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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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 코리아] 스파이의 세계에서 정보 강국이 되려면

입력 2021. 10. 18. 00:34 수정 2021. 10. 18.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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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배 전 국가정보원 해외정보국장·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

프랑스 사회학자 레이몽 아롱은 『전쟁과 평화』에서 국제 정치를 군인과 외교관의 세계로 묘사했다. 그러나 국제 정치는 군인·외교관뿐 아니라 스파이의 세계이기도 하다. 국제 정치 무대에서 승자가 되려면 국방력·외교력만큼 정보력이 요구된다. 세계 곳곳에서 외교관들보다 훨씬 많은 스파이가 활동하는 이유다.

최근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해외 첩보망이 와해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정보 대상에 대한 공격·방어 측면에서 첨단 기술 비중이 커진 것이 하나의 원인이다. 현대 정보 활동은 단순한 휴민트(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얻은 정보)보다는 인간과 테크놀로지를 융합한 휴킨트(Humint+Techint)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다 보니 역설적으로 발각과 노출 위험도 커졌다. 과학정보가 주목받으며 휴민트 비중이 작아지는 가운데 4차 산업혁명이 초래한 보안 취약성으로 인해 휴민트 의존 정보 활동은 어려운 시대가 되고 있다.

「 미국·캐나다, 정보 활동 법적 보호
한국도 해외 정보 활동 보호책 절실

과거에도 정보 요원들의 활동 여건이 녹록하지 않았다. 첩보 영화에 등장하는 스파이들은 초인적 능력으로 초법적 행위를 아랑곳하지 않지만, 실상은 엄혹한 환경에 처해있다. 국내든 해외든 모든 나라의 정보 요원은 법적 테두리 안에서 활동해야 한다. 007 살인 면허는 없다. 국가 안보와 세계 평화를 지키는 일이라도 위법 행위가 적발되면 처벌받는다.

냉전 시대에는 국가 안보가 지상명령이다 보니 초법적 정보 활동이 묵인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불법 정보 활동과 인권 유린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지며 공세적 정보 활동은 위축되는 추세다. 이에 따라 정보 선진국들은 국가 안보를 위해 필요한 정보 활동을 보호하는 법적 조치를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1978년 외국인정보활동감시법을 제정해 방첩 활동을 법적으로 보호한다. 캐나다는 2015년 안보정보법을 개정, 정보기관이 외국 법은 물론 관련 국제협정도 고려할 필요 없이 해외에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도록 했다. 스위스의 2017년 정보법 제정도 유사한 취지다.

정보기관의 정치 개입과 불법 사찰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우리나라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에는 시기상조일지 모르지만, 언젠가 검토해야 하는 문제다. 필자의 국가정보원 해외정보국장 재직 시절에도 많은 직원이 적폐청산 수사 트라우마로 인해 조금이라도 국내법 위반 소지가 있으면 해외 정보 성격의 정보 활동이나 비밀공작을 주저하곤 했다. 국정원법 개정으로 국내 정치 개입은 금지됐으니 국내 정치와 무관한, 국가 안보 차원의 긴급한 정보 활동에 대해 법적 보호를 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를 근거로 중요 비밀공작에 대해 대통령 승인을 받거나 국회 정보위 보고를 거치는 면책 절차를 마련할 수 있다.

국정원은 적폐청산 대상이 돼 국민의 정보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해 고강도 개혁을 했지만, 여전히 국민 기대가 높다. 정보기관의 비밀스러운 활약이 영화·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되며 기대는 더욱 커졌다. 국정원 정예 요원들이 해외 곳곳에서 보이지 않게 국익을 지키고 있을 거라는 신비감마저 갖고 있다.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 경제 강국이자 군사 강국이며, 문화 강국으로도 부상하고 있다. 국민 기대에 부응해 정보 강국으로 도약할 때다.

정보 강국이 되려면 다각적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과학정보 역량 증대가 최우선적 과제다. 신흥 안보 대응과 해외 경제 정보 수집 능력 강화도 중요하다. 이와 함께 휴민트와 비밀공작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외교관 특권을 누리는 백색요원이나 국내 방첩 활동을 하는 경우는 나은 편이나, 해외 흑색요원 등은 거의 무방비 상태다. 국가 안보에 헌신하는 국정원 직원들이 열의를 갖고 일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성배 전 국가정보원 해외정보국장·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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