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중앙일보

[박정호의 시선] 디자이너라는 '권력자'

박정호 입력 2021. 10. 18. 00:36 수정 2021. 10. 18.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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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출판계에서 '북 디자이너 1호'로 통하는 정병규. 디자인은 소통이라고 믿는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021 부산영화제가 지난 주말 폐막했다. 임권택(85) 감독이 ‘아시아영화인상’을 받으며 행사를 빛냈다. 그는 “우리 무속을 소재로 한 영화를 찍고 싶었다”는 못다 한 소망을 내비쳤다. 임 감독을 집중 조명한『영화: 나를 찾아가는 여정』(2007)이란 책이 있다. 임 감독이 동국대에서 한 강의를 영화평론가 유지나가 책으로 묶었다. 임 감독 자신이 밝힌 영화와 인생이다.
이 책을 영화에 견줘본다. 주연은 임권택이지만 감독은 북디자이너 정병규(75)다. 정씨가 처음 건네받은 것은 원고와 기본적인 스틸컷뿐이었다. 책꼴을 갖추기에 재료가 부족했다. 정씨는 영화 장면을 캡처해서 싣기로 했다. 동료 디자이너가 세운상가를 뒤졌다. 임 감독 비디오를 몽땅 구해서 핵심 장면을 골랐고, 화면 농도를 일일이 조정했다. 임 감독 부인에게 요청해 관련 사진도 여럿 확보했다.


‘북 디자이너 1호’ 정병규 반세기


정씨는 공에 공을 들였다. 본문 테두리를 색색의 테두리로 둘러쌌고, 제목에선 굵은 직선을 강조했다. 빛과 카메라를 상징하는 장치였다. 정씨는 “리모델링 수준의 공사가 거의 신축 공사가 됐다”고 비유했다. ‘영화 임권택’이라는 장편 다큐멘터리를 완성했다.

거칠게 요약해 임권택을 대중에 각인한 결정적 작품은 ‘서편제’(1994)다. 이후 ‘춘향뎐’(2000) ‘취화선’(2002) 등에서 한국의 소리와 색채를 전 세계에 알렸다. ‘아다다’ ‘씨받이’ ‘아제아제바라아제’ 등 1980년대에 탐색한 구도(求道)와 정한(情恨)을 더욱 끌어올렸다. 그런 그가 새삼 무속을 꺼낸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미신과 기복을 넘어선 전통과 문화, 나아가 소통과 공감의 무속이 아닐까 싶다.
임 감독이 그랬듯 1980년대 문화판은 전통을 새롭게 인식했다. 탈춤·민속·무속 등을 재조명했다. 사진작가 김수남(1949~2007)도 그중 하나다. 『한국의 굿』 20권, 『한국인의 놀이와 제의』 3권, 『한국의 탈』과 『한국의 탈춤』,『아시아의 하늘과 땅』 등을 남겼다. 디자이너 정씨가 손발을 맞췄다.

정병규의 디자인 세계를 요악한 『정병규 사진 책』의 일부다. 활자와 이미지의 대화를 보여준다.

김수남과 정병규, 둘의 인연은 깊다. 김수남은 대학신문 연세춘추, 정병규는 고대신문 출신이다. 하지만 책 앞에서는 친구가 없었다. 칼자루를 쥔 ‘권력자’ 정씨는 사진을 과감하게 재단했다. 작가의 뜻을 존중하되 춤사위 현장감을 최대한 살리려고 했다. 물론 김씨도 “내 사진에 손을 대느냐”며 저항했다. 정씨는 “출판환경이 달랐던 그때 사진책 한 권을 낸다는 것은 작은 빌딩 하나 세우는 것과 같았다. 디자이너는 작가가 생각하지 못한 세계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큰 것은 작게, 작은 건 크게’ 원칙


정병규는 우리 출판계의 산 역사다. ‘북디자이너’ 1호로 통한다. 지난 반세기, 그를 거쳐 간 책이 5000여 종에 이른다. 그중 그가 남다른 애착을 갖는 분야가 사진책이다. 신간『정병규 사진 책』이 여러모로 뜻깊은 이유다. 1980년대 이후 그가 매만진 사진책 31종을 소개한다. 건축가 김중업, 사진작가 강운구·구본창, 소설가 조세희,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등도 등장한다. 디자이너 정병규론인 동시에 80년대를 축으로 한 한국문화 조감도다. 디지털 동영상 전성시대, 아날로그 활자와 이미지의 가치를 묵직하게 일깨운다.
『정병규 사진 책』 표지.
책 말미에 실린 ‘이미지 다루기의 19가지 법칙’이 인상적이다. 작가와 독자의 소통을 책임지는 디자이너의 책무쯤 될까. 그 첫 항목은 이렇다. ‘큰 것은 작게 하고 작은 것은 크게 하라. 이미지의 크기는 현실과 반대로 쓴다.’ 주어진 원고 그대로 쓰지 말라는 주문이다. 그래야 상상력이 살고, 독자도 끌어들일 수 있다고 한다. ‘기사가 끝날 때는 이미지를 크게 쓴다’도 흥미롭다. “공간이 남아서 빈대떡을 부쳤다는 생각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선 도전하는 이들도 되새기길


좌충우돌·우왕좌왕 대선 시즌, 이를 정치에 대입해본다. 정치인이든, 디자이너든 현실을 재료 삼아 새 세상을 열어야 한다는 점에선 닮았다. 일단 지금 후보 대부분은 디자이너로는 낙제생에 가깝다. 정권·이념 등 큰 것만 들먹이고 정책·대안 등 작은 것엔 소홀하다. 상대방 약점만 맹공하니 유권자의 상상력이 작동할 공간이 좁다. 여든 야든 호감보다 비호감이 압도적인 이유다. 판세를 가름할 메인(최종) 메뉴가 모호하니 식은 빈대떡만 놓인 밥상을 마주하는 것 같다.
정씨는 또 ‘삼각형 구도를 활용하라’고 권한다. 역동적인 공간을 창출하려면 이미지를 삼각형으로 배치하라고 말한다. 삼각형은커녕 좌우 균형도 잡지 못하는 후보가 태반인 현실이 씁쓸할 뿐이다. 대통령은 국가 디자이너다. 기초가 부실한 이들이 탄탄한 앞날을 그릴 수 없을 터, 때아닌 가을 한파가 더 시리다.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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