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말한 게 왜 박근혜 배신인가" 유승민 결정적 순간 셋 [조은산이 말한다]

김태호 입력 2021. 10. 18. 16:56 수정 2021. 10. 1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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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의힘 경선주자 4人의 3가지 결정적 순간들

「 지난 8일 국민의힘 대선 경선 주자 4명이 결정됐습니다. 중앙일보는 논객 '조은산'의 목소리를 영상에 담아, 국민의힘 경선 주자들의 오늘을 있게 한 3가지 결정적 순간을 살펴봅니다. 윤석열-홍준표-유승민-원희룡 후보 순으로 싣습니다.

지난 12일 중앙일보 상암사옥을 찾은 논객 '조은산'은 국민의힘 경선주자 유승민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1 배신의 정치, 정치의 배신

국민의힘 대선 경선 주자 유승민 전 의원(이하 직함 생략)은 2015년 “왜 정치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거의 다 찾았다”고 했습니다. 2015년은 유승민이 여당 원내대표로 당선돼 ‘보수개혁’이란 오랜 꿈을 펼치려는 순간이었죠. 하지만 이때 유승민에겐 되돌릴 수 없는 시련이 찾아옵니다. 박근혜 대통령과의 정면 충돌입니다. 유승민의 정치 인생을 뒤흔든 첫 번째 결정적 장면입니다.

대통령 집권 3년 차, 유승민은 2015년 4월 8일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정부의 세금 부족을 인정하자”, “창조경제는 경제성장의 해법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야당에선 “우리나라 보수의 방향을 보여준 명연설”이라고 극찬했습니다. 하지만 정부 공약의 문제점을 지적한 여당 원내대표는 대통령에게 눈엣가시였습니다. 또 국회가 잘못된 정부 시행령을 바로잡을 수 있게 한다는 국회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박근혜·유승민 갈등은 극에 달합니다.

2015년 유승민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박근혜 대통령과 충돌했다. 이후 유승민은 '차기대권주자', '박근혜 배신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2015년 6월 25일 박근혜는 칼을 뽑습니다.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야 한다. 여당 원내사령탑이 어떤 국회 협조를 구했느냐”라며 유승민을 ‘배신자’로 찍었습니다. 정부와 엇박자 내는 여당 원내대표는 떠나란 말이었죠. 유승민은 당시 “내 귀를 의심했다. 등을 칼로 찌른 아픔을 느꼈다”면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배신이란 말이 왜 나왔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 정도는 예전부터 서로 알던 생각의 차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대통령 경고가 나온 지 13일 만인 7월 8일, 유승민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우리 헌법 제1조 1항의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대통령이 헌법을 어기며 왕같이 굴었단 말이었죠. “정치인생에서 가장 길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유승민에겐 ‘차기 대권주자’ 혹은 ‘박근혜의 배신자’라는 극단적인 평가가 쏟아졌습니다.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에게 맞선 자의 숙명을 짊어진 거죠.

유승민은 대통령과 마찰을 빚은 지 13일 만에 원내대표 자리에서 물러났다.

당시 유승민은 ‘진실을 말한 게 어떻게 (박근혜에 대한) 배신이냐, 권력 눈치 보느라 아무도 지적 안 한 걸 지적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배신이란 말은 여전히 그를 괴롭힙니다. 이번 대선 경선에서도 그는 ‘TK(대구·경북) 적통’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얻진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갈등은 유승민이 2005년 박근혜 비서실장을 맡았을 때 예고된 일이었습니다. “할 말은 다 하겠다. 조언이 거북하면 잘려도 좋다”라며 박근혜 비서실장을 맡은 유승민은 “당 대표 보좌진들이 왜 당 대표 사무실 말고 의원실에서 일하느냐”, “대선에 나갈 거면 정수장학회 이사장직을 관두라” 등 직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본격적인 갈등은 2011년부터 시작됐습니다. 유승민은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된 지 4개월 만에 자리에서 물러나며 박근혜 비대위 체제를 꾸리는 데 앞장섰습니다. 박근혜는 2012년 19대 총선과 그해 겨울 18대 대선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자리까지 내던진 유승민에게 돌아온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유승민과 가까운 사람들이 공천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는 말까지 나왔죠. 이후 2014년 6월 사드 배치 요구에 ‘3NO’를 외치며 침묵으로 일관한 박근혜를 비판한 일이나, 그해 7월 외교부 국정감사에서 문고리 3인방, 청와대 비서관들을 ‘얼라들’이라고 말한 것도 박근혜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자리 욕심을 내거나 부탁해본 적 없다. 자리와 자유, 둘 다 가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정치했다’는 유승민도 이런 ‘정치의 배신’에는 씁쓸했을 겁니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는 말이 ‘내쳐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을 겁니다.
#2 문제는 경제, 답은 정치에
냉혹한 현실 정치 한복판에 서기 전, 유승민은 약 13년간 KDI(한국개발연구원) 연구원으로 일한 경제전문가였습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그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겠다’는 각오로 ‘경제 위기극복 종합보고서’를 쓰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김대중 정부 인수위는 외환위기를 넘긴 한국 경제 개혁과제를 담은 이 보고서를 활용하기도 했죠. 이후 유승민은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주도한 ‘5대 재벌 빅딜정책’에 대해 “자발적 합의가 아닌, 관치 경제”라고 비판해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유승민은 1987년부터 2000년까지 KDI(한국개발연구원)에서 일한 경제 전문가다. 2000년 2월 여의도연구소장을 맡은 유승민은 이후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에 들어섰다.


