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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짱 낀 냉소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플랫]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입력 2021. 09. 28. 16:22 수정 2021. 09. 28.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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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작품은 시대의 정서를 반영한다. <오징어 게임>도 그렇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이들이 상금 456억원을 놓고 유혈이 낭자한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는 한국 드라마가 24일 기준 전 세계 43개국 넷플릭스에서 최다 시청을 기록했다.

내용은 매우 냉소적이다. 경제적 패자인 참가자들은 단 한 명의 승자만 일확천금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간다. 자본사회의 승자들은 ‘돈이 너무 많아 사는 재미가 없어서’ 게임판을 조장한다. 유사한 설정의 2000년작 일본영화 <배틀로얄>에서 참가 학생들이 무너진 공교육 복원을 위한 희생양으로 강제동원된 것과 비교하면 목적은 더 얄팍하고 허무하다.

<오징어 게임>의 내러티브는 코로나19 이후 커진 경쟁 불안과 양극화에 대한 불만을 시사한다. 넷플릭스 제공

<오징어 게임>의 내러티브는 코로나19 이후 커진 경쟁 불안과 양극화에 대한 불만을 시사한다. 거대한 게임판 속에서 무력하게 파편화된 참가자들에 감정이입하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징후적으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불황 속 대중의 불안심리를 반영하며 쏟아진 ‘좀비’물보다 더 암울하다. 이성은 잃고 식욕만 남은 시체인 좀비는 감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되는 것이라지만, <오징어 게임>의 참가자들은 맨정신으로 손익을 계산하고 불리할 땐 인간성을 내려놓는다. 경쟁체제 속 인간 본성을 파헤치겠다는 이 드라마는 그래서 사실 자본주의에 중독돼 타락한 인간상을 다룬 것에 더 가깝다. 인공조성된 게임시설이나 수백억원대의 경제적 보상 모두 자연스러운 인간사회의 상태가 아니다. 원인과 결과가 뒤바뀌었다.

이처럼 사회 결함을 인간의 뒤틀린 본성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을 비롯해 그간 수두룩했다. 냉소적인 작가들이 그린 가상의 세계들은 우리의 사회 인식에 큰 지분을 차지해왔다. 뉴스도 마찬가지다. 몰인간적이고 극단적인 행태들이 집중적으로 다뤄지며, 더 많은 시청률과 클릭수를 얻는다. 구성원들은 생존을 위협하는 정보에 귀가 더 쫑긋 서는 ‘부정편향’ 때문에 나쁜 소식들에 더 끌리고, 매일같이 이런 뉴스에 노출되면서 ‘가용성 편향’에 빠진다.

<휴먼카인드>로 주목받은 저널리스트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이 같은 내러티브들이 우리 사회에 ‘노시보’(nocebo) 효과를 일으킨다고 말한다. 인간이 악하다는 부정적인 믿음이 이기적인 사회 구성원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확인취재 결과 사람들은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기꺼이 타인을 돕고 협력했다고 전한다. 예로, 1965년 통가의 무인도 ‘아타’에 표류한 여섯 소년은 1년이 넘는 기간 서로를 믿고 협력하면서 물과 식량 부족을 해결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이들은 다툼이 벌어지면 각자 섬의 반대편에서 화를 가라앉힌 뒤 화해했다. 영화 <타이타닉>에는 침몰하는 여객선에서 구명정을 놓고 다투는 군중이 나오지만, 실제 대피는 매우 질서정연했다고 한다.

인간은 전쟁에서조차 살인을 꺼린다고 브레흐만은 연구 결과들을 인용한다. 미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회수된 2만7574정의 머스킷 총은 90%가 장전 상태였고, 2차 대전 참전자의 절반 이상이 사람을 죽이지 않길 택했다.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이나 밀그램의 ‘전기충격 실험’처럼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인간성을 입증하려던 과학실험이 조작된 오류라는 점은 이미 알려진 바다.

세상이 그렇게 끔찍한 곳이라고 치부하는 건 두려움도 비윤리도 쉽게 합리화하며 안심하고 사악해져도 되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제공

그럼에도 앞서 언급한 부정편향 때문에 사람들은 좀처럼 인간의 본성이 사악하다는 의심을 접지 않는다. 게다가 폭력의 상품화가 더 가속화되면서 이 같은 믿음은 스스로 증폭된다. 김평강 상명대 교수는 BBC 인터뷰에서 “폭력적이고 섹슈얼한 장면은 공중파에서 보기 어려웠는데 넷플릭스가 제작 지원을 시작하면서 금기가 사라진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한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폭력적인 유형의 콘텐츠를 시청하면 사람들이 더 공격적으로 변할 수 있다. “어린 시절 폭력적인 이미지에 노출되는 것과 성인기 공격성의 상관관계는 석면과 암, 칼슘 섭취와 골밀도 사이의 상관관계보다 더 밀접하다”고 한다.

<오징어 게임>의 설계자는 최후의 승자에게 “아직도 사람을 믿나? 그 일을 겪고도?”라고 묻는다. 세상이 그렇게 끔찍한 곳이라고 치부하는 건 두려움도 비윤리도 쉽게 합리화하며 안심하고 사악해져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힘을 믿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타인을 돕는 것은 우리 이웃들이 항상 하는 일이다. 팔짱 낀 냉소는 어떤 변화도 만들지 못한다. 당류와 나트륨 과다섭취가 몸에 나쁜 것처럼, 인간에 대한 냉소도 가려서 듣고 보는 게 좋겠다.


최민영 경제부장 min@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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