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字에 담은 위로… 지친 세상 보듬다 [S 스토리]

송민섭 2021. 10. 16.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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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생명 광화문글판 30년
교보생명 창립 신용호 회장이 제안
초창기엔 계몽·직설적 문구 대다수
IMF 시기 감성적 문안으로 바뀌어
올가을 100번째 문안 BTS에 요청
히트곡 ‘퍼미션 투 댄스’ 가사서 따와
감동적 메시지에 캘리그래피 결합
시대 관심사·계절과 어울림 등 반영
서울 시민 넘어 전 세계인들에 회자
‘[춤]만큼은 마음 가는 대로, 허락은 필요 없어’.

지난달부터 서울 광화문네거리 교보생명빌딩 외벽에 내걸린 100번째(2021년 가을편) 광화문글판 문안은 BTS(방탄소년단)의 인기곡 ‘Permission to Dance’에서 착안한 것이다. BTS는 교보생명으로부터 100번째 광화문글판 문안 요청을 받고 고심 끝에 “각자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을 찾아 괄호 속에 여러분만의 자유를 표현해 주길 바란다”는 취지에서 이같이 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1991년 이후 지난 30여년간 시의성 있고 정감 어린 25∼30자 글귀로 시민들에게 위로와 감동,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온 교보생명 광화문글판이 디지털시대를 맞아 변화를 꾀하고 있다. 100번째 광화문글판은 15일 현재는 가로 20m, 세로 8m의 원래 크기이지만 처음엔 가로 90m, 세로 21m의 초대형 래핑 형태였다.

1991년 광화문글판 1호.
보는 이의 참여를 이끄는 ‘괄호’와 함께 역동적인 느낌의 미디어아트, 광화문글판 홈페이지로 연결되는 QR코드 등을 접목했다. 기존 아날로그적 감수성은 지키되 디지털 경험으로 확장하고 다양한 문화, 세대와 공감할 수 있도록 ‘즐거운 파격’을 시도했다는 설명이다. 

◆30자에 담긴 시대의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

“면접 후 집으로 가는 길, 월세와 통신비 같은 이름들이 머리에 스쳐 지나갈 때 청승맞게 버스 안에서 눈물이 고이더군요. 둥근 눈물이 똑 떨어질 때 광화문글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 살아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용기의 글판 감사합니다.”(흔한 취업준비생)

“갑작스럽게 친정엄마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게 되셨어요. 우연히 광화문글판의 예쁜 글을 보고 와서 엄마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니 우리 엄마가 얼마나 예뻤는지. 오롯이 엄마와 둘만 보낼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죄스러운 딸)

문안에 시구를 처음 넣은 1998년 광화문글판.
30자도 안 되는 짧은 글이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바뀌는 광화문글판 문안이 서울시민을 넘어 전 국민, 세계인들에게 회자되는 이유는 시의성 있고 감성 어린 문구로 바쁘고 지친 현대인에게 위로와 용기, 희망의 울림을 안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김봉현 동국대 광고홍보학과 교수는 2015년 광화문글판 25년을 기념하는 공감콘서트에서 광화문글판에 대해 “공익적 가치와 정치·사회적 중립성, 은유적 함축성을 지닌 글귀와 감성적 서체, 디자인이 결합돼 어떤 간판도 가질 수 없는 미학적 카리스마를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광화문글판 30년 기념집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의 ‘내 마음 속 광화문글판’에서 또 다른 시민은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2006년 겨울편)이라는 문구를 접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진정한 어른이 되고 그렇게 아버지가 되어 가는 것 같다”고 적었다. 

광화문글판 2009년 봄편에 ‘얼굴 좀 펴게나 올빼미여, 이건 봄비가 아닌가’라는 일본 하이쿠(3구 17자로 된 짧은시)가 소개되자 일본 산케이신문은 칼럼을 통해 “(한국은) 멋진 느낌을 주는 커다란 글판을 걸어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있다”며 “일본도 이런 유머와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30여년간 문안과 디자인 끊임없이 변화

광화문광장의 하루 유동인구는 100만명이고 차량 통행은 25만대에 이른다. 이곳에 광고판이 아닌 글판을 내걸기로 한 것은 누구 아이디어였을까. 교보생명·교보문고 창립자인 대산(大山) 신용호(1917∼2003) 회장의 제안으로 1991년 1월 빌딩 외벽에 ‘우리 모두 함께 뭉쳐 경제활력 다시 찾자’는 격언이 첫선을 보였다.

