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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팡은 이길 수 없다'는 아들의 죽음.."같은 죽음 반복되면 안 돼요"

입력 2021. 10. 17.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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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쿠팡 물류센터 노동자 고 장덕준 어머니 박미숙 씨

[최용락 기자(ama@pressian.com)]
"국회 앞에서 (아들 장덕준 씨의) 1주기 추모 기자회견을 하는데 하늘이 푸르고 맑았어요. '진짜 덕준이가 좋아하는 날씨인데….' 청명하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너무 시렸어요. 전날 묘소에 갔을 때는 비가 왔어요. 덕준이가 비 오기 전 습한 날씨도 정말 좋아했거든요. 좋아했던 날씨일 때, 좋아했던 음식이나 세계맥주를 볼 때, 모든 순간순간에 덕준이가 생각나요. 지금도 (아들이 주문한) 프라모델 조립할 게 이만큼 쌓여있는데. 저거 어떻게 하죠?"

지난해 10월 12일, 쿠팡 칠곡물류센터에서 일하던 27살 장덕준 씨가 퇴근 뒤 과로사했다. 고인의 어머니인 박미숙 씨는 지난 11일 아들의 묘소 앞에서 추모제를, 12일 국회 앞에서 추모 기자회견을 치렀다.

아들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만 같아 묘소에 가는 것도, 제사를 하는 것도 꺼려하던 박 씨였다. 아들의 1주기를 어떻게 보낼지를 두고 가족 간 의견이 맞지 않아 힘들기도 했다. 그러던 박 씨가 1주기 추모 행사를 하게 된 것은 전국쿠팡물류센터지부와 택배과로사대책위원회(아래 과로사대책위) 등의 제안 덕분이었다.

시린 마음을 안고 국회 앞에 선 박 씨는 기자회견 당일 발언 서두에 아들을 잃은 뒤의 심정을 짧게 말했다. 그리고 "쿠팡에는 아직도 덕준이의 친구들이 있다"며 쿠팡에 과로사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정부와 국회에 야간노동 규제법 제정을 촉구했다. 지난 1년, 포기하지 않고 수도 없이 외쳐온 말이었다.

지난 14일, 경북 경산 부부가 운영하는 목공소에서 박 씨를 만나 아들에 대한 기억과 지난 1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 박미숙 씨. ⓒ프레시안(최형락)

쿠팡에서 일한 뒤 마라톤 선수처럼 말라가던 평범한 20대 청년, 장덕준

박 씨에게 덕준 씨는 그 세대가 즐기는 취미를 가진 "평범한 20대 청년"이자 "친구 같기도 하고 스승 같기도 한" 아들이었다. 애니메이션, 영화, 게임을 좋아했고 맛있는 음식과 세계맥주도 좋아했다. 어머니와는 산책을 다녔고 아버지와는 술친구로 어울렸다. 사회과학과 심리학에 관심이 많던 아들과 대화를 나누며 뭔가를 배우고 새로 생각하는 일도 많았다.

덕준 씨가 대학을 졸업한 해는 코로나가 일어난 2019년이었다. 다른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취업난에 맞닥뜨렸다. 이전에도 용돈을 벌기 위해 물류센터에서 상하차 일을 하던 덕준 씨였다. 2019년 6월 쿠팡 칠곡물류센터로 출근을 시작했다.

이후 덕준 씨의 몸은 변해갔다. 운동을 좋아해 근육이 붙어있었는데 "마라톤 선수처럼" 말라갔다. 하루는 걱정이 된 가족들이 몸무게를 재보자고 했다. 일을 시작하기 전 75kg이던 몸무게가 60kg이 돼 있었다. 나중에는 무릎이 아파 보호대를 차고 출근했다.

덕준 씨가 쿠팡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날도 많았다. '중간관리자들이 우리 말을 듣지 않는다', '새로 온 사람에게 직무교육을 하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수월할 텐데 교육이 없다', '일을 잘 하는 형이 있는데 무기계약직 심사에 탈락했다'와 같은 말들이었다. 쿠팡 노동자의 처지를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쿠팡에서 일하면서 양팔 저울을 비유로 많이 들었어요. 한쪽에 물건을 두면 한쪽은 내려간다. 누군가 즐겁고 행복하고 편리하다고 느낀다면 힘든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다."

