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도 없고 빽도 없고..할 수 있는 건 '모여서 외치는 것'뿐이었다 [감염병 시대, 집회의 미래]

오경민·민서영·이홍근·조문희 기자 2021. 10. 13.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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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코로나19 확산 이후 거리로 나와 ‘1인 시위’를 한 사람들. 왼쪽부터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 우다야 라이 이주노조 위원장, 박경득 민주노총 의료연대본부 서울지부장, 김계월 아시아나KO지부장, 유제순 LG트윈타워 해고 청소노동자, 자영업자 공신씨. 이석우·김영민·김기남·한수빈 기자

프롤로그

방역과 집회의 자유, 공생할 순 없나요

코로나19 확산 이후 ‘집회의 자유’도 멈춰섰다. 집회에 대한 경찰의 금지 통고가 이어졌다. 농성장은 철거당하고 분향소 설치는 가로막혔다. 집회는 방역 지침과 본질적으로 상충한다. 집회는 모여서 한목소리를 내는 것인데, 감염병 확산 방지를 위한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는 한마디로 ‘모이지 말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에 따르면 “집회의 자유는 타인과 함께하고자 하는 자유, 타인과의 의견 교환을 통해 공동으로 인격을 발현하는 자유를 보장하는 기본권”이고 “사회·정치 현상에 대한 불만과 비판을 공개적으로 표출케 함으로써 정치적 불만이 있는 자를 사회에 통합하고 정치적 안정에 기여하고, 소수집단에 그들의 권익과 주장을 옹호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소수의견을 국정에 반영하는 창구”이다.

헌재의 교과서적 규정대로 집회의 자유가 민주사회의 기본적 권리라면 그 제한 역시 필요한 최소한에 그치는 게 옳다. 집회의 자유를 가급적 보장하면서 방역과 조화를 꾀해야 한다.

지난 1년10개월의 현실이 보여주는 것은 정반대다. 당국이 취한 가장 손쉬운 방역 조치가 집회 제한·금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도가 해변의 연약한 부위를 먼저 침식하듯 코로나19는 집회의 자유부터 침식했다.

실상 한국 사회에서 집회의 자유는 여전히 대다수 사람에게 ‘나와는 먼’ 낯선 기본권이다. 소음을 유발해 시끄럽고, 차량의 순조로운 통행을 막아 불편을 주는 행위로 인식된다. 랑희 ‘인권운동공간 활’ 활동가는 12일 “집회를 기본권으로 대접해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행위라는 이미지와 인식이 정부와 언론 등을 통해 유포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반문했다. “집회할 자유가 신체의 자유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면 코로나19 시대에 집회를 가장 먼저 제거할 수 있었을까요?”

경향신문은 코로나19가 유행한 지난해 1월부터 빠르게, 강하게 위축된 집회의 현실을 들여다봤다. 경향신문과 만난 사람들 중에는 역설적으로 코로나19 때문에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들도 있다. 누구든 소수자가 될 수 있는 사회에서 이번에 그들 차례가 됐을 뿐이다.

방역전문가들은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는 모든 면에서 다를 거라고 말한다. 감염병이 일상이 되는 시대에 집회는 어떻게 매김 돼야 하며, 방역과 집회의 자유는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집회의 현주소를 짚고 가능한 대안을 그려봤다.

홈리스행동 노숙인 활동가.

①우리가 거리로 나온 이유

시작부터 집회하고 싶은 사람 없어
목소리 아무도 들어주지 않기 때문
혼자 아닌 ‘우리’일 때 사회서 반영

“저는 부끄럽지만 집회에 참여해본 적 없습니다.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일요일에 교회를 다니는데, 일요일에 시위를 많이 하잖아요. 길이 밀리니까 짜증이 났어요. 촛불집회 때도 나 먹고살기 바빠서, 주말에 일하다 보니까 생업상 참석 못한 것도 있죠.”

