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조선일보

[김지수의 서정시대] 규칙 없음, 불만 없음, 선악 없음.. 넷플릭스 제국의 시민들

김지수 조선비즈 문화전문기자 입력 2021. 10. 2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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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오징어 게임' 합창.. 규칙·제약 없는 넷플릭스, 창작자 몰려
창작자를 통제하지 않는 대신 설계자가 수익 전부 갖는 게임의 룰
'불만 없음' 뽑아낸 유능함·공평함이 섬뜩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하나의 콘텐츠가 뜨면 지구촌의 매미가 동시에 울듯 반응의 ‘동기화’가 일어난다. 전 세계가 합창하듯 ‘오징어 게임’ 얘기다. 접속하는 순간 뜨는 특유의 강렬한 N자 로고를 볼 때마다, 나는 넷플릭스의 CEO 리드 헤이스팅스의 책 ‘규칙 없음’이 생각났다. 일명 ‘No rules rules’. ‘넷플릭스에 이익에 되어야 한다’는 규칙을 제외하고는 출근, 휴가, 예산, 계약, 절차, 승인 등 어떤 제약도 없다는 ‘규칙 없음’의 조직 문화. 자유와 책임 빼고 모든 통제는 다 없앴다는 넷플릭스 천국에 또 하나 없는 게 있다. 보너스다. 이미 보너스를 뛰어넘는 최고 수준의 연봉을 줬고, ‘먼저 확실한 보상을 받을 때 최고의 창의성이 발휘된다’는 것이 이 회사 CEO의 판단이다. 그런데 그 룰을 넷플릭스 바깥에 적용하자 목마른 창작자들이 넷플릭스의 놀이판 안으로 몰려들었다.

/일러스트=이철원

2017년 넷플릭스에서 한국에 처음 투자한 영화 ‘옥자’가 생각난다. ‘옥자’는 넷플릭스가 560억원을 투자하고 브래드 피트가 세운 플랜B가 제작했다. 봉준호는 “’옥자’가 가진 모험적인 측면을 보면 내가 투자자라고 해도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감독으로서 100% 통제권을 받으면 책임감이 무서울 정도로 커진다”고 했다. 콘텐츠 최고 책임자 테드 서랜도스는 사랑에 빠진 표정으로 말을 보탰다. “봉준호와 함께 일하는 건 꿈꾸는 것 같았다”고. “창의력을 가진 사람에게 그것을 발휘하는 여지를 준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이 얼마나 우아한 파트너십인가! 넷플릭스가 ‘봉 잡은’ 효과는 놀라웠다. 수퍼 돼지와 산골 소녀의 러브스토리는 칸 영화제에서 스트리밍 영화의 정체성 논쟁을 끌어냈고, 이후 봉준호는 상업적으로 더욱 정교해진 ‘기생충’으로 영화계 챔피언스 리그에서 정점을 찍었다.

‘옥자’ 이후 영화는 더 이상 극장의 전유물이 아니다. 창작자들은 자국의 미디어, 자본의 프레임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었다. 플레이어를 통제하지 않는 대신, 수익은 전부 설계자가 갖는 넷플릭스의 게임의 룰은 어마어마한 자력으로 전 세계 최상위 콘텐츠를 빨아들였다. 로컬 문화를 이국적인 앵글로 흡수해온 디즈니 제국의 다양성 전략과 달리 넷플릭스 제국은 아예 로컬 그 자체를 전면에 내세웠다. 로컬은 뜨거운 에너지와 새로움의 얼굴로 플랫폼을 달궜다. ‘길 위의 셰프들’ ‘종이 인형’ ‘킹덤’ ‘D.P.’…. 나 또한 호기심과 도파민이 범벅된 채 이 즐거운 개미지옥에 빠져 허우적댔으니. ‘경쟁 상대는 오직 수면 시간’이라는 그들의 공언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무한 자유를 주는 대신 메가 히트와 ‘불만 없음’을 뽑아내는 이 플랫폼 제국의 유능함과 공평함이 섬뜩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유년과 성년, 놀이와 노름, 현실과 판타지, 선과 악이 미묘하게 배합된 ‘오징어 게임’처럼, 우리 모두 ‘돈 많은’ 설계자가 디자인한 현란한 세트 속에서 영혼의 매스게임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무엇보다 돈과 관심이 최고의 종교인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에서 가장 손쉽게 도구화되는 것은 인간의 생명 감각이다. 창작자 입장에서 생명 훼손만큼 선명한 자극은 없기에, 신체는 자주 고깃덩이처럼 썰리고 뽑히며 전시된다. 시각과 촉각 자극이 셀수록, 타인의 생명을 느끼는 우리의 감각은 희미해진다.

기이하게도 ‘옥자’와 ‘오징어 게임’을 보면서, 나는 냄새를 맡은 기억이 없다. 동물 도살과 인간 학살의 시각적 폭격 속에서 단백질 타는 냄새, 피 냄새, 땀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게 신기했다. 냄새는 동류의 기억…. ‘한때 우리가 함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생명이었다’라는 감정의 뿌리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옥자’의 공장식 도살장, ‘오징어 게임’의 놀이터 같은 인간 도살장과 비교해 보면, 역설적으로 영화 ‘기생충’의 깊은 괴저택과 반지하, 영화 ‘미나리’의 아칸소 초원과 바퀴 달린 집은 얼마나 개별적인 생명의 냄새로 충만했던가. 가난의 냄새, 초원의 냄새, 피 냄새, 물 냄새, 하수구 냄새, 짜파구리 냄새, 할머니 냄새, 미나리 냄새….

때로는 분뇨가 역류하고(반지하) 물이 끊기는(트레일러) 험한 세상을 살아도, 우리가 사는 현실이 분홍빛 도살장은 아니다. 그래서 계속 질문해야 한다. 규칙 없음, 불만 없음, 선악 없음…. 넷플릭스 제국의 시민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그 자유와 오락의 윤리에 대해. 전 세계 학교들이 하나둘 핑크 솔저와 초록 트레이닝 병사들의 학살극에 주의보를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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