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의 아침] 독립운동가 인터넷 검색 압도적 1위는? '이토' 격살한 안중근 의사

지창환 2021. 10. 13.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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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인터넷 검색 압도적 1위는? '이토' 격살한 안중근 의사
-안중근과 김구의 만남..안중근 父, 농민군 김구 살려주고 집에 숨겨
-1909년 3월 동지 12명과 '단지동맹' 맺고 침략의 원흉 '이토' 격살
[KBS 광주]

■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10월 13일(수)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지창환 앵커(전 보도국장)
■ 출연 : 노성태 원장(남도역사연구원)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박나영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youtu.be/BIlVY1kxMQ0

◇ 지창환 앵커 (이하 지창환): 남도역사와 우리역사를 재미있게 들어보는 시간이죠. 스토리로 듣는 남도 역사,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세요?

◇ 지창환: 오늘 이야기는 예고해 주신 대로 안중근 의사.

◆ 노성태: 네, 안중근 의사입니다. 우리 국민의 가장 사랑을 받는 독립운동가이고요. 인터넷 독립운동가 검색어 압도적 1위가 이토를 격살한 안중근인데요. 안중근 의사의 의거 날이 1909년 10월 26일입니다. 그래서 10월을 맞이해서 안중근 의사가 어떤 분인지, 의거는 아는데 의사가 어떤 분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 지창환: 저도 집에 조정래 선생이 쓴 인물이야기라는 책 있는데, 거기에 안중근 의사 이야기가 있는데 애가 자주 읽더라고요.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독립운동가 아닙니까? 이분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그리고 하얼빈 의거 전에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잘 알지 못하잖아요. 먼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요.

◆ 노성태: 1879년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납니다. 아버지가 안태훈이고 어머니가 조 씨인데, 조 씨는 유명하지요. 안중근 의사에게 당당하게 죽어라, 라고 편지를 썼던 조마리아 여사인 것입니다.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고요. 그리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정근, 공근 두 동생이 있었지요.

◇지창환: 안중근 의사는 어린시절부터 남달랐다면서요?

◆ 노성태: 배에 점 7개가 있었다고 그러니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 그래서 어릴 때 이름을 응칠이라고 불렀고요. 1884년에 갑신정변이 일어나잖아요. 이때 갑신정변 편에 섰던 아버지가 개화당이 역적으로 몰리자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이라고 하는 산골짜기로 피신을 합니다.

◇ 지창환: 아버지가 피신을 와서 그쪽에서 태어났군요.

◆ 노성태: 네.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공부를 했는데 김구 선생 백범일지에 보면 그것이 나오거든요. 공부보다는 말 타기와 활쏘기를 즐겼다. 그리고 집안에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서 어린 나이에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그래서 이토를 세 발 다 명중시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지창환: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나온다. 어렸을 때 안중근 의사와 김구 선생은 인연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김구도 해주 출신이거든요. 그런데 김구 선생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일어났을 때 해주의 농민군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해주 감사가 안중근 아버지에게 농민군 진압을 요구했고 그래서 안중근 아버지가 산포군을 조직해서 농민군을 진압하면서 박석골전투 등에서 농민군들을 진압하게 되는데요. 산포군이라고 지도자였던 것이지요. 이때 김구 선생이 19살이었고 안중근보다 3살 위였는데 차마 소년 장수였던 김구를 죽이지 못하고 안태훈, 아버지가 숨겨주었고 나중에 안중근 집에 기거하면서 고능선이라고 하는 스승을 만나게도 해줍니다. 아무튼 19살 김구 선생, 그리고 16살 안중근이 그때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 지창환: 안중근 의사 아버지가 차마 김구 선생을 죽이지 못해서 이후에 우리가 오늘의 김구 선생을 알게 된 거구요. 또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네요.

◆ 노성태: 네. 거기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 지창환: 안중근 의사 처음부터 의병장이 되고 독립군 대장이 되고 그러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 노성태: 처음에는 애국계몽 운동가였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해결책을 강구하기 위해서 상하이로 건너갔는데 거기에서 곽 신부라고, 안중근 의사는 원래 천주교 신자거든요. 세례명이 토마스였고. 그래서 고향에서 안면이 있었던 곽 신부라고, 르 각이라는 신부인데 프랑스 신부를 만나서 애국계몽 운동에 대한 신념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1906년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귀국했던 그가, 아까 황해도 해주에서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를 했고 여기에서 시작한 것이 교육 사업입니다. 그래서 진남포에 삼흥학교를 설립했고 그리고 이어서 천주교 계열의 학교였던 돈의학교까지 인수를 하게 됩니다. 1907년에는 아마 들어보셨을 것이에요.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을 때 안중근 의사는 관서지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니까 교육과 국채보상운동 등 애국계몽 운동을 펼쳤던 것이지요.

◇ 지창환: 그러면 안중근 의사가 언제 연해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했나요?

◆ 노성태: 1907년 아버지 친구 김진사가 찾아와서 지금이 엄청나게 긴박한 시국인데 촌구석에서 교육 사업에 전념하는 것은 허망한 일이니 100만 조선인이 살고 있는 연해주나 간도로 넘어가서 현실적인 투쟁을 해야 된다고 안중근을 설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1907년 안중근은 주저 없이 두만강을 건넜고 그리고 지금 중국 훈춘시입니다만 북간도 권하천으로 건너가서 의병 항쟁을 해야 되겠다 결심을 굳혔고. 그리고 찾아간 곳이 지금 연해주땅 러시아 지명으로는 크라스키노인데요. 연추를 찾아 들어갑니다. 여기에서 최재형, 이범윤 등과 함께 의병부대 동의회를 조직했고, 그리고 그 의병 부대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서 몇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했지만 마지막 전투에서 크게 패하게 되는 것이지요.