이후에도 ‘훌륭한 결과는 훌륭한 시작에서 생긴다’(1994년), ‘나라경제 부흥시켜 가족행복 이룩하자’(1997년), ‘개미처럼 모아라 여름은 길지 않다’ 등 계몽적이면서 직설적인 메시지가 주를 이뤘다. 

계몽적이면서 직설적인 메시지가 주를 이뤘던 광화문글판이 지금의 감성적 문안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98년부터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고통과 절망을 겪는 이들이 늘자 신용호 창립자는 “기업 홍보는 생각하지 말고, 시민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는 글판으로 운영하자”고 지시했다고 한다. 고은 시인의 ‘떠나라 낯선 곳으로/ 그대 하루하루의/ 낡은 반복으로부터’(1998년)를 시작으로 광화문글판에 시심(詩心)이 녹아들었다.

교보생명 신용호 창립자
신창재 현 교보생명 회장이 대표이사로 취임한 2000년에는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고은 ‘길’)가, 한·일 월드컵을 앞둔 2002년엔  ‘푸름을 푸름을 들이마시며/ 터지는 여름을 향해/ 우람한 꽃망울을 준비하리라’(조태일 ‘꽃나무들’)이라는 글귀로 월드컵의 성공을 기원하기도 했다. 계절의 변화에 맞춰 3월과 6월, 9월, 12월 정기적으로 글판을 변경하기 시작한 해는 2003년이다.
13일 서울 종로구 교보생명빌딩에서 열린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회’ 회의 모습. 왼쪽부터 김행숙 시인, 성석제 소설가, 이슬아 작가. 교보생명 제공
광화문글판 문안은 2000년부터 시인과 소설가, 평론가 등 문인들과 교수, 카피라이터, 언론인 등 6∼8명으로 구성된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회’와 시민 참여를 통해 선정된다. 교보생명 홈페이지에 올라온 시민들의 공모작과 선정위원들(임기 1∼4년)의 추천작을 놓고 치열한 토론과 여러 차례 투표를 거쳐 최종 선정된다. 선정위원들은 후보작들이 시대의 관심사를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지, 계절과는 잘 어울리는지, 의미가 쉽게 전달되는지 등을 종합 검토한다. 
그래피티 아트를 활용한 2010년 여름편.
광화문글판이 변한 것은 문안만이 아니다. 글씨체나 디자인 면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해왔다. 광화문글판에 디자인 개념이 본격적으로 적용된 것은 2004년 여름편(정호승 ‘내가 사랑하는 사람’)부터다. 2009년 봄편(고바야시 잇사)에는 뉴욕타임스의 ‘올해의 우수 그림책’에 선정된 류재수 작가의 ‘노란우산’에서 따온 그림을 배경으로 넣었다. 2005년 봄편(정현종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은 캘리그래피를 적용한 첫 사례이며, 2010년 여름편(키비 ‘자취일기’)에선 그래피티 아트를 접목하기도 했다.

광화문글판 문안이 정해지면 디자이너들이 문안에 어울리는 디자인 후보안을 30∼40개 검토한 뒤 수정을 거쳐 3개 정도의 이미지를 제시하면 내부 임직원 선호도 조사를 통해 결정한다.

◆가장 사랑받은 글판은 나태주의 ‘풀꽃’

지난 30여년간 광화문글판에 담긴 문안은 100편이 넘는다. 공자와 헤르만 헤세, 파블로 네루다, 서정주, 도종환, 김용택 등 70여명의 현인·작가들 작품이 광화문글판으로 다시 태어났다. 

100편의 광화문글판 중 시민들이 가장 사랑한 글판은 무엇이었을까. 대체로 의미 있는 인간관계를 맺기 어려운 요즘, 사람이 소중한 존재임을 일깨우고 만남과 소통의 중요성을 되새긴 글판들이 사랑을 받았다. 

광화문글판 30년 기념 2020년 가을편.
교보생명이 지난해 광화문글판 30년을 기념해 ‘삶의 한 문장, 내 마음속 광화문글판은’을 주제로 온라인투표(1만5566명 참여)를 진행한 결과 1위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는 시구를 인용한 2012년 봄편이었다. 나태주 시인은 “당시 많은 지인들로부터 문자메시지나 영상을 받았다”며 “처음엔 평범한 마음이었는데 점점 뜨거워졌다. 나 스스로 혼자서 뜨거워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뜨거워진 뜨거움”이라고 회상했다.

두 번째 인기 글판은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 중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의 2011년 여름편이다.

이어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두 번은 없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므로 너는 아름답다’(2015년 겨울편)와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2004년 봄편), 파블로 네루다의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2013년 여름편)도 시민들 사랑을 한몸에 받은 광화문글판이었다. 

송민섭, 정지혜 기자 stso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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