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격한 탄소 다이어트, 세계 경제 몸살났다

안상현 기자 입력 2021. 10. 22. 03:06 수정 2021. 11. 4.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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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탄소 경제, 빛과 그림자
그래픽=김의균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가 북서부 지역인 홍해 연안에 짓기로 한 신도시 개발 계획 ‘네옴(Neom)’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다. 5000억달러(약 590조원)라는 천문학적 예산도 화제지만, 태양광과 풍력 등 100% 신재생에너지로만 인프라가 작동하는 첫 탄소 제로(0) 도시이기 때문이다. 2030년 완공을 목표로 올해 중 첫 삽을 뜨는 네옴의 첫 도시 ‘더 라인(THE LINE)’은 총길이 170㎞에 10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도시지만, 지상 어디에도 도로와 자동차가 보이지 않게 설계된다. 사우디아라비아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자동차가 발명된 이후 도로가 아닌 사람(보행자)을 중심으로 도시가 설계된 건 처음”이라며 “모든 일상 편의 시설이 도보 5분 이내에 있도록 설계했다”고 밝혔다. 친환경 동력원으로 작동하는 화물·대인 운송 수단을 모두 지하에 두는 방식으로 생활 반경 내 도로를 없앴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려는 노력이 도시의 형태마저 바꿔버린 셈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신도시 개발 계획 ‘네옴’의 상상도. 올해 착공하는 네옴의 첫 도시 ‘더 라인’은 도로와 자동차를 없애고 모든 도시 인프라가 100% 신재생에너지로 운영되는 탄소제로 도시로 설계됐다. /인사이드 아라비아

탄소 중립을 위한 글로벌 대응이 본격화하면서 화석 연료를 기반으로 성장해 온 세계경제 역시 위기와 기회, 변화가 혼재된 대격변의 시대를 맞았다. 인류의 공멸을 막아야 한다는 당위론에는 누구나 공감하지만, 탄소 중립 목표를 어떤 식으로 달성할지,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비용을 누가 감당할지를 놓고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이제 막 발걸음을 뗐을 뿐인데도 부작용도 만만치 않아 전 세계가 몸살을 앓는 중이다.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인류는 탄소 중립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까.

◇탄소 중립 비용 50조달러

탄소 중립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전인데도 탄소는 이미 돈이다. 파리기후협정 이전 체제인 교토의정서 때 채택된 탄소배출권 거래 제도를 통해서다. 규제 당국이 정한 총 배출 허용량 한도 내에서 각 기업이 할당받은 탄소 배출량을 기준으로 남거나 넘치는 부분을 서로 거래하게 하는 제도다. 지난해 유럽에서 2014억유로(약 276조원)어치가 거래된 것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2291억유로(약 315조원)어치 탄소가 거래됐다.

가속하는 기후 재앙

미국 전기차 업체 테슬라는 탄소배출권 덕을 본 대표적인 업체다. 캘리포니아 등 미국 13주(州)에서는 전기차 같은 친환경 자동차 생산량에 따라 제조 업체에 탄소배출권을 부여하는데, 테슬라는 이렇게 확보한 탄소배출권을 다른 기업에 팔아 작년 한 해에만 15억8000만달러(약 1조7400억원)의 수익을 거뒀다. 테슬라의 순수익이 7억2100만달러인 걸 감안하면 탄소배출권 판매 수입 덕분에 적자를 면한 것이다.

반대로 철강, 정유, 내연기관 자동차 등 탄소 배출량이 많은 분야의 기업엔 탄소가 곧 비용이다. 국내 매출 기준 상위 30개 기업이 지난해 탄소배출권을 사들이는 데 쓴 비용은 4353억원으로 전년 대비 77.2% 늘었다. 현대제철은 배출권을 사들이는 데 1571억원을 썼다.

하지만 파리협정에서 정한 탄소 중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비용에 비하면 이 정도는 ‘새 발의 피’다. 글로벌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2050년까지 전 세계가 부담해야 할 비용이 50조달러(약 5경90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화력발전소를 대체할 신재생 에너지 발전소를 건립하고, 내연기관차를 전기차로 대체하고, 수소 생태계를 구축하는 등에 드는 비용이다. 우리나라도 원자력 발전소 도움 없이 재생에너지만으로 탄소 중립을 실현하려면 약 1400조원이 소요된다는 연구가 있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철강·시멘트·석유화학 등 3개 업종만 해도 2050년까지 탄소 중립 비용이 최소 400조원 들어간다. 이런 비용은 결국 전기 요금이나 제품 가격 인상 등 형태로 대부분 소비자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

탄소 중립 목표는 가격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바꾸고 있다. 예컨대, 항공사의 탄소 저감 과정에서 항공기 비즈니스 좌석이 줄어들거나 사라질 수도 있다. 비즈니스 좌석은 공간이 크고 빈 좌석이 많아 이코노미석 대비 3배 많은 탄소를 배출한다. 탄소 배출량이 많은 기업은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아 망할 수도 있다. 가령 스웨덴 핀테크 기업 두코노미가 마스터카드와 협력해 만든 세계 최초 탄소 중립 신용카드 ‘두 블랙(Do Black)’에는 결제 상품의 탄소 배출량을 추적해 일정량을 초과하면 추가 결제를 차단하는 기능이 탑재됐다.

