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빨리 포기한 '마르크시즘' 현재 문제 근거해 다시 읽죠"

강성만 2021. 10. 17.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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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현대사상연구소 홍승용 소장

대구에 있는 현대사상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난 홍승용 소장의 어깨 너머로 카를 마르크스를 형상화한 그림 액자가 걸려 있다. 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게으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공부 모임’. 내년 초 설립 15돌을 맞는 현대사상연구소 홍승용(대구대 독문학과 명예교수) 소장이 “다소 시니컬(냉소적)하게” 연구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까닭은 이렇다. “한국 사회가 마르크시즘을 금기시하다 1980년대 후반 공부 길이 열렸는데 얼마 안 돼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마르크시즘을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고 빨리 버렸어요. 그게 저로서는 불만스러웠어요. 너무 일찍 포기한 탓에 마르크시즘을 실제 현실과 대질해 비판적으로 읽지도 못했고, 마르크스가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한 점도 짚지 못했어요. 또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신좌파 이론의 문제점도 제대로 비판하지 못했죠. 그래서 게으르게 천천히 가자고 했죠. 어떤 사상이든 유행을 따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하면서 현재 문제에 근거해 마르크시즘을 다시 읽어야죠.”

정년을 9년 남긴 2012년에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어” 대학에서 명예퇴직한 홍 교수는 간행물 발간 등 연구소 운영에 쓰이는 비용 대부분을 사비로 감당하고 있다. 지난 13일 대구광역시 북구의 한 아파트 상가에 자리한 연구소에서 홍 교수를 만났다.

연구소 서가에 진열된 <현대사상>. 강성만 선임기자

연구소는 그간 세미나 논문 모음집 형식의 간행물 <현대사상>을 25호나 냈다. 평균 15명 정도 참여하는 세미나를 1년에 두 차례 정도 하고 발제를 보완하거나 투고를 받아 간행물을 엮는다. 첫 호부터 변함없이 정가 5천원인 <현대사상>은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 호치민, 마오쩌둥, 로자 룩셈부르크 등 사회주의 혁명가들과 변증법, 유물론, 사회주의, 진보, 식민지, 전쟁, 민족 같은 이론적인 주제들을 아우르고 있다. <현대사상> 최신호인 민족 편을 보니 정지창 영남대 명예교수가 쓴 ‘동학과 개벽운동’을 비롯해 민족이라는 주제를 다각도로 살핀 논문 16편이 370쪽이 넘는 지면에 담겼다.

홍 교수가 2007년 초 동료 연구자 10명과 함께 연구소를 열 때 한 생각은 ‘돈 안 되는 연구모임’이었단다.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정부의 인문학 지원이 체계적으로 정비되면서 학술 운동이 너무 관에 의존하게 되었어요. 젊은 연구자들도 그 흐름에 휩쓸리더군요. 그걸 보면서 정부 연구지원에 기대지 않고, 자본주의에 예속되지 않는 자율적이고 비판적이면서 대안을 찾는 연구를 하자고 결심했죠.”

연구소가 이달부터 내년 2월까지 ‘민주주의’를 주제로 하는 29차 세미나는 발제자가 스무 명이나 된다. 세미나에 정규직 교수나 활동가도 참여하지만, 다수는 비정규직 연구자다. “<현대사상>이 한국연구재단 등재지가 아니라 연구 점수도 없고, 원고료도 없는데 연구자들이 대학이나 정부에서 받을 수 있는 연구비를 포기하고 세미나에 옵니다.”

세미나는 매번 주제에 따라 전문가들이 새로 합류해 기존 구성원들과 토론한다. ‘돈 안 되는 연구모임’이 성황이라고 하자 그는 “그간 세미나 멤버 구성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고 했다. “주제가 정해지면 제가 그 분야 전문 연구자를 찾아 참여를 부탁합니다. 또 노동운동과 학계의 연대 차원에서 현장 활동가들도 한두 분 모시죠. 지난 제국주의 세미나에는 이주노동자 단체 활동가가 참여했어요. 대개 일주일 안에 세미나 참여자 구성이 끝납니다.”

그는 연구소에서 세미나와 별도로 ‘마르크스 고전 읽기’(격주)와 ‘자본론 다시 읽기’ 공부 모임도 하고 있다. “모두 7명이 각각 5년, 4년째 하고 있어요.”

이번에 카를 마르크스 주저 <자본론>을 세 번째 읽고 있다는 홍 교수는 현대 자본주의의 여러 문제를 뛰어넘으려면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사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오늘날 세상을 보면 인공지능 등 기술 혁신으로 대량 실업이 우려되고,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20세기 전반의 제국주의 전쟁이 재연될 가능성이 있어요. 환경재앙도 후쿠시마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이 바탕에는 노동과 자본이 모순 관계라는 자본주의 근본 문제가 있어요. 이런 문제들을 극복할 필요성이 제일 절박한 쪽도 노동자입니다. 따라서 그 답을 찾는 연구 동력도 노동에서 나와야죠. 하지만 지금 대학이나 연구소는 너무 자본에 의지하고 있어요.”

그는 대학교수 등 지식인들이 자본에 종속되는 정도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고도 했다. “제가 대학에 있을 때보다 더 심해요. 자본에 예속되지 않은 연구를 해야겠다는 자각에서도 멀어지고 있어요. 교수나 대기업 노동자 같은 노동 상층부는 삼성 같은 대기업들이 외국에서 제국주의적 착취로 벌어들인 초과 이윤 혜택을 상대적으로 많이 누립니다. 이는 바로 학생들 의식에도 영향을 미치죠.”

