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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 설거지했는데 영어시험이요?"..세종호텔의 정리해고 요건 논란

강은 기자 입력 2021. 10. 17. 15:59 수정 2021. 10. 17.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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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15일 오후6시 서울 중구 명동의 세종호텔 노동자들이 사측의 정리해고 움직임을 규탄하는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강은 기자


“30년 간 칼질하거나 설거지한 사람들한테 갑자기 영어 시험을 보라고 하는 게 말이 되나요.” 서울 명동의 세종호텔에서 28년 동안 일한 허지희씨(50)는 이달 초 사측이 제시한 정리해고 기준을 보고 이같이 말했다. 그는 “영어가 필요한 사람은 사실상 호텔 현관의 프런트팀밖에 없다. 정리해고가 논의되는 상황에서 (회사에서) ‘언제 구술시험을 볼 거냐’는 전화를 받는 건 큰 스트레스다. 그저 ‘나가라’는 말로 들린다”고 했다.

세종호텔이 경영난을 이유로 정리해고를 논의하면서 조리나 식기세척 담당자들을 상대로도 ‘외국어 구사 능력’을 평가 기준에 포함시켜 논란이 일고 있다. 17일 경향신문이 입수한 세종호텔의 ‘합리적이고 공정한 정리해고 대상자 선정을 위한 기준’을 보면, 평가 항목에 외국어 구사능력(5점)이 포함돼 있다. 평가는 영어(3점)와 일본어 또는 중국어(2점)로 이뤄지며 상·중·하로 점수를 매긴다.

노동자들은 사측의 행위가 ‘사용자는 합리적이고 공정한 해고 기준을 정하고 이에 따라 대상자를 선정해야 한다’고 밝힌 근로기준법 24조2항에 위배된다는 입장이다. 이 호텔 식음료 부서에서 15년 간 일한 이주형씨(37)는 “외국어 시험을 안 보면 (해당 평가 항목이) 0점 처리된다고 하더라”면서 “영어 시험이 갑자기 해고 기준에 등장해 황당하다”고 말했다. 해우법률사무소의 권영국 변호사는 “지금까지 외국어 사용과는 직접적인 관계없이 계속 근무했던 사람들인데 ‘미래의 막연한 필요성’만 내세우면서 노동자들에게 원래 적용되지 않던 기준을 들고나오는 것은 합리성이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세종호텔이 정리해고 기준으로 삼겠다고 밝힌 ‘합리적이고 공정한 정리해고 선정을 위한 기준’ 내용.


평가에 재산보유 항목이 들어간 점도 논란거리다. 이번 평가는 총 100점 만점으로 외국어 구사능력을 포함해 인사고과(45점), 상벌사항(10점), 근속년수(10점), 장애유무(10점), 부양가족(5점) 외에 다른 가족의 소득(10점), 재산보유(5점) 등이 포함됐다. 권 변호사는 “생계 곤란 여부를 고려하겠다는 취지인 것 같은데, 본인이 공개하고 싶지 않은 개인정보를 제출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이익을 주는 것은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사측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회사는 지난 12일 “호텔업에서 어학은 필수이고, 조리나 식음에 관련된 일자리가 없어 객실·총무·재경 등 일자리밖에 남지 않아 실질적으로 어학 실력이 전환배치 시 참고될 수밖에 없다”고 공지했다. 그간 사측은 코로나19가 시작된 지난해부터 올해 10월까지 세 차례 희망퇴직 모집 공고를 냈다. 지난해 12월 기준 150명가량이던 노동자 수가 서서히 줄어 지금은 40명 가량 남아 있다.

허씨는 “코로나19 때문에 회사가 어렵다곤 하지만 이미 지난 몇 년간 상시적으로 구조조정이 이뤄졌다”면서 “부동산 등 자산을 정리하거나 사업을 다각화해 회사를 살리려는 노력은 없고 오로지 노동자들에게만 나가라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은 기자 e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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