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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경계를 응시한 빛, 깊은 밤의 고요를 비추는 달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 입력 2021. 09. 25.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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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달과 빛이 있는 풍경
빛 정보영
오랜 시간 정물과 공간을 빌려
바라보기만 했던 빛의 경험을
흘러가고, 사라지는 것으로 그려
빛을 통해 그림자를 나타내고
그림자를 통해 빛을 연상케하며
가장 성숙한 빛의 아름다움 표현
달 김덕용
고르게 손질한 나무에 색을 메워
심해와 같은 깊은 어둠을 배경으로
순백색의 둥근 도자기가 떠오르면
넉넉하고 푸근한 온기 전해져
잔잔한 파도와 같은 나무의 결
은은하게 일렁이는 달빛 그려져
정보영의 작품에서 사람은 늘 부재 중이다. 하지만 그 부재를 통해 사람이 이전에 머물렀던 흔적을 느끼게 된다. 정보영 ‘Lighting up’. 이화익갤러리 제공
#추석에 만난 ‘달’과 ‘빛’

한해의 후반기에 접어들자 정리하고 마무리지어야 할 일이 부쩍 늘었다. 평소보다 알람을 두어 시간 일찍 맞추고 생활한 지도 꽤 되었다. 그런데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사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더 노력해야 한다는 강박은 오히려 일의 효율을 떨어트리고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러던 와중에 숨통을 틔워준 것은 추석 무렵의 둥근달이었다.

올해 추석 무렵의 달은 제 모습을 어느 때보다 한껏 드러냈다. 추석을 앞둔 일주일간 푸르고도 높았던 가을 하늘 덕이었다. 어두워진 뒤에도 맑고 깨끗한 하늘은 차오르는 달을 잘 보여주었다. 그렇게 가득한 달은 초승달 끝같이 날카롭던 마음을 푸근하게 해줬다. 그 형태를 감싸며 발산한 빛이 마음에 닿아 온기를 전해준 덕인 것 같았다. 그래서 여기에 ‘달’과 ‘빛’이 있는 그림들을 나누어 그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

#김덕용, ‘달’이 있는 풍경

김덕용(1961~)은 한국적 정서를 담은 작업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다. 그를 설명하는 데 ‘한국적’이라는 단어가 붙지만, 그의 작품은 크리스티 등을 통해 해외에서도 사랑받아 왔다. 작가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 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이화익갤러리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서울시립미술관, 박수근미술관, 전북미술관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박수근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스위스 한국대사관, 아부다비 문화 관광청 등 국내외 기관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김덕용은 1961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고 상을 휩쓸었다. 중학교 때는 한 수상식에서 광주 MBC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이때 장래 희망에 관해 이야기하며 한국적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때 밝힌 포부가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고, 결국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게 되었다. 한국적 그림, 작업을 이루기 위한 고민을 진지하게 하기 시작했다.

보통 ‘동양화’, ‘한국적’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한국화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넓게 펼쳐진 종이 위에 먹의 농담으로 자연풍경을 표현한 조선시대 수묵화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작가의 관심에 들어온 한국적 예술은 회화가 아닌 단청이었다. 전통 목조건물에 여러 가지 빛깔로 무늬를 그린 것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불전 건물에 올라간 단청을 연구하면서 작업에 나무를 사용하게 되었다.

나무는 회화의 바탕이 되는 종이를 비롯해 건축, 공예에서도 근본으로 쓰이는 재료다. 작가는 작업하기에 앞서 이 근본이 되는 나무를 모으기 시작했다. 오래된 가구나 문 등을 구해 깎고 다듬어 나무판을 만들었다. 이렇게 매끄럽게 다듬어진 판에 상감법을 응용해 그림을 그리고 파서 색을 채워 넣었다. 채워진 안료는 단청에 선명한 색을 낼 수 있는 재료들을 혼합해 만들어냈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나무판 위에 자개를 붙이기 시작했다. 장안평의 가구 기술자에게 자문하는 방법 등을 통해 나전칠기 기법을 적용했다.

