의의장. 박 의장은 이 무렵 김기진 집을 자주 찾아 얘기를 나누곤 했다. 김기진은 1934년 넉달간 낮에는 금을 찾아 헤매고 밤에는 글을 쓰는 '투잡'생활을 했다./김용한씨 제공

채만식에 앞서 금광에 뛰어든 작가는 팔봉(八峰) 김기진(1903~1985)이다. 1921년 일본 릿쿄(立敎)대에 들어간 김기진은 신극운동단체인 ‘토월회’ 결성을 주도하면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매일신보, 시대일보, 중외일보를 거쳐 1930년 조선일보 사회부장으로 입사했다. 팔봉은 조선일보 입사전인 1928년 처가가 있던 함경남도 이원에서 정어리 공장을 운영해본 경험도 있었다. 조선일보를 관둔 이듬해인 1934년 4월 평남 안주의 금광으로 달려갔다. 재수가 터지면 신문사 하나 차릴 요량으로 덤빈 일이었다.

김기진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이른바 카프(KAPF) 조직에 앞장선 인물이다. 이런 사회주의 계열 작가까지 낮에는 금을 캐고 밤에는 ‘청년 김옥균’ ‘장덕대’ 등과 같은 작품을 썼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나도록 금광에선 금싸라기 한 톨도 나오지 았다. 전주(錢主)는 일찌감치 손을 털었고, 김기진은 돈 빌리러 상경했다. 불과 넉달만에 요즘 돈으로 수억원을 날린 김기진은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김기진의 형인 조각가 김복진은 이렇게 조언했다고 한다.

‘얘! 네가 할 광산은 다른 곳에 없고, 여기 네 책상 위에 있다. 이 원고지 위에 있다. 원고지 한 장을 쓰면 광맥을 한 자쯤 파는 것이고, 열 장을 쓰면 열 자쯤 판 것이란 말이다. 이 원고지 광맥밖에 너의 광맥은 없다…’

◇참고자료

전봉관, 황금광시대, 살림, 2006

안석영, 황금광시대, 조선일보 1932년 11월29일

채만식, 문학인의 촉감, 조선일보 1936년 6월7일, 9일

채만식, ‘금과 문학’, 인문평론 2권2호, 1940 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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