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명 살해 혐의받고 도주..스카프 벗으니 '96세 백발 할머니'
지난 19일(현지시간) 독일 이체호 지방법원. 90대 여성이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모두 가린 채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들어섰다. 나치가 점령했던 폴란드 슈투트호프 수용소에서 폴 베르너 호프페 사령관의 수석 비서를 지낸 이름가르트 푸슈너(96)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18세 때 1943년 6월부터 약 2년간 나치에서 일하면서 1만1000명의 학살을 지원한 혐의를 받는다. 수십년 동안 재판을 받은 나치 전범 중 여성은 이름가르트가 처음이다.
법정에 들어선 이름가르트는 판사가 스카프와 선글라스를 벗어달라고 요구한 뒤에야 백발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이름과 주소만 확인한 채 재판관의 다른 질문에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법관을 바라보면서 기소 내용을 듣는 듯하던 그는 때때로 얼굴을 문지르거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설치된 투명 칸막이 너머로 법정을 둘러보기도 했다. 가디언 등이 이날 이름가르트의 변호사인 울프강 몰켄틴을 인용해 보도한 법정의 모습이다.
6만명 학살된 곳…“모든 서류 관리”
슈투트호프 수용소는 1939년 독일이 국경 밖에 세운 첫 민간인 강제수용소로 유대인과 폴란드 유격대원, 구소련 전쟁포로 등 28개국에서 10만명 이상을 수감하고 6만5000여명의 학살이 이뤄진 곳이다. 이곳에선 의사들로 위장한 나치 친위대(SS)가 수감자들의 키를 재는 척 나란히 세워두고 총을 쏘는 방법으로 2시간마다 30명씩 학살했다. 또 유독가스 방에 갇힌 수감자들은 머리카락을 뜯어내며 극심한 고통 속에 숨졌다.
푸슈너는 1954년 캠프에서 만난 상사 하인츠 푸르샴과 결혼해 독일 북부 슐레스비히에서 살았다. 전쟁이 끝난 뒤엔 성을 푸르샴에서 푸슈너로 바꿨다. 남편은 1972년 숨졌다. 푸슈너는 1954년부터 1982년까지 전 상사인 호프페 등 나치 친위대의 지도자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지만, 그때마다 “살인 사건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고 수감자들과는 접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고위 책임자와 같은 취급 분개”
이에 대해 푸슈너 측 변호사는 “푸슈너는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이제는 모두 숨져 세상에 없는 당시 나치 고위 책임자들과 똑같이 취급받는 사실에 분개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수용소에서 벌어진 끔찍한 범죄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궁극적으로 그가 개인적으로 범죄자라는 결론을 내고 혐의를 씌우는 재판을 거부하는 것”이라면서다.
원고 측은 푸슈너 측의 슈투트호프의 추도공원 방문 요청을 재고해 달라고 했다. 미국과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5명의 공동 원고를 대리하는 변호사 크리스토프 뤼켈은 “재판에 참여하는 이들이 직접 푸슈너가 매일 출근해서 봤을 가스실과 화장터, 교수대, 전방위적으로 수감자들의 비인도적인 처우가 이뤄졌을 모든 공간을 직접 보고 들어야 한다”며 “그 어떤 증거도 (추모공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지식을 대신할 순 없다”고 강조했다.
뤼켈 변호사는 “원고들은 푸슈너 못지않은 고령”이라며 “이제 그분들에겐 명확한 역사적 결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숨진 피해자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이렇게 전했다. “저는 아직 결승선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이번 재판은 이례적으로 촬영이 허용됐다. 도미닉 그로스 판사는 “나치 시대의 범죄와 관련해 세계적인 마지막 형사 재판”이라며 이 재판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했다. 푸슈너의 재판은 의료진 판단에 따라 하루 약 2시간으로 제한하는 조건으로 몇 달간 진행될 예정이다.
추인영 기자 chu.i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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