서울에서 카페와 호프집을 운영하는 공신씨(39)는 지난 1월 처음으로 거리에 나섰다. 세월호 참사 때도, 국정농단 사태 때도 집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영업시간 제한이 이어져 호프집 매출이 5분의 1로 줄자 ‘더 이상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집회에 한 번도 참여한 적 없는 자영업자 3명이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 모였다. 코로나19 대응 전국자영업자비상대책위원회의 시작이었다. 이후 네이버 밴드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모인 자영업자 모임은 10명, 20명, 1000여명 규모까지 커졌다.

“집회, 단 한 번도 안 나갔어요. 저는 보수 성향이다 보니 민주노총도 정말 싫어했고요. 저것들은 쌈닭인지 맨날 나라 어지럽게만 하고 돌아다니고… 1년에 한 번씩 데모하고 그러잖아요. 그럴 때마다 제가 가슴을 쳤어요. 잔잔한 물에 돌을 왜 자꾸 던지지? 시대가 어느 땐데 떼로 몰려다니면서 혼란스럽게 일을 만들지? 이렇게 생각했어요. 박근혜 대통령 탄핵정국 때도 마찬가지예요. 광화문에 촛불집회 하러 나가는 것 정말 보기도 싫었어요. 그때 동료 청소노동자 80명이 촛불을 들러 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말했죠. 미쳤다고, 집에 가서 잠이나 자지 거길 왜 가냐고요.”

집회라면 꼴도 보기 싫었다던 청소노동자 유제순씨(64)는 지난해 중순부터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피켓시위에 참여하고, 사측으로부터 계약해지 통보를 받은 뒤 지난해 12월16일부터는 동료들과 함께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에서 해고 철회 농성을 시작했다. 그는 ‘노동기본권 쟁취! 비정규직 철폐!’라고 써진 빨간 조끼를 입고 청소하던 빌딩 로비에서 먹고 잤다.

처음부터 집회를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9년 이상 현장에서 집회를 꾸려온 박경득 민주노총 의료연대본부 서울지부장은 “막아서는 사람들과 대치하고, 무관심한 사람들을 향해 호소하고… 집회라는 게 즐겁고 마음 편한 일이 아니다”라며 “편한 게 좋지 누가 집회를 하고 싶어 하겠나”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도 집회라는 방법을 사용하기 전에 협상테이블이 만들어지고, 사용자 측이나 정부와 협상할 수 있으면 좋겠다”며 “해보니까 알겠더라. 힘들고 서럽더라도 우리가 집회에 나가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했다.

돈도 ‘빽’도 없어서 모였다

문을 안 두드려본 곳이 없었다. 아시아나KO 노동자들은 지방노동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를 거쳐 법원에서까지 부당해고를 인정받았지만 복직을 하지 못하자 집회를 시작했다. 김계월 아시아나KO 지부장(58)은 “청와대든 국회든 어디라도 가서 말해야 했다. 돈도 없고 ‘빽’도 없으니 ‘모이는 것’만이 우리가 행사할 수 있는 위력이었다”고 했다.

경향신문이 만난 이들은 청와대 국민청원, 언론 제보, 교섭 시도, 민원, 소송, 진정 등 다른 수단을 통해 요구하는 바를 얻지 못해 거리로 나섰다. 남은 카드는 ‘모여서 외치는 것’뿐이었다. 인맥도 돈도 필요 없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다. 벽에 부딪힌 이들이 자신의 요구를 사회와 자신이 원하는 곳에 전달할 마지막 소통 창구가 바로 집회이다.

유제순씨도 1인 시위를 했을 때는 회사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유씨는 로비 점거 농성에 앞서 반년간 이어진 1인 피켓시위를 두고 “무의미했다. 하나 마나였다”며 “점심도 못 먹고 피켓 들고 한 명씩 서 있는데 사측은 신경도 안 쓰고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식으로 구경만 했다”고 했다.

결론은 집회였다.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은 “좀 더 배워서 더 좋은 방법으로 해야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게 아니다”라며 “다른 방법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가능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답답함을 안고 집회 현장에 나온 이들은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오감으로 확인했다. 가능성을 봤다. 같은 구호를 외치며 동료들과 강력하게 연결됐다. 참여자들의 요구를 보고 듣는 이들이 생겼고, 언론과 국회 등으로 목소리가 전달되기 시작했다. 공씨는 “차량집회가 처음 뉴스에 나올 때 정말 감동이었다”며 “일상에서 매일 ‘힘들다’고 푸념하는 것과 단체행동은 확실히 달랐다”고 했다.