“돈 안 되는 연구 모임 하려고”
2007년 초 대구대 부설로 설립
변증법·호치민 등 ‘현대사상’ 25권
“공부 위해” 정년 9년 남기고 퇴직

“마르크시즘 다시 깊게 보면서
‘풍요로운 평등 사회’ 화두 잡았죠”

<현대사상> 25권에는 홍 교수 논문이 한 편씩 실려 있다. 40년 이상 파고든 마르크시즘 등 진보 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어떤 주장이든 비판적으로 검토해 주체적으로 소화하려는 태도가 도드라지는 글들이다.

그는 연구소 중심에는 마르크시즘이 있지만, 플라톤이나 프로이트 등 어떤 사상도 자본주의 체제의 차별과 착취 제거에 도움이 된다면 해방의 무기로 활용해야 한다고 본다. “인류가 만든 문화유산과, 혁명이나 노동운동사 등 운동의 성과를 분석적으로 들여다보고 주체적으로 재구성해야죠. 어떤 사상이든 배울 것은 배우고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합니다. 연구소 세미나 역시 누구와도 같이 할 수 있고 실제 함께합니다.” 그는 러시아 혁명가 레닌을 예로 들었다. “마르크스 고전 읽기 공부 모임에서 레닌이 쓴 철학노트를 보니 헤겔 <논리학>을 읽고 어떤 점은 천재적이고 어떤 점은 헛소리라고 논평을 했더군요. 관념론이라고 바로 제쳐놓지 않았어요. 분석하고 주체적으로 종합하는 것도 변증법의 주요 특징이죠. 올바름을 향해 끝없이 상승하는 게 변증법의 주요 모티브이고 변증법은 또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죠. 부정적이라고 그냥 버리는 게 아니라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짚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입니다. 마르크스가 이걸 잘했어요. 그는 영국 고전파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나 애덤 스미스의 생각을 적극 받아들였고 비판할 것은 비판했죠.”

“변증법적 사유방법의 요체는 정반합 공식이 아니라, 대상의 변화에 주목하고 그 변화에 합당하게 사유하는 데 있습니다. 이때 모순, 개념의 운동, 내재비판, 부정의 부정 등이 중요해요. 오늘의 자본주의적 지배질서를 불변적인 것으로 전제하여 이에 순응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특히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범인류적 위기가 심각하여 대안질서를 만들 필요성이 절박할수록 변화에 주목하는 변증법의 비판적 사유방법이 더욱 유효하죠.” 당분간 변증법 공부에 힘쓰겠다는 홍 소장이 말하는 오늘날 변증법의 유효성이다. 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그가 서울대 독문학과 대학원 석사 논문 주제로 독일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아도르노를 택한 것도 마르크시즘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단다. “아도르노가 체질적으로 귀족적 느낌이지만 그는 마르크시즘의 사고 틀을 활용했고 변증법적 사고를 했어요. 지배 관계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죠. 1980년대 초는 마르크시즘이 금기여서 그나마 허용된 아도르노를 논문 주제로 삼았죠.”

그는 지난 5년 동안 마르크시즘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우리 사회가 가야 할 방향은 ‘풍요로운 평등 사회’라는 원론적 결론에 도달했단다. “박근혜 정부 때 교육부 관리가 1%를 제외한 나머지는 개·돼지라는 투로 이야기했잖아요. 실제 우리 사회에 팽배한 현실이죠. 서열화는 심해지고 노동 내부에도 위계가 있어요. 사람들은 그걸 당연히 받아들이죠.” 설명이 이어졌다. “제가 보기에 평등이 풍요의 중요한 조건이고 풍요의 핵심에는 인간관계가 있어요. 지금 우리 사회에 풍요의 물적 토대는 있다고 봅니다. 핵심은 인간관계죠. 인간 스스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의식하고 자기 능력을 풍부히 발현하고 또 누가 누구에게 지배당하지 않는 그런 사회로 가야죠. 그러려면 자본 독식을 전제하는 지배구조를 지탱하는 국가 권력 문제도 고민해야죠.”

그는 “초기 마르크스 저작을 보면 자본주의 이후 모습으로 자연과 인간을 한 덩어리로 보는 사고방식이 나타난다”며 “만물을 하늘로 섬기면서 현대 생태주의를 포괄하는 동학 등 동양사상에서도 이런 점을 찾아내 자연과 인간이 잘 어울리는 미래상을 그릴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인터뷰 내내 자리를 지킨 홍 교수의 아내 이현주씨는 자신은 “남편의 팬”이라고 했다. 아내는 <현대사상>을 내는 출판사 ‘도서출판 모임’의 대표이기도 하다. “나쁜 일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아내의 이 말에 남편은 이 대표가 연구소 모든 세미나에 다 참석한다며 자신은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받았다. 학원 강사 시절에 대학 강사이던 홍 교수를 만났다는 아내는 지금 <자본론>을 두 번째 읽고 있단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홍 교수에게 가장 마음을 잡아끈 사상가가 누구냐고 묻자 “역시 마르크스죠”라고 답했다. “레닌과 아도르노, 루카치도 좋아해요. 아도르노가 이런 말을 했어요. 헤겔 <정신현상학>이 변증법의 탄생 현장이라고요. 저는 <자본론>을 보면서 그걸 실감합니다. 책에 변증법의 기본 원리가 스며들어 있어요. 레닌의 정치저술 역시 변증법 현장이죠.”

왜 공부하느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재밌어서죠. 의미도 있고요. 의미가 없으면 재미도 없어요.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뭔가 하나라도 찾아가는 재미가 있어요. 우리 연구소가 풍요로운 평등 사회의 한 모델이 될 수도 있어요. 의미 있는 삶이 풍요로운 삶이 될 수 있으니까요.”

대구/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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