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갈아 물과 시간으로 만든 색.. 현대에 살아난 전통안료
“이렇게 진한 색을 내려면 칠하고 말리기를 몇 번이고 반복해야 하는 시간과의 싸움인데, 진짜 잘 나왔어요."
경기도 양평 가일전통안료 작업장에서 만난 김현승(58) 대표는 최근 새단장을 한 강원 동해 삼화사 무문전의 단청 사진을 보여주며 "올여름 비도 적게 와서 작업 환경이 조금 수월했던 것도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동해 삼화사는 문화재청이 2019년 시작한 '전통단청 시범사업' 대상 중 한 곳이다. 문화재의 단청을 보수할 때 조선시대까지 쓰던 전통 안료와 아교를 사용하도록 한 사업으로, 서울 종로 탑골공원의 삼일문, 가평 현등사에도 적용될 예정이다.
색색의 단청에 칠해진 안료를 만든 사람은 2008년부터 전통 석채(石彩)를 만들어온 김 대표다. ‘석채’는 ‘돌로 만든 색’이라는 뜻으로, 전통 단청과 불화(佛畵) 등에 쓰이는 전통 안료다. 그림이나 단청에 칠할 때는 아교에 개어 쓴다.
돌 갈아 물에 날린다… 굵을수록 진한 색
최근 찾아간 양평 작업장에선 ‘석청’ 제조 작업이 한창이었다. 가장 수요가 많은 색 중 하나다. 주먹만한 파르스름한 돌을 작두와 정으로 깨고, 돋보기를 놓고 하나하나 골라낸다. 골라낸 조각들 중 색이 진한 것들을 물과 함께 맷돌에 갈고, 갈아낸 가루를 물에 담가 여러 차례 옮겨담는다. ‘물에 날린다’는 한자의 뜻처럼 물로 가루를 흩어낸 뒤 입자의 크기와 비중에 따라 분류해내는 ‘수비(水飛)’ 과정이다.
물감과 같은 합성안료는 검정색과 흰색을 섞어서 색을 조절하지만, 석채는 돌가루의 입자가 크면 진한 색, 작을 수록 연한 색을 띤다. 김 대표는 “5㎛~100㎛ 크기의 입자들을 물에 한꺼번에 푼 뒤, 무거운 입자가 먼저 가라앉는 원리를 이용해서 큰 입자부터 먼저 뽑아내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이 작업은 기계로 할 수 없어 모두 사람이 직접 해야 한다.
종일 돌을 깨고 고르면 약 200~250g의 쓸만한 원석이 남고, 이걸 갈아낸 뒤 이틀간 가라앉힌 뒤에야 수비 작업을 할 수 있다. 두 달여의 수비 과정을 거쳐 10단계 색의 석채로 분류해낸다.
급식실 같은 스테인리스 작업장, 크록스 신은 작업자들
물을 부어가며 맷돌로 갈아내면 색을 내는 부분 외의 불순물은 시커먼 ‘땟물’로 같이 나온다. 수비 작업 전에 최소한 5~6번 넘게 씻어내야 깨끗한 가루를 얻을 수 있다. 종일 물을 쓰는 작업장은 온통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져 마치 급식실 같은 느낌을 풍겼다. 직원들도 모두 맨발에 고무로 된 크록스를 신고 작업을 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색은 석청(푸른색), 석록(녹색), 뇌록(암녹색), 경면주사(붉은색), 자황(노란색) 등이다.
물·시간·수작업, 원석 구하기도 난관
파쇄·돌 고르기는 사람이 직접 해야 하고, 이후는 오롯이 시간과 물이 드는 만큼 결과물이 나오는 작업이다 보니, 대량으로 값싸게 만들기가 어려워 석채는 g당 몇백원 꼴로 비싸다. 가장 비싼 석채는 하늘색과 보라색이 섞인 색을 내는 청금석 가루로, 1g에 7000원을 호가한다. 김 대표는 “물감 만드는 회사들도 석채를 만들려고 검토하다가 수지가 맞지 않아 관둔 걸로 안다”고 덧붙였다.