이형숙 회장은 얼떨결에 참여한 집회에서 변화를 향한 절박함과 연대감을 실감했다고 했다. 이 회장은 “휠체어 30~40대가 차들을 막고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외치는데 너무 놀랐다”며 “혼자라면 가능하지 않을 텐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니까 가능하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전까지 휠체어가 없었던 이 회장은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전동휠체어를 구입했다.

현장에서 마주한 ‘과잉 제재’

현장선 경찰 차벽에 경고 방송까지
코로나 유행 이후 제지 더 심해져
일반 직원 모이면 아무 말 안 하다
노조원 조끼 입으면 “흩어지세요”
형평성 없는 조치에 속만 부글부글

집회 참여자들은 현장에서 방패를 든 경찰, 차벽, 경고방송을 마주한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집회는 신고 자체가 어려워졌고, 경찰의 제재는 더욱 강해졌다. 농성장을 강제 철거하는 일도 왕왕 발생했다. 사망한 이들을 위한 분향소 설치까지도 경찰 통제를 받았다.

기자회견이나 집회 현장에서는 감염병예방법·집시법·도로교통법 위반이라며 해산하라는 방송과 함께 채증 등이 이뤄졌다. 빈곤단체 집회와 기자회견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홈리스야학 학생회장 로즈마리(활동명)는 “경찰들이 차로 가로막고 ‘무슨 법 위반이다, 벌금을 내야 한다’ 확성기를 통해 말하는데 아무래도 불안감이 생긴다”며 “확실히 코로나19 확산 이후로 제지가 심해졌다고 느낀다”고 했다.

‘코로나 1호 정리해고’로 불리는 아시아나KO 노동자들의 농성장도 지난해 5월과 6월에 걸쳐 세 차례 강제 철거를 당했다. 종로구는 아시아나KO 농성장이 있던 금호아시아나 본사 건물 앞을 포함해 종로 1~6가 주변 도로 및 인도, 종로구청 청사 앞 등 관내 주요 지역에서 집회·시위를 전면 금지했다. 농성장 천막에는 ‘감염병예방법에 따라 철거하겠다’는 계고장이 붙었다.

자영업자비대위는 사망한 자영업자들을 위해 지난달 16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 1인이 운영하는 합동분향소를 마련하려다 7시간 동안 경찰과 대치했다. 경찰은 천막 등을 실은 배송차량을 가로막고 분향소 설치를 차단했다. 경찰은 “1인 분향소라 할지라도 현장에는 다수가 모일 수 있다”며 “특히 국회 앞은 영등포구청이 집회·시위 금지 구역으로 고시한 바 있다”고 제지 이유를 밝혔다. 각 지자체는 거리 두기 단계가 상향되자 청와대 앞, 국회 앞, 각종 광장과 공관 인근 등을 도심 내 집회 제한 구역으로 고시했다. ‘억울한 사람들’이 가장 자주 찾는 청와대와 국회 앞부터 집회가 금지됐다.

집회에 참여한 이들은 방역 조치의 화살이 집회에만 향하고 있다며 형평성에 의문을 표했다.

김계월 지부장은 “(농성을 하는 동안) 감염병예방법을 위반하고 모여서 발언했다는 이유로 경찰 조사를 세 차례 정도 받았다”면서 “(현재 노숙 농성을 하고 있는) 서울고용노동청 뒤쪽에만 가봐도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몇십 명씩 모여 마스크를 내리고 얘기를 한다. 이 사람들은 안 잡아가면서 왜 마스크를 쓰고 거리 두기를 하며 몇 명이 피켓만 들고 서 있는데도 제재를 하는지 속이 터진다”고 했다.