그런 아들에게 박 씨가 "바꾸려면 안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한 날도 있었다. "한 번 쳐서 안 된다. 계속 쳐야 한다"고도 했다. 세상이 그렇게 변해왔으니 쿠팡도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지금 돌아보면 자신은 밖에 있었는데 너무 쉽게 생각했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덕준 씨는 말을 해도 바뀌는 게 없다며 "우리는 쿠팡을 이길 수 없다"고 했다.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그만 두라'고 해보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덕준 씨는 아버지와의 술자리에서 "2년을 채우고 무기계약직이 되면 그 때 선택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같은 달 12일 세상을 떠났다.

"새벽 6시에 (덕준이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욕실에서 샤워를 하거든요. 그런데 욕실이 너무 조용했어요. 피곤하면 욕실에서 자기도 하니까. 방에 들어가서 자라고 문을 두드렸는데도 소리가 안 났어요. 들어가 보니 (가슴에 손을 X자 모양으로 교차하고 상체를 수그리며) 이렇게 있는 거예요. 119를 불렀어요. 의사가 힘들 거라고 말을 하는데도 죽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눈으로 보는데도 다시 일어날 것 같았어요."

▲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박미숙 씨의 옆 모습. ⓒ프레시안(최형락)

산재 신청부터 전국 순회 투쟁, 청와대 청원까지...박미숙 씨의 지난 1년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는데도 장례는 시작됐다. 그 때만 해도 산재나 과로사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장례 둘째 날, 새벽 장례식장에 온 진경호 당시 과로사대책위원장을 만나고서야 처음 의구심이 생겼다. 아들이 하던 이야기와 과로사한 택배노동자의 이야기가 너무 비슷했다. 장례식장을 찾은 쿠팡 물류센터 동료들도 사망 당일 덕준 씨 몸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덕준이 일하던 7층에서 50~70명 정도가 일한다는데 35명 정도가 장례식장에 왔어요. 조의금을 보낸 친구들은 50명 가까이 됐어요. 온 친구들이 다 너무 심하게 울었어요. '그날 덕준이가 가슴 통증이 있다고 했다', '속이 메슥거린다고 했다'고도 했어요. (사망 당시 가슴에 손을 모으고 있던 게 생각나셨겠네요?) 네."

박 씨와 남편은 고심 끝에 아들의 시신을 부검하고 산재를 신청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이후 과로사대책위와 함께 덕준 씨에게 일어난 일을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쿠팡은 자사 홈페이지 뉴스룸에서 '고인이 살인적인 근무에 시달렸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맞받았다.

지난 2월 9일 근로복지공단은 덕준 씨의 죽음은 산재라고 인정했다. 공단에 따르면, 야간근무자였던 덕준 씨는 발병 전 1주간 주 평균 62시간 10분, 발병 전 2주에서 12주간 주 평균 58시간 18분 일했다. 하루에 취급한 중량물의 무게는 470kg 이상이었다. 과중한 업무로 과다하게 사용된 근육은 급성으로 파괴됐고 결국 심근경색에 이르렀다.

공단의 산재 인정이 나온 날, 쿠팡은 자사 뉴스룸을 통해 유족에게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유족에게 연락했다. 하지만 과로사 방지대책 등과 관련한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 2월 22일 조셉 네이든 쿠팡풀필먼트서비스 대표가 산재 국회 청문회에 출석하기 전에도 쿠팡은 유족에게 연락했다. 청문회가 끝나자 접촉이 끊겼다.

이에 박 씨는 지난 5월 13일부터 한 달여간 전국 순회 투쟁을 벌였다. 남편과 함께 각지의 쿠팡 물류센터를 찾았다. 기자회견도 열었다. 이후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의 중재로 다시 한 번 유족과 대책위, 쿠팡간에 과로사 방지대책을 논의하는 자리가 열렸으나 지난 7월 중단됐다.