원석 구하기도 까다롭다. 조선시대처럼 대부분의 원석은 중국·일본 등에서 수입해오는데, 원석 수급이 끊길까봐 창고에 대량으로 쌓아뒀다. 국내에 묻혀있는 광물은 포항 지역에서 일부 나오는 뇌록석 뿐이지만, 그마저도 공단 건설로 묻혀버렸다.
단청 장인들도 몰라서… 숭례문 '썩은 아교'사태
지난 2008년 불에 탄 숭례문 복원 재료도 여기서 댔다. 당시 문화재청이 가루 형태의 합성 안료인 분채와 아교를 사용하기로 함에 따라 김 대표는 석채 대신 일본산 분채를 수입해 공급했다. 그런데 이를 공급받은 장인이 아교가 아닌 합성접착제를 사용했던 사실이 드러나 재판에 넘겨졌고, 아교를 잘못 사용해 썩기도 했다. 동물성 단백질로 만든 접착제인 아교는 하루 사용할 만큼만 녹여 쓴 뒤 폐기해야 하는데 그걸 모른 채 여러 날 사용했기 때문이다. 아교와 분채를 섞는 비율이 잘못돼 칠이 흘러내린 곳도 있었다.
김 대표는 “석채가 없던 시기가 100년쯤 이어지면서 단청장들도 ‘석채’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아예 배우질 못한 것”이라며 “문화재청에서 문화재 수리에 쓰는 매뉴얼인 ‘시방서’마저 합성안료와 아크릴본드를 사용한 수리법을 담고 있으니 전통색이 없어진 건 당연한 일”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합성안료로 칠한 단청은 약간 형광빛을 띠고, 시간이 지나면 빠르게 딱지처럼 떨어진다. 나무가 계절에 따라 늘어났다 수축하는 비율과, 합성안료가 수축하는 비율이 다르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채색 보존은 ‘원형재료, 원형복원’이 목적인데 세계문화유산 등재된 서원을 비롯해서 여러 문화재에 모두 아크릴본드와 금속발색체를 섞은 칠이 돼있었다”며 “시방서가 ‘합성안료’ 기준으로 만들어지면서 전통 채색이 잘 되어 있던 곳을 다 벗겨내고 합성안료로 칠한 곳도 많다”고 전했다.
숭례문 부실시공이 전통 단청과 안료 연구의 시초가 됐고, 내년에 새로 제작될 전통단청 시방서는 전통안료를 기준으로 쓰일 예정이다. 김 대표는 "단청장들도 아교와 석채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용해가며 전통안료를 익히는 중인데, 빠르게 적응하고 있어서 다음 현장이 기대될 정도"라고 전했다.
기록으로만 남았던 '석채'… 부동산 처분해가며 원석 쟁였다
김 대표는 해외에서 안료를 주문제작(OEM)하는 사업을 하며 일본·중국 등을 다니다가, “석채를 만드는 방법은 조선왕실 의궤에 상세하게 기록이 있어서 그대로 만들기만 하면 되는데 사라져가는 게 아까워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조선 중후기까지 내내 쓰이던 색들인데, 산업혁명 시기 이후 한 세대 이상 사라지면서 미술사학 연구자들도 색을 다 못 본 경우가 많았다”며 “기록대로 색을 복원한 뒤, 오방색의 과학적 분석값 등을 기록하고 분류하는 작업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에는 해마다 문화재청이 주최하는 '국제문화재산업전'에서 문화재 복원부문 유공단체로 선정돼 상을 받기도 했다.
단청장·불화장 등이 쓰는 전통 안료를 복원하는 작업이지만 석채를 만드는 일은 별도로 무형문화재로 지정돼있지 않다. 돌을 다루는 작업이다 보니 조선시대에도 '힘들고 천한 일'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김 대표는 “대단한 기술이나 감각이라기보단 단순 작업, 시간과 물을 쓰는 작업"이라며 “모두 수작업이라 가격이 비싸고 일반 수요가 적어 만드는 사람이 없었는데, 전통안료에 대한 관심이 조금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수정=숭례문 복원 작업과 관련해 애초 기사에서 김 대표가 재료를 공급했다며 전통 안료를 사용한 것처럼 표현한 부분은 사실과 달라 수정했습니다. 당시 문화재청이 가루 형태의 합성 안료인 분채와 아교를 사용하기로 함에 따라 김 대표는 석채 대신 일본산 분채를 수입해 공급했습니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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