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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제야?" "눈물 난다".. 메르켈 연설에 놀란 독일 [이유진의 어떤 독일]

이유진 입력 2021. 10. 19.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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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어떤 독일] 16년 무게 떨치고, 동독 위로한 독일 통일 31주년 연설

[이유진 기자]

   
 10월 3일 독일통일 31주년 기념식에서 연설중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
ⓒ Bundesregierung 영상 캡쳐
   
"필요없는 짐"

한 인간이 태어나 살아온 수십 년의 삶이 필요없는 짐으로 규정됐다. 구동독 사람들의 삶이 그랬다. 독재일지언정 교육을 받고 노동을 하고 개개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형성해온 이들의 삶은 통일 후 필요없는 짐이 되어버렸다. 개인의 삶을 존중하지 않은 통일은 수많은 동독인들에게 상처로 남았다.

그동안 수차례 그런 불만이 흘러나왔지만 이번 만큼 묵직한 메시지는 없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3일 독일 통일 31주년 기념식에서 메르켈 총리는 16년 총리 인생에서 가장 감정적이고 솔직한 메시지를 꺼내놨다.

"1990년 10월 3일은 자유와 평화의 독일 통일 기념일입니다. 이 자유는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쟁취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통일을 기념할 수 있는 것은 동독에서 그들의 권리와 자유, 다른 사회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들 덕분입니다."

메르켈이 소속된 기민당(CDU)은 '독일 통일'을 당의 업적으로 평가해왔다. 1990년 통일 당시 헬무트 콜 총리는 '독일 통일의 총리' 혹은 '독일 통일의 아버지'로 불렸다. 역사는 일인자만을 기억하기에, 독일 통일이라는 업적 또한 콜과 콜이 소속된 기민당의 성과가 되었던 것이다.

장벽이 붕괴되기까지 새로운 세상을 외치며 목숨을 걸고 투쟁한 동독인들이 있었지만, 그 장면은 늘 동독 지역에서만 기억될 뿐이었다. 메르켈은 확실히 했다. 동독인들이 시발점이라는 사실을.

평가절하되는 동독인의 삶 

 "저는 제 개인적인 사례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지난해 말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이 CDU의 역사를 다룬 여러 논문을 모아 발행한 책의 한 구절에서 저를 언급한 내용입니다.

'동독 시절 35년 이력이라는 필요없는 짐(Ballast)을 가지고 전환기(장벽 붕괴 후)에 CDU에 들어온 그녀는 당연히 서독에서 초기부터 사회화된 CDU의 특성을 가질 수 없었다.'

독재와 억압적 국가 체제하에서의 35년 개인적인 삶, 동독 이력이 '필요없는 짐'이라고요?"

메르켈은 되물었다. 메르켈은 "총리로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동독 시민으로서, 동독에서 살았던 1600만 명의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메르켈은 통일 30년이 지나도 여전히 우월한 서독 삶의 양식으로 동독을 평가절하는 통일 독일의 현재를 비판했다.

이어 자신을 두고 '태어나지 않고, 속성으로 학습된 독일인'이라고 평가한 언론 보도도 소개했다. 

"오리지널과 날마다 소속을 새로 증명해야 하는 학습된 사람, 두 종류의 독일인과 유럽인이 있는 것일까요?"

메르켈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표정은 살짝 일그러졌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경계인과 이방인의 삶이 스쳤다. 독일인과 비독일인의 경계, 이 땅에서 태어났는데도 '오리지널'로 인정받지 못하고 소속과 정체성을 증명해야 하는 수많은 이민자들의 삶. 똑같이 생겼는데도 북한에서 왔다는 이유로 부정당하는 삶. 메르켈도 어쩔 수 없는 '오씨'(OSSIS, 서독 주민들이 동독 주민들을 비하하며 부르는 말)였던 통일 독일.
  
 베를린장벽 붕괴.
ⓒ 위키백과
"우리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본법하에서 행복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다양성과 차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위험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다양성과 차이는 생생한 자유의 표현입니다."

다른 삶에 대한 존중. 거기가 시작점이다. 통일 이후 동서독 주민 간에도, 독일 사회에 들어온 이주민과 난민들도, 그들을 받아들이는 독일인들에게도 필요한 자세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메르켈의 연설은 이례적이었다. 개인의 삶을 언급한 게 그랬고, 동독인 '오씨'로서의 정체성을 명확히 내보인 것이 그랬다. 이 연설에 많은 이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고 그 뜻을 해석하려 애썼다.

너무 늦은, 늦을 수밖에 없었던 메시지

베를린 지역 신문 <타게스 슈피겔>의 자비네 레네판츠 기자는 지난 15일 "며칠이 지났지만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통일 기념 연설에 대해서 계속 생각한다"며 "시간이 지날수록 '왜 이제야?'라는 생각이 든다"며 뒤늦은 메시지를 지적했다.

레네판츠 기자는 "지난 6년간 동독인들이 민주주의에서 멀어지고 극우 정당을 지지할 동안 그는 어디에 있었나? 그가 임명한 동독 담당관이 최근 동독 사람들이 독재사회화 됐다고 표현했을 때 그는 어디 있었나?"라면서 "메르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을 때 동독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비판했다.

늦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늦은 만큼 울림이 컸다. 메르켈이 16년간 통일된 독일과 서독 중심의 시스템, 남성 중심의 정치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버텨온 삶의 무게가 느껴졌다. 메르켈은 본인이 버텨온 무게를 떨치고 수많은 동독인들의 상처를 위로했다.

동베를린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베를리너 차이퉁>은 관련 칼럼을 시리즈로 실었다. 스스로 동독인임을 밝힌 안야 라이히 기자는 "(연설을 들으며) 울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다. 그가 이 연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용기를 냈을지 느껴졌다"고 했다.

독일 주간지 <차이트>는 메르켈이 '콜의 작품'으로 남아있던 독일 통일의 역사를 시민들에게 돌려줬다고 평가했다. 또한 "많은 동독인들이 좋든 싫든 동독 출신 메르켈을 통해 자신을 투영했다"면서 "우리는 언젠가 '모든 독일인의 동독 총리'가 그만의 방식으로 나라를 통일시켰다고 말할지도 모른다"고 썼다.

메르켈의 '가장 감성적인 연설'이 독일 통일 서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동독 출신 총리가 마지막으로 선 연설 무대가 독일 통일 기념일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긴 여정을 마무리 하는 동독 출신 총리의 마지막 메시지가 긴 여운으로 남는다.

"만날 준비를 하고, 서로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차이를 견뎌내십시오. 그것이 독일 통일 31주년의 교훈입니다. 우리는 모든 삶과 경험 그리고 민주주의를 존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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