박경득 지부장도 “집회나 기자회견을 하면 두 사람만 모여도 해산하라고 한다. 병원 직원들이 모여 있는 건 제재를 하지 않다가 노동조합 조끼를 입고 모이면 ‘흩어지세요’라고 했다”면서 “청와대 행진 때도 마찬가지였다. (노동조합 유니폼) 조끼를 입지 않으면 여러 명씩 같이 걸어도 되지만 조끼만 입으면 1명씩 걸어가야 했다. 농성장에 있으면 감염되고, 조끼 입으면 감염되는 것도 아닌데 비과학적인 조치”라고 했다.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이어가고 있는 우다야 라이 이주노조 위원장은 “관광객은 100명이 지나가도 아무도 검문하지 않는데 우리는 2명만 모여도 경찰이 와서 안 된다고 한다”며 “누가 오느냐에 따라 대응이 다른 게 탄압”이라고 했다.

심지어 감염 가능성이 차단된 ‘차량 1인 시위’까지 제지 대상이 됐다. 공씨는 “차량에 각자 타고 행진하는 안전하고 평화적인 시위를 했는데 경찰이 검문을 해서 너무 놀랐다”며 “답답해서 나온 건데 말할 기회조차 뺏겼다. 형평성도 없고 부당하다”고 했다.

방역수칙은 집회가 못마땅한 이들의 무기가 되기도 했다. 오연춘 민주노총 조직국장은 “회사 앞에서 천막농성을 하고 있는 노동자를 회사가 CC(폐쇄회로)TV로 보고 있다가 누군가 한 명이라도 지지 방문을 오면 바로 경찰에 신고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집회 참여자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방역에 힘썼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LG트윈타워 해고 청소노동자들은 30여명의 인원이 136일간 한 공간에서 먹고 자고 생활했는데도 확진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아침마다 열을 재고, 연대하러 온 사람들에게도 철저히 방역수칙을 지키도록 안내한 결과다.

서울시 공공병원에 인력이 부족하다고 외쳐온 박경득 지부장 역시 “공공의료 노동자로서 방역 상황을 위험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며 “마스크를 쓰고 거리 두기를 준수하면서 집회를 했다”고 말했다.

김계월 지부장은 “결국 죽고 싶지 않아서 (집회를) 하는 거니까 방역수칙 다 지키면서 한다”며 “생명도, 생존도 지키면서 이중으로 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왜’ 우리가 나왔는지 생각해줬으면”

이제는 집회 열면 ‘방역의 적’ 간주
감염병예방법 위반 출석만 수차례
그럼에도 살기 위해 다시 거리로
집회에 너무 부정적인 시선보다
왜 나왔을까 한번 생각해 주셨으면

감염병 시대, 집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더 곱지 않아졌다. 지난해 광복절에 보수 성향 단체들이 서울 광화문에서 대규모 집회를 연 이후 집회는 ‘방역의 적’으로 간주됐다. 활동가들은 위축됐다. 이형숙 회장은 “장애인 관련 예산이 수립되고 각 정부 부처와 지자체에서 집행되고 있어 계속해서 우리 목소리를 내야 하는 상황인데 (코로나19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있다”며 “저만 해도 감염병예방법 위반으로 출석 요구를 7~8차례 받았기 때문에 위축되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비난 속에서도 집회를 하는 이들은 여전히 있다. 코로나19 확산 때문에 집회가 ‘남의 일’이 아니게 된 공신씨는 “사실 예전에는 장애인이나 해고노동자들이 집회하거나 농성하는 걸 봐도 관심이 없었다”며 “미안한 감도 있다. 이제는 지나가면서 ‘저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나’ 한 번쯤은 볼 것 같다. 우리가 겪어 봤으니까”라고 말했다.

유제순씨는 집회 참여자들이 외치는 메시지에 한 번쯤 관심을 가져주기를 당부했다. 유씨는 “민주노총 집회 뒤에 인터넷 게시판 등에 들어가 보면 부정적인 의견이 대부분이다. 제가 처음에는 그분들보다 더 안 좋게 봤기 때문에 안다. 몸소 겪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다는 걸”이라며 “그래도 한 번쯤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다. 왜 우리가 길바닥에 나와서 행진을 할까, 하고”라고 말했다.

오경민·민서영·이홍근·조문희 기자 5k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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