당시 을지로위는 유족의 야간 연속근로와 연장근로 제한 요구에 쿠팡이 '야간 연속근무 6일, 연장근무 2시간 30분'을 고수한 점이 협상 중단의 주요 이유라고 밝혔다. 이대로라면 주 평균 노동시간은 63시간까지 허용된다. 고용노동부 과로사 판정 노동시간 기준은 발병 12주 전 주 평균 60시간, 발병 4주 전 주 평균 64시간이다.

쿠팡은 유족과의 합의가 불발하는데 대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대책위가 가로막고 있어 유족과 직접적인 협의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박 씨는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저는 이미 대책위에 합의 권한을 위임했어요. 쿠팡과 서너 번 직접 통화하면서도 그런 뜻을 분명히 밝혔고요. 7월에 협의할 때 합의문까지 만들어졌어요. 저는 성에 안 찼어요. 그런데 대책위가 저를 설득했어요."

대화가 중단된 뒤에도 박 씨는 쿠팡과의 싸움을 계속했다. 지난 9월에는 쿠팡이 제대로 된 재발방지대책을 내게 해달라는 내용의 청와대 청원을 올리기도 했다.
▲ 박미숙 씨가 아들의 얼굴이 새겨진 목판 액자를 들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바꾸려면 스스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말, 책임져야죠"

지금 박 씨의 가장 큰 바람은 아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럴 수 없으니 아들과 같은 이유로 죽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 이를 위해서는 국회가 야간노동 규제법을 제정하고, 쿠팡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덕준이가 자기 몸을 던져서 보여줬어요. 야간노동은 위험해요. 지금 야간노동 규제법이 안 갖춰진다면 제2, 제3의 덕준이가 또 나올 거에요. 국회가 제발 국민을 위해 일하고 국민을 대변한다는 자신들의 직무를 깊이 생각하고 충실히 하고 소홀히 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쿠팡은 지금 한국에서 세 번째로 많은 고용을 창출하는 기업이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걸맞게 노동자의 안전이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사람을 자꾸 갈아 넣는 게 아니라 정말 노동자를 존중하고 그들이 자신의 권리를 이야기할 때 귀담아 들으면 좋겠어요."

긴 싸움이 힘들지는 않을까. 목표가 너무 멀어보이지는 않을까.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그만 해도 되는 건 아닐까. 물론 지난 1년의 싸움은 쉽지 않았다. "우리는 쿠팡을 이길 수 없어요"라는 아들의 말도 자꾸 떠올랐다. 하지만 박 씨의 생각은 단호했다.
"덕준이가 가고 일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이 사건을 계기로 이게(아들과 같은 이유로 사람이 죽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것) 제 일이 됐어요. 제가 한 '바꾸려면 스스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말, 책임져야죠. 나중에 엄마로서 덕준이를 만났을 때 '어머니 왜 그랬어요' 이런 말은 안 들어야죠.

'너무 잘 했어요.' 덕준이 말투가 있거든요. 그 말투로 툭 던지는 이 말을 듣고 싶어요. 그게 귓가에 자꾸 맴돌아요. 다른 부모가 똑같은 환경에서 또 자식을 잃는다면, 덕준이가 봤을 때 뭐라고 할까요. 제가 언제까지 (싸움을 계속하며) 갈지는 모를 수도 있겠죠. 그래도 오늘 갈 수 있는 만큼은 갈 거예요."

얼마 전 박 씨 부부는 쿠팡에서 일하다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조리원의 남편 최동범 씨와 함께 일생에 한 번은 소원을 들어준다는 팔공산 갓바위를 찾았다. 가족을 잃은 뒤 걷는 일조차 줄어든 탓에 체력이 떨어져 셋 모두 숨을 몰아쉬면서도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같이 산에 올랐다. 

그곳에서 빌었을 소원은 올해 안에 이뤄질 수 있을까. 덕준 씨의 2주기는 온전한 애도의 시간이 될 수 있을까.

[최용락 기자(ama@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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