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단협의 교훈'과 '진심의 시간'

2021. 10. 18.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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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구의 새벽에 문득]

[김종구 (언론인)]
"어떻게 가져온 정권인데 야당에게 다시 내줄 수 있는가" "지금의 민주당 후보로는 정권 재창출이 불가능하다" "국민경선이 사실은 사기극이었다."

말의 시점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다. 2002년 제16대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를 놓고 '후단협'(후보단일화협의회) 사람들이 주장한 '후보 교체론' 어록들이다. 20년 가까운 세월을 지나 민주당에서 또다시 비슷한 모습이 재연될 조짐이 보인다. 새천년민주당을 더불어민주당으로, 노무현 후보를 이재명 후보로 치환한 '후단협 시즌 2'가 현실화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나온다.

민주당 경선 직후 제기된 '무효표 논란'은 이낙연 전 대표가 승복 의사를 밝힘으로써 일단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 전 대표는 이재명 후보 지원을 위한 적극적인 역할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앞길을 숙고하는 쪽에 아직은 더 무게를 두는 모습이다. "사필귀정" "정의가 살아 있다면 반드시 우리가 이긴다"는 등의 말도 이 전 대표 측근들 사이에서 공개적으로 나온다. 후보 교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민주당 분란은 2002년 후단협 사태와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대선 후보의 본선 경쟁력 의구심, 정권 재창출 위기론 등 당시 후단협 사람들이 제기한 주장은 지금 이 전 대표 쪽 사람들의 주장과 대동소이하다. 비주류 출신의 대선 후보에 대한 당내 주류의 마뜩잖은 시선도 똑같이 감지된다. 이낙연 후보 쪽 캠프는 이른바 '친문 주류' 인사들이 많았던 반면 이재명 후보 캠프에 참여한 의원들은 당내 주류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지금 민주당 주류의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면 2002년에는 비주류였다. 이제는 뒤바뀐 위치에서 비주류 대선 후보를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은 역설적이다.

현재와 2002년 후단협 사태 때와는 다른 점도 많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차이는 '대타 후보'의 성격이다. 2002년 당시 후단협 사람들은 대타를 민주당 바깥(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에서 찾았다. 반면 이낙연 전 대표 캠프 사람들이 희망하는 대타 후보는 이 전 대표다. 이것은 매우 결정적 차이점이다. 바꾸어 말하면 후보 교체가 이뤄져도 당내 이재명 지사 지지자와 이낙연 전 대표 지지자의 화학적 결합이 필수적 변수가 된다는 뜻이다.

이낙연 전 대표의 '꿈'이 현실화하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충족돼야 한다. 우선 대장동 개발 의혹 사건 수사에서 이재명 경기지사의 결정적 범죄 연루 혐의가 나와야 한다. 그래서 이 지사의 지지율이 급전직하로 떨어지고, 당내에서 자연스럽게 후보 교체론이 들끓어 이 전 대표가 후보직을 승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재명 지사 지지표까지 흡수해야 한다. 이것이 아마 이 전 대표가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희망적 시나리오'일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정치는 생물이고, 이번 대선은 워낙 돌출변수가 많으니 일단 예측은 유보하자. 다만 이 전 대표가 그런 '야망'을 품고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현명한 정치적 행보를 해야 한다.

이 전 대표에게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큰 정치인'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전 대표가 경선 이후 '무효표 처리 논란'을 제기한 것이나, 민주당 당무위 결정을 수용하고 나서도 자신의 정치적 앞날을 계속 고민하는 '작은 정치'를 하는 것은 안타깝다. 이 전 대표의 '정치적 훗날'도 결국은 '큰 정치'에서 열린다.

지금 이대로 가면 여당 내부의 상처는 치유불능 상태가 될 것이다. 이번 대선은 여당 지지층이 총결집해도 여당의 승리를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 가뜩이나 현 정권에 대한 실망감이 가득한 상태에서 '원팀 정신'마저 실종되면 결국은 '모두의 패배'로 끝날 공산이 크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으로 배어 나오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 영화 <역린>에서 '중용 23장'을 쉽게 풀어서 만든 인상 깊은 대사인데, 정치인들이 한 번쯤 새겨볼 내용일 듯 싶다.

이 전 대표가 정말 세상을 변하게 하고 싶다면 지금 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 해답은 자명하다. 성심(誠心)을 다해 정치의 정도(正道)를 걷는 것이다. 그래야 하늘이 다시 기회를 줄 때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이재명 지사도 마찬가지다. 2002년 대선에서 결국 노무현 후보가 승리한 것은 정몽준 대표와의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보인 승부사 기질이 바탕이 됐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제스처나 일시적 미봉책으로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 정성을 다해야 남을 감동시키고, 자신도 변하고 세상도 변화시킬 수 있다. 필요하면 난국을 돌파할 승부수를 던지는 것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역사란 그것이 의미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만 그 의미를 허용해주는 존재"라는 말이 있다. 후단협의 역사가 주는 의미와 교훈은 무엇인지 민주당 사람들이 다시 한번 깊이 성찰해야 할 시간이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전 대표가 14일 서울 여의도 대산빌딩에서 열린 이낙연 필연캠프 해단식에서 참석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종구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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