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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안 부럽다는 '한국의 산티아고 순례길' 직접 가보니..

홍지연 입력 2021. 10. 16. 18:03 수정 2021. 10. 18.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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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가고 나서 한동안 울림이 계속되는 후유증을 안기는 여행지가 있다. 충남 당진이 그랬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여행이 묵직해진 건 200년 전 이 땅에 태어나 25의 나이로 순교한 김대건 신부 때문이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4대가 죽임을 당한 숭고한 이야기 앞에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마음은 절절해졌다. 모든 것이 넉넉해지는 가을날 의미있는 여행길에 오르고 싶다면 당진을 꼭 가보자. 순례지 7곳을 엮은 13㎞의 버그내 순례길을 걸으면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살아있음을 느끼고 마음에 평화가 찾아든다. 당진이 품은 아름다운 풍경은 덤이다.

◆교황도 다녀간 대한민국 대표 순례지 솔뫼성지

솔뫼성지는 우리나라 최초로 신부가 된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곳에 조성됐다. 우리나라 제1의 가톨릭 성지로 김대건 신부의 생가와 기념관 그리고 대성전 등이 있다.

성지로 들어서면 원형극장처럼 조성된 아레나가 보인다. 정면에 무대가 있고 층층으로 된 좌석이 에워싼다. 무대에는 커다란 벽화가 있다. 4대에 걸쳐 순교한 김대건 신부 가문의 11명 순교자를 성화로 표현한 것이다. 벽화 속 인물을 세보면 11명이 아닌 12명이다. 김대건 신부 옆에 그의 어머니까지 넣어 벽화를 만들었다.

아레나 앞에서 길이 갈린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펼쳐진 푸른 소나무밭 사이로 십자가의 길이 펼쳐진다. 조각과 모자이크화로 예수님의 수난을 표현했다. 십자가의 길을 통과해 김대건 동상을 지나 생가로 가도 되고 반대 방향으로 둘러볼 수도 있다.

김대건 생가는 사진으로 먼저 봤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했을 때 교황도 이곳을 찾았다. 의자를 놓고 앉아 묵상하던 모습을 본떠 만든 조각상이 그때의 감동을 떠올리게 한다. 생가는 비교적 최근에 복원된 모습(2004년)이다. 1906년 합덕성당의 초대 신부님이 이곳에서 주춧돌과 와편을 발견하면서 생가를 확인했고 순교 100주년인 1946년 솔뫼성지 성역화가 시작됐다.

“7살 때까지 이곳에서 살다가 용인으로 이주를 하셨대요. 15살 때 신학생으로 발탁됐을 때 기록을 보면 ‘면천 솔뫼 출신’이라고 나옵니다. 그렇게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로 가서 공부를 하고 1844년 부제가 되어 이듬해 돌아왔다가 다시 상해로 건너가 신부가 되셨죠.” 이영화 해설사의 말이다.

김대건 동상은 1977년에 세워졌다. 동상 뒤 하얀 탑은 성모님이 뒤에서 호위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기념관 건물은 좌우 대칭형이다. 상하이로 갈 때 타고 간 배 라파엘로를 상징한다. 건물 주변으로 채워진 물 위로 건물 반영이 담긴다.

◆한국전쟁 때도 계속됐다… 목숨 걸고 지킨 합덕성당의 미사

버그내는 삽교천의 옛 지명이다. 삽교천의 옛날 이름인 범천이 범근내, 범근내포 등 다양하게 불리다가 버그내로 굳어졌다는 설, 큰 하천에 버금간다 해서 버그내가 된 거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버그내 물줄기를 따라서 천주교가 보급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리고 박해의 현장과 순교자들의 흔적을 따라 길을 이어 붙인 것이 바로 버그내 순례길이다.

버그내 순례길의 시작은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8년 대전 교구 설립 60주년을 맞아 그 옛날 한국 천주교회가 시작되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걸었던 흔적을 따라 내포 도보순례를 시작했던 것이 버그내 순례길의 시작이었다. 버그내 순례길은 한국관광공사 대전충남지사의 강소형 잠재관광지로도 선정됐다. 자연을 벗 삼아 걷는 길이다 보니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언택트 관광지이기도 하다. 흔히 버그내 순례길을 ‘대한민국의 산티아고’라고 부른다. 10년도 전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기억을 되살리며 버그내 순례길을 더듬어봤다.