그가 이름을 더 알린 건 1998년 11월,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였습니다. 클린턴은 유승민 등 한국 경제 전문가들을 불러 토론회를 열었는데, 유승민은 이 자리에서 “재벌 정책의 잘잘못을 짚고 균형을 잡자”, ”미국 정부는 지나친 간섭을 하지 말라” 등 발언을 해 KDI가 시끄러워졌다고 합니다. 유승민의 가족은 당시 한 언론 인터뷰에서 “(유승민이) 연구원을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출구를 찾다 보니 그랬던 것 같다”며 정치에 뛰어든 이유를 간접적으로 밝히기도 했습니다.

외환위기를 겪은 유승민은 ‘경제도 결국 정치가 결정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는 이런 그를 여의도에 데려옵니다. “괴로운 인생이 시작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는 유승민은 2000년 여의도연구소(여연) 소장을 맡습니다. 3년 반 동안 유승민은 여연에서 “정책 능력뿐만 아닌 정무적 판단능력까지 키웠던 보석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했지만,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2002년 16대 대선에서 패배하며 첫 정치적 실패를 맛보기도 했죠.

율사(律士) 출신이 대부분인 대선 주자들 가운데, 경제전문가 유승민은 그만의 강점이 있습니다. 진보 진영에서도 그의 경제정책 역량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가 내놓은 경제 정책에선 진보적 색채도 엿보이죠. 그는 부자 감세를 반대하고, 재벌개혁을 주장하고, 중(中)부담-중(中)복지를 주장합니다. 물론 유승민에게 ‘보수가 보수답지 않다’는 비판도 따르지만, 그는 ‘가난한 이들을 내버려 두는 건, 내가 꿈꾸는 보수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3. 대구를 버려야 산다? 유승민의 대구 딜레마
2002년 대선 패배로 한림대 강의를 맡아 살던 유승민은 2004년 한나라당 비례대표에 당선되며 여의도에 다시 돌아옵니다. 이후 애증의 지역, 대구와의 질기고도 긴 인연이 시작됩니다.

비례대표로 1년 남짓 지낸 2005년 10월, 대구에서 재보궐 선거가 열립니다. 당시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정부 실세이자 대통령 친구인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을 공천하죠. 박근혜와 김무성은 “선거에서 절대 질 수 없다”며 비례대표 유승민을 이 선거에 투입하기로 결정합니다. “당황스러웠지만 져도 그만”이라는 생각에 유승민은 출마를 결심하죠. 여당에선 유승민의 출마에 대해 “국회의원이 되려고, 국회의원을 사퇴하느냐”며 비판했지만, 결국 그는 선거에서 승리합니다.

현직 비례대표 국회의원이던 유승민은 2005년 대구 동구 을 재보선에 뛰어 들었다. 이후 대구에서만 내리 3선을 해 대구에서 정치적 기반을 닦았다.


이후 유승민은 대구에서만 내리 3선을 하며, 정치적 기반을 닦았습니다. 하지만 2016년 박근혜 탄핵은 유승민과 대구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박근혜 후광으로 대구에서만 3선을 했으면서 어떻게 박근혜를 배신하느냐’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2017년 대선 출마했을 때도 유승민은 대구에서 어려움을 겪었죠. 4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요. 최근 경선 과정에서 유승민은 대구를 찾아 “2~3년 전과 분위기가 다르다. 배신자라며 서운해하던 분들도 거의 없지 않으냐”라며 대구 민심을 얻기 위해 힘을 쏟았는데, 대구 민심에서 아직 완전히 앙금이 사라진 것 같진 않습니다.

유승민이 대구, 더 넓게 영남의 마음을 되돌리면 대선 후보에 올라설 수 있을까요. 이건 유승민의 딜레마입니다. ‘배신자’란 오명을 벗기 위해 대구 마음을 얻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이는 ‘개혁 보수’라는 정치적 목표를 이루는 데 또 다른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보수 개혁은 전통적 지지층을 벗어나 수도권 중도층의 마음을 얻어야 가능하니까요. 중도확장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는 유승민의 정책역량이 빛을 본다면 그의 마지막 대권도전은 성공할 수 있을까요.

김태호 기자 kim.taeho@joongang.co.kr, 영상=정수경·조은재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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