‘달항아리’(2019)는 이렇게 고르게 손질한 나무에 색을 메워서 완성한 작품이다. 정사각형의 화면 속에는 심해와 같은 어둠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안료를 나무에 수차례 입힌 덕인지 깊이 있는 검은색이 구현되었다. 그 위에는 순백색의 크고 둥그스름한 도자기가 달처럼 휘영청 떠오른다. 달항아리다. 단순하면서도 넉넉한 느낌의 달항아리는 깊은 밤의 고요를 비춘다.

달항아리는 조선 후기부터 만들어진 백자 중 하나다. 그것의 다양한 매력 중 하나는 자연스럽게 굽이진 표면을 따라 퍼지는 백색의 빛이다. 이와 관련해 미술사학자 최순우는 다음 같은 문장을 남겼다. “흰빛의 세계와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의 원이 그려 주는 무심한 아름다움을 모르고서 한국 미의 본바탕을 체득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김덕용의 ‘달항아리’에서 이 아름다움은 잔잔한 파도와 같은 나무의 결에 의해 은은하게 지속해 일렁인다.
나무에 혼합재료로 완성한 김덕용의 ‘달항아리’. 멀리서 보면 나뭇결이 도자 빛의 흐름같이 보인다. 이화익갤러리 제공
#정보영, ‘빛’이 있는 풍경

정보영(1973~)은 빛이 들어오는 따스한 장면을 그려 눈길을 끌어온 작가다. 홍익대학교 회화과에서 수학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화익갤러리, 스페이스몸 미술관 등의 개인전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서울시립미술관, 사비나미술관, 화이트블럭 아트센터 등의 단체전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홍익대학교, 중앙대학교, 고려대학교 등에서 강의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대구미술관, 송은문화재단, 금호미술관 등 국내 주요 미술 기관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작가는 일찍이 그리기의 기본요소는 공간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재현 과정을 분석하는 작업을 펼쳤다. 미술사 책에서 보여주는 원근법 소실점을 이용한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등의 명화 공간을 차용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빛을 바라보는 경험에서 흘러가는 것과 사라지는 것, 즉 시간성의 변화를 보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공간에 빛의 변화, 시간의 변화를 맞물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빛에 주목하며 거기에서 비롯해 어둠이 생긴다는 사실도 다시 상기하게 되었다. 빛과 그림자, 실재와 부재를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추는 작업으로 이어냈다. 미술평론가 김복영은 작가의 작품을 “빛을 소재로 시간의 경계를 응시한”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작가는 스페이스몸 미술관 전시에서 작업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되돌아보면 ‘사실성(reality)을 향한 충동’이 그림의 큰 부분을 지배해왔던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빛에 여과된 사실성, 연출된 사실성일 것이다. 텅 빈 공간 혹은 사물에 드리워지는 빛, 시간에 따른 대기 색조의 변화만큼 그리기에 대한 충동을 주는 요소는 없었다. ‘빛을 그린다는 것은 동시에 그림자를, 그림자를 그린다는 것은 동시에 빛을 그린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정물을 빌려, 공간을 빌려 빛을 그려온 지금, 지극히 근본적이고 자명한 이 문구를 떠올리게 된다.”

‘Lighting up’(2015)은 작가가 2015년에 제작한 작품이다. 고요한 오후의 방. 작지 않을 것 같은 방의 한쪽에는 책상과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책상의 오른쪽에 있는 커다란 창으로는 빛이 들어온다. 가리는 커튼도 없이 직사각형 창 모양을 기울어진 형태로 벽으로 끌어낸 빛. 그 각도로 볼 때 황금과 노란색의 경계에 있는 이 빛은 늦은 오후의 빛이다. 해가 지기 전 가장 아름답게 성숙한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빛.

인상 깊은 것은 아직 어두워지기 전인데 책상 위를 밝히는 촛불이다. 작가의 작품에서 사람은 늘 부재 중이다. 대신 텅 빈 공간에 촛불, 의자, 오르골, 유리구슬 등이 존재한다. 이런 오브제들은 빛과 같이 누군가가 머물렀던 흔적의 역할을 한다. 존재를 통해 부재를 드러내고 부재를 통해 존재를 드러낸다. 작가에 의하면 그의 작품에서 켜둔 초는 유한한 시간을 상징한다. 유한하다는 단어는 어쩐지 슬프게 느껴지지만, 초가 타오르는 지금은 만월의 시간이다.

김한들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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