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kg 가까운 돼지저금통 매다느라, 천장이 찌그러졌다"

김정연 2021. 10. 4.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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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의 미로같은 세트는 강렬한 초록색과 분홍색 사이 파스텔톤을 더해 동화적인 느낌을 의도했다. ‘공포’의 색인 분홍색을 가장 많이 썼다. [사진 넷플릭스]

허공에 걸린 투명한 돼지저금통 안으로 쏟아지는 오만원권 돈다발. 게임 참가자들은 옆 사람이 죽는 참혹함에 몸서리치다가도 홀린 표정을 짓는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의 채경선(42) 미술감독은 “황동혁 감독이 갖고 있던 돼지저금통 이미지에서 출발해, 쏟아지는 돈이 또렷이 보이도록 투명하게 만든 뒤 ‘돈이 전부인 세상’을 암시하며 천장에 올렸다”며 “500㎏ 가까이 되는 저금통을 특수 세트장에 올리는 게 까다로웠고, 천장이 찌그러지기도 했다”고 돌이켰다.

채경선 미술감독

세계적으로 폭발적 반응을 얻고 있는 ‘오징어게임’은 세트와 소품으로도 관객의 눈을 사로잡았다. “세트장 가면 사진 찍기 바쁠 정도”(이정재), “세트장에 들어가는 순간, 판타지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정호연) 등 배우들이 나서 극찬했다. 이를 만든 채경선 미술감독은 “다음에 어떤 게임을 할지 모르는 궁금증을 자아내려 매번 배우들에게도 세트를 비공개로 유지했다”며 “첫 세트 촬영이었던 숙소 씬에서, 456명 배우가 들어올 때마다 탄성을 내뱉는 걸 보면서 뒤에서 입꼬리가 막 올라갔다”고 했다.

그가 만든 세트는 살벌한 게임 전개와 대비되는 동화적인 분위기, 70~80년대 한국의 정서에서 비롯된 디테일이 두드러진다. 의미도 뚜렷하다. 가면을 쓰고 분홍색 옷을 입은 게임 진행자들, 초록색 체육복을 입은 참가자들 사이는 파스텔톤 공간으로 메웠다. 채 감독은 “참가자들에게는 ‘핑크’가 억압과 공포의 컬러라 미로 같은 공간에도 ‘핑크’를 가장 많이 썼다. 이후 노랑색, 하늘색, 민트색으로 동화적 색감을 더했다”며 “미로가 워낙 복잡해 어디에 무슨 색을 칠했는지 헷갈리는 바람에 몇 번이고 다시 작업한 적도 있다”고 전했다.

‘돈이 전부인 세상’을 암시하기 위해 돈다발이 떨어지는 투명 돼지저금통을 세트 천장 높이 매달았다. [사진 넷플릭스]

반면 ‘구슬치기’ 게임 전 파트너를 정하는 대기공간은 흰색. “천국 같은 느낌을 내면서, 다음 게임 준비 과정에 ‘아무 정보도 주지 않을 거야’라는 의도를 담았다”며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은 채우려는 욕심이 있어 화이트만 쓰는 걸 처음엔 반신반의했는데, 용기 내 선택하길 잘했다”고 전했다.

게임 탈락자, 즉 사망자를 실어나르는 관은 아예 분홍색 리본을 단 선물상자처럼 꾸몄다. 채 감독은 “처음엔 단순한 나무 관으로 시작했는데, 뭔가 밋밋했다”며 “게임을 설계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게임에 참가하고 죽는 것까지도 ‘다 너희에게 주는 선물이야’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고안했다”고 설명했다. 지하동굴 같은 화장장은 개미굴에서 따왔다. 황동혁 감독이 개미 집단에서 ‘가면 인간’들의 계급사회를 떠올린 것의 연장이다.

가면에 그려진 문양이자 오징어게임의 상징이 된 ‘○△□’ 도형은 채 감독과 황 감독이 논의해 정했다. 채 감독은 “동그라미는 꼭짓점이 0개, 세모는 꼭짓점 3개, 네모는 꼭짓점 4개로 각각 권력을 나타내는 도형으로 표현하자는 건 황 감독님의 아이디어”라고 했다.

첫 번째 게임 속 등장하는 거대인형은 교과서에 많이 등장하는 ‘철수와 영희’ 캐릭터에서 따왔다. [사진 넷플릭스]

채 감독은 “국내에서 쓸 수 있는 가장 큰 세트장 3~4곳을 장기간 빌려 촬영했다”며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며 웃었다. 과거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철수와 영희’에서 따온 커다란 ‘영희’인형, 미끄럼틀과 지구본 등을 거대한 공간에 배치해 70~80년대 학교 운동장 느낌을 냈다. 1화 마지막에 하늘 뚜껑이 닫히며 세트가 변하는 것에 대해선 “참가자들이 ‘게임을 하러 온 거지, 죽으러 온 게 아닌데?’ 하며 현실인지 진짜인지 헷갈리는 와중에 ‘우리만의 세상으로 온 거야’라는 공포심을 주는 장치”라고 설명했다.

80년대를 재현한 구슬치기 세트장은 황동혁 감독이 살았던 서울 쌍문동을 많이 참고했다. 채 감독은 “우유배달 주머니, 현관 등, 연탄재까지 재현했다. 타일, 문, 창살 등을 직접 제작하는 데만 두 달이 걸렸다”며 “잘 보면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없다. ‘문’밖에 없는 연극적인 공간”이라고 전했다.

시리즈의 첫인상을 결정한 숙소 세트는 ‘버려진 사람들이 어디로 갈까?’라는 생각을 하던 중 떠오른 터널에 기초했다. 여기에 대형 마트에서 층층이 물건을 쌓아놓은 것처럼, 침대를 쌓아 끝없이 올라가야 하는 욕망사회·경쟁사회를 표현했다. 시청자들이 찾아낸 ‘벽 속에 숨겨져 있던 전체 게임’ 그림은 “터널 안 안내표지처럼, 장식이나 픽토그램을 그리려고 하다가 게임을 그려 넣은 것”이라며 “골목길 세트 문패를 비롯한 곳곳에 ‘○△□’를 숨겨뒀다”고 했다.

채 감독은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공간 설명이 없었다”며 “저에겐 ‘삶과 죽음을 오가는 어른들의 게임, 이걸 어떻게 펼칠 거야?’하는 질문 같은 시나리오였다”고 전했다. 이후 일러스트, 판화, 현대미술, 건축 등 장르를 섭렵하며 새로운 공간을 그려봤다고 했다.

대학에서 무대미술을 전공한 그는 2010년 ‘조금만 더 가까이’로 상업영화 작업을 시작했다. 2011년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 2015년 ‘상의원’으로 대종상 미술상을 받았다. 황 감독과는 ‘도가니’(2011) ‘수상한 그녀’(2013) ‘남한산성’(2018) 등을 함께했다. “부모님이 영화를 너무 좋아해 영화미술을 하게 됐다”는 그는 “쏟아지는 관심은 뜻밖이고 행운이다. 새 장르의 작품을 늘 새롭게 하고 싶다”고 했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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