◇ 지창환: 국내 진공작전까지 했는데 실패로 돌아갔고, 그래서 단지동맹이라는 것 있잖아요. 단지동맹 그때 나오나요?

◆ 노성태: 1908년에 국내 진공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1909년 3월 5일에 12명의 동지가 약지를 잘라서 단지하고 맹세한 후에 결성한 것이 단지동맹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자서전을 남겼는데 이 부분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전후에 전혀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였으니 남의 비웃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요. 뿐만 아니라 만일 특별한 단체가 없으면 어떤 일이든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운 것인 즉 오늘 우리는 손가락을 끊고 맹세를 지어 증거를 보인 다음에 마음과 몸을 하나로 묶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기어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어떻소.’ 하니까 12명이 그렇게 합시다, 해서 왼손 약지를 끊어서 나온 피로 태극기 앞에 글자 네 자를 쓰잖아요. 대한독립. 그래서 장엄한 당시 분위기가 지금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 지창환: 이렇게 결의를 다지고 단지동맹 결성하고 난 다음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하는 것이군요.

◆ 노성태: 그해 10월이지요. 단지동맹을 맺으면서 안중근이 이렇게 맹세를 했다고 합니다. 침략의 원흉 이토를 암살하기로 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겠다. 그러니까 이토 격살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9월에 블라디보스톡에서 한인들이 발행했던 신문이 대동공보인데 신문을 보니까 이토가 북만주 시찰을 명목으로 러시아 재무대신인 코코프체프와 회견하기 위해서 하얼빈에 온다고 하는 정보를 입수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안중근 의사가 즉각 행동을 개시하잖아요. 1909년 10월 21일, 블라디스톡에서 기차를 타고 22일 저녁 도착한 곳이 하얼빈이고, 그리고 22일 저녁에 도착했는데 26일 9시 30분, 이토가 코코프체프와 열차에서 회담을 마치고 내려와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기 위해서 군중 속으로 돌아오는 순간에 이토를 향해서 세 발을 명중을 시킵니다. 그리고 그때 대한만세를 외치고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가 됐지요.

◇ 지창환: 체포가 된 뒤에 감옥으로 옮겨졌고 재판 받으면서도 당당했다면서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러시아 관헌의 조사를 받고 일본 측에 넘겨진 뒤에 하얼빈에서 뤼순감옥으로 옮겨집니다. 뤼순감옥 옆에 관동 도독부 지방법원이 있는데 여기에서 재판을 받는 동안에 당당했지요. “나는 조선 참모 중장 자격으로 전쟁을 했고 참모 중장 자격으로 이토를 죽였으니 이 법정에서 취조 받을 의무가 없다. 전쟁 포로로 취급해 달라.” 그러니까 일제의 범죄자가 아니라 전쟁 포로로 취급해달라고 요구를 했고 그다음에 법정에서 일본 검찰이 지금 이토를 죽인 이유가 무엇이냐, 라고 하니까 명성황후를 살해한 죄,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동양 평화를 파괴한 죄 등 15가지 격살의 이유를 설명하면서 의거의 정당성을 당당하게 밝혔던 분이시지요.

◇ 지창환: 이토를 격살하기 위해서 준비를 많이 했군요. 의거의 이유까지.

◆ 노성태: 보통 분이 아니셨지요.

◇ 지창환: 15가지 이유 때문에 격살을 했다. 당연히 일제는 인정하지 않았을 것 같고요.

◆ 노성태: 그래서 사형을 선고한 것이지요. 그런데 사형 선고는 이미 짜놓은 각본이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공판이 열리기도 전에 안중근을 극형에 처해야 된다고 뤼순감옥에 전보를 쳤던 상태였으니까 재판하기 전부터 사형은 짜놓은 각본이었다고 생각이 되고요. 1910년 2월 14일에 사형이 선고되었고 3월 26일에 형이 집행됐는데 이것이 또 가슴이 아프지요. 10시에 집행했던 이유가 이토가 안 의사 총을 맞고 숨진 시간과 똑같습니다. 일종의 보복이었던 셈입니다.

◇ 지창환: 원장님은 그동안 선생님들 모시고 만주, 연해주로 현장 연수 많이 갔었잖아요. 안중근 의사의 흔적도 많이 찾아봤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흔적이 있나요?

◆ 노성태: 러시아 땅이 연해주에 있잖아요. 블라디보스톡이 있는. 연해주 연추 지역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러시아 말로 크라스키노인데 여기에서 단지동맹을 맺었던 현장이에요. 그래서 2001년도에 건립된 단지동맹비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토를 격살했던 현장이 하얼빈역이잖아요. 여기는 안중근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습니다. 입구에 동상이 있고 위에 시계가 9시 30분에 멈춰져 있는데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의거 시간인 것이지요. 그리고 바로 옆이 의거지인데 거기 바닥에 보면 총을 쐈던 현장은 삼각형. 그리고 이토의 피살지는 원형으로 표시가 돼서 확인할 수 있고요. 그리고 뤼순감옥으로 옮겨졌잖아요. 144일 밤을 지냈던 뤼순감옥에는 안중근 의사 감방이 복원되어 있고 그리고 재판을 받았던 사형 선고를 받았던 관동법원은 지금 안 의사를 기리는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 지창환: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노성태: 감사합니다.

◇ 지창환: 지금까지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지창환 기자 (2su3sa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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