솔뫼성지에서 빠져나온 길은 합덕읍내로 이어진다. 한우로 유명한 합덕시장통을 지나면 다시 평안한 논 뷰가 펼쳐진다. 방문했던 9월 16일엔 초록색이었지만 포스팅이 올라가는 지금쯤이면 아마 황금 색으로 변해있을 거다. 오른편엔 석우천 왼편엔 들판을 따라 걷다 보면 합덕제에 다다른다.

합덕제에서 바라다보이는 언덕에 합덕성당이 있다. 합덕성당은 1890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서 양촌성당으로 출발했다. 1899년 지금 자리로 옮겨오면서 이름을 합덕성당으로 바꿨다.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고딕 양식의 성당 건물이 지어진 건 1929년이다. 옛날 내포 사람들은 이곳을 프랑스 신부가 살고 있다는 의미를 담아 ‘양관’이라고 불렀다. 합덕성당은 수호 성인으로 성가정(요셉, 마리아, 예수님)을 모시는 ‘성가정성당’이다.

합덕성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사제를 배출한 곳이다. 이곳 합덕성당 교우들은 대부분 수녀님 가족 신부님 가족들이라고 한다. 합덕성당에서는 지금껏 한 번도 미사 봉헌이 끊이지 않았다. 전쟁통에도 미사를 계속했고 1950년 8월 14일 백문필 신부님은 자신을 잡으러 사람들이 오고 있다는 얘기에도 신도들의 고해성사를 들어주다 대전 형무소로 끌려갔다.

◆황금들판 속 밀려오는 신리성지의 숭고한 정신

합덕성당에서 나와 합덕제 중수비~원시장·원시보 형제의 우물~무명순교자의 묘를 차례로 지나면 마지막 종착점인 신리성지에 도달한다.

“신리에 도착하자 교우들 400명이 나를 맞아줬다.”

위앵 신부가 1865년 처음 신리를 찾았을 때 상황을 설명한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내포 주민 80~90%가 천주교 신자로 추정된다. 신리가 그 중심이었다. 신리성지는 2000년대 들어서 조성됐다. 성전은 2006년에 봉헌됐고 순교미술관 2013년 개관했다. 주변은 전부 논과 들이다.

신리는 조선에서 가장 규모가 큰 천주교 교우 마을이었다. 조선으로 오는 선교사들은 거의 모두 이곳으로 거쳐갔다. 신리를 조선의 카타콤바(로마시대 비밀 교회)로 부르는 이유다. 1845년 10월 김대건 신부와 함께 조선으로 와 제5대 조선교구장을 지내며 활동을 한 다블뤼 주교는 손자선 토마스의 집에서 숨어 지내며 조선 천주교사와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했고 천주교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했다. 손자선 토마스의 집이 곧 주교관이자 조선 교구청이었던 것이다.

신리성지는 지금 당진에서 가장 핫한 사진 포인트 중 하나다. 깔끔하게 조성된 이곳을 찾아 사진을 찍어 가는 사람이 많다. 들판에 나지막이 솟은 언덕과 그 위에 우뚝 솟은 순교미술관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지는 파란 가을 하늘을 함께 담으면 누가 찍어도 만족스러운 사진이 나온다.

순교미술관은 현재 코로나 때문에 잠시 휴관 중이다. 전시 공간에는 이종상 화백이 재능 기부를 통해 봉헌한 신리 성인 5분의 영정화와 12점의 순교 기록화가 있다. 1000호 대형 그림 속에는 다블뤼 신부 김대건과 같이 황산포구를 통해 조선으로 들어오는 모습, 몰래 미사를 드리는 모습부터 갈매못에서 순교하는 모습까지 담겨있다. 그림을 보고 난 후에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탑 꼭대기로 올라간다. 탑 끝에 가느다랗게 뻗쳐있는 십자가가 저 밑에서부터 궁금했다. 가까이서 보니 철사 여러 개를 이어붙여 만들었는데 사람이 양팔을 벌리고 서 있는 것 같기도 하다.

“400개의 철사를 가지고 만든 십자가예요. 위앵 신부가 쓴 편지에 ‘신자 400명이 나를 맞아줬다’라고 적혀있다 했잖아요. 편지글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십자가예요.”

[홍지연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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