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다 계획이 있었나..석탄 급한 中 이용한 '일타삼피' [뉴스원샷]

유지혜 2021. 10. 1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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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월 8차 노동당대회에서 사업총화보고를 했다. 연합뉴스


유지혜 외교안보팀장의 픽 : 北 ‘비본질적 인도적 지원’ 신종수법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올 1월 8차 노동당 대회에서 “남조선당국은 방역 협력, 인도주의적 협력 등 비본질적인 문제들을 꺼내 들고 북남관계 개선에 관심이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며 한국을 비난했다.

코로나19로 인해 국경 봉쇄 등 과격한 방역조치를 취해 북한 경제를 떠받치던 북ㆍ중 간 교역도 막힌 게 2년째. 국가 지도자가 이런 말을 할 때는 정말 어렵지 않거나, 어렵지만 다른 이유 때문에 외부 지원은 받을 수 없거나 둘 중에 하나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달 29일

북한 스스로 수십만이 사망한 ‘고난의 행군’까지 언급한 걸 보면 전자는 아니다. 후자라면 참 나쁜 지도자다. 민생, 즉 국민의 인도적 필요보다 정치적 필요를 더 우선순위에 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든 인도적 지원을 해줄 수 있다는 한국과 미국의 손짓을 ‘비본질적’이라고 깎아내린북한이 사실은 쌀 등 구호 품목을 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쓰고 있다. 최근 공개된 유엔 대북 제재위원회의 전문가 패널 보고서에서 드러난 사실이다.

결론부터 요약하자면 북한은 다 계획이 있었다. ▶석탄 불법 수출 ▶인도적 품목 확보 ▶공공연한 제재 회피라는 ‘일타삼피’다. 북한에서 석탄을 싣고 출발해→중국 해역에서 이를 불법 환적하고→빈 배로 중국 항구에 입항한 뒤→다시 출항할 때는 인도적 물품을 싣고 북한으로 돌아오는 신종 수법이다.

석탄을 불법 수출한 뒤 인도적 물품으로 추정되는 화물을 실고 북한으로 돌아간 고산호의 동선. 안보리 대북 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 보고서.

패널이 추적해온 북한 선박 ‘고산’호를 예로 들어보자. 고산호는 지난해 5월 29일 북한 청진항에서 출항했다. 6월 3일에는 제주도 인근에서 선박자동식별장치(AIS) 신호를 꺼버렸다. 이어 6월 7일 중국 저장성닝보(寧波) 저우산(舟山)항 인근 해역에 도착해 닻을 내렸고, 6월 18일 북한산 석탄을 하역한 것으로 한 회원국은 보고했다. 선박 간에 석탄을 불법 환적한 것으로 의심된다.
고산호는 이후 중국 다롄항으로 이동해 7월 1일쯤 인도적 물품을 선적하고 다시 북한으로 향했다. AIS 신호는 고산호가다롄항으로 향하던 6월 28일에야 다시 켜졌다.

고산호는 올해에도 포착됐는데, 4월 무렵 북한산 석탄을 실은 채 또 닝보 저우산항 인근 해역에 머물고 있었다. 이런 식의 행태가 올해도 계속 이어지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중국 해역에서 석탄을 환적한 것으로 의심되는 고산호. 왼쪽 그림에서 빨갛게 표시된 배들은 중국 선박이다. 안보리 대북 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 보고서.

실제 보고서는 회원국의 위성 사진과 패널 분석을 근거로 이 밖에도 ‘태성 8’, ‘민해’, ‘태평2’ 등 다수의 북한 선박이 최근까지도 비슷한 방법으로 중국 해역에서 북한산 석탄을 불법 하역한 뒤 중국 항구로 가 인도적 물품을 싣고 북한으로 돌아오는 양상을 반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수법은 유엔 안보리 결의가 제재 위반 행위에 연루되지 않은 선박이라면 인도적 물품을 북한으로 실어나르는 것은 금지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석탄 불법 환적까지만 성공하면, 이후 텅 빈 배가 중국으로 가 인도적 물품을 싣고 오는 것은 제재로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 선박들이 이때부터 당당하게 AIS를 켜고 운항하는 이유다.

실제 중국 측은 패널의 관련 질의에 “해당 선박들은 비어 있는 상태로 입항해 비료, 살충제, 쌀 등을 선적하고 출항했다. 중국 당국은 해당 선박들이 중국 해역에서 북한산 석탄을 밀수했다고 확인하지 못했으며, 빈 채로 들어와 인도적 물품을 선적한 뒤 출항하는 것을 막을 이유는 없다”고 답했다.

보고서 내용이 사실이라면 북한산 석탄을 사고파는 현장만 적발되지 않는 이상 북한과 중국의 ‘완전범죄’가 성립하는 셈이다.

중국 해역에 모여든 태성8호와 다른 북한 선박들. 석탄 환적이 이뤄지는 현장으로 의심된다. 안보리 대북 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 보고서.

태성 8호의 경우에는 올봄에만 두 차례에 걸쳐 석탄을 선적한 채 중국 해역에 머무는 모습이 위성사진에 포착됐다. 다른 북한 및 북한 관련 선박들도 근처에 모여 있었다. 불법 석탄 환적이 의심되는 현장이었다. 그런데 이때 태성 8호를 비롯한 북한 선박 8척이 모여있는 해역을 중국 해양경비대 순찰함이 바로 옆에서 통과한 것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중국 측으로부터 불법행위를 적발했다는 보고는 없었다.

이는 중국이 코로나19 기원 조사를 주장한 호주에 대해 호주산 석탄 수입 금지라는 보복 조치를 취한 것과도 무관치 않을 수 있다. 이로 인해 오히려 중국 국내적으로 석탄 부족에 시달리며 값싸고 질 좋은 북한산 석탄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석탄이 필요한 중국과 인도적 물품이 필요한 북한 간에 서로 필요가 맞아떨어지니, 대호주 보복의 ‘나비효과’로 이런 식의 거래가 더 확장된 규모로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석탄을 불법 수출한 뒤 인도적 물품으로 추정되는 화물을 실고 북한으로 돌아간 민해호의 동선. 올 3~4월 운항 내역이다. 안보리 대북 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 보고서.

한국과 미국이 얼마든지 줄 수 있다는데, 굳이 이런 기발한 방법까지 고안해 제재를 어겨가며 중국으로부터 제한된 물량의 인도적 물품만 들여오는 북한의 속내는 여러 갈래일 것이다.
언제든 시작될 수 있는 미국과의 비핵화 대화에서 협상력을 제고하기 위한 인내일 수도 있고, 한ㆍ미의 도움 없이도 아직은 견딜 수 있다는 자신감일 수도 있다. 어지간한 물량으로는 만족할 생각이 없으니 대량 지원을 각오하라는 엄포일 가능성도 있다.

어떤 경우라도 하나는 확실하다. 굶주리고, 식량과 약품 부족으로 힘들어하는 인민의 고난은 북한 지도부의 안중에 없다는 점이다.
노동당 창건일인 10월 10일을 맞아 내놓은 강연회 연설에서 김정은은 “나라의 경제를 치켜세우고 인민들의 식의주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효과적인 5년”을 언급했다. 당의 식의주 문제 해결 의지라는 표현이 허망하게만 들린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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