탄소는 세계 무역 지형도까지 변화시킨다. 유럽연합(EU)은 오는 2026년부터 탄소 배출량이 많은 나라에서 수입되는 상품에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탄소국경세를 도입한다고 지난 7월 밝혔다. 미국도 ‘오염 유발국 수입세’라는 이름의 탄소 국경세를 논의 중이다. 한국은행은 EU가 탄소 배출량 톤당 50달러의 탄소국경세를 물리면 우리나라 수출은 연간 0.5%(32억달러) 줄어들 것으로 분석했다.

돈으로 변한 탄소

◇탄소 중립 첫 단계부터 부작용 속출

앞으로 써야 할 막대한 비용과 별개로, 탄소 중립 초기 단계부터 부작용이 속출하며 회의론도 높아지고 있다. 대표적인 복병이 ‘녹색경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원자재 가격이 급등해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는 ‘그린플레이션(greenflation)’이다. 신재생에너지에 필수적인 원자재 중 하나인 구리 가격은 현재 t당 1만달러대(런던금속거래소 기준)로 작년 초 저점보다 두 배 이상 올라 사상 최고치를 기록 중이다. 태양광 패널이나 풍력 터빈 등 신재생에너지 발전소는 기존 화력 발전소보다 최대 6배 많은 구리가 소모된다. 루치르 샤르마 모건스탠리 수석 전략가는 “지난 18개월간 각국 정부가 새로운 녹색 지출 계획과 공약을 발표하면서 구리 수요 전망치가 계속 늘었다”면서 “녹색 규제는 공급을 줄이면서 수요는 자극하는 방식으로 그린플레이션을 촉진한다”고 분석했다. 알루미늄 역시 전 세계 생산량의 약 60%를 차지하는 중국이 탄소 중립을 이유로 공장 가동을 중단시키자 가격이 작년 저점 대비 75% 올랐다.

천연가스 가격 급등에도 탄소 중립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석유나 석탄보다 탄소 배출량이 훨씬 적은 천연가스는 탄소 제로 체제로 가는 교두보처럼 쓰이는데, 세계 각국의 탄소 배출량 저감 노력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면서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한 것이다. 천연가스는 차세대 친환경 에너지원으로 꼽히는 수소 생산에도 쓰인다. 전력 생산량의 23%(2019년 기준)를 천연가스에 의존하는 EU의 경우 올 들어 천연가스 가격이 5배로 올랐다.

탄소 중립 정책은 심지어 식료품 가격도 자극하고 있다. 블룸버그는 “영국에선 이산화탄소 부족으로 경기 침체를 걱정하는 상황”이라며 탄소를 자주 쓰는 식품 업계를 예로 들었다. 돼지와 닭을 기절시키는 도축용, 박테리아 형성을 방지하는 농산물 포장용, 탄산음료·맥주 제조용, 드라이아이스 제조용 등 다양한 용도로 탄소가 쓰이는데, 최근 탄소 중립 정책 여파로 탄소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식료품 가격을 끌어올린 것이다. 지난 8월 영국 식품 가격 지수는 1년 만에 최고치로 상승했다. 조지 유스티스 영국 환경부 장관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식품 및 음료 제조 업체는 앞으로 탄소에 지금보다 5배 비싼 가격을 지불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이런 비용 상승과 부작용으로 인한 고통을 감수하고 탄소 배출량이 줄어든다면 그나마 성과를 냈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국제 환경 싱크탱크 기후투명성(Climate Transparency)은 지난 14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의 약 75%를 차지하는 G20(주요 20국)의 올해 탄소 배출량이 전년 대비 4% 반등할 것이라고 추산해 충격을 줬다. 작년에 6% 줄었던 탄소 배출량이 세계 각국의 탄소 중립 선언에도 불구하고 되레 반등한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는 올해 G20 국가들의 석탄 소비량이 증가하면서 벌어졌다. 셰일가스 천국인 미국조차 올해 석탄 사용량이 5억3690만톤으로 전년 대비 23% 이상 급증할 전망이다. 미국의 석탄 사용량이 증가한 건 2013년 이후 처음이다. 최근 백신 접종에 따른 경기 회복과 함께 중국·유럽 등지에서 발생한 에너지 공급난으로 석유와 천연가스 같은 발전용 연료 가격이 급격히 치솟자 상대적으로 저렴한 석탄 사용량을 늘린 것이다.

◇탄소 중립 실현의 희망, 탄소 포집 기술

탄소 중립이 불러온 대혼란의 맞은편에서는 기술 혁신과 새로운 산업의 기회가 싹트고 있다. 전기차와 이차 전지 배터리, 수소경제 같은 산업은 저탄소 경제 전환이 불러온 대표적인 신산업이다. 최근엔 이산화탄소 포집 및 저장 기술(CCUS)이 탄소 중립을 실현할 핵심 산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탄소를 흡수하면서 포집된 탄소를 합성연료(e-fuel)나 드라이아이스, 반도체 세정액 등 원료로 재활용해 산업 전반의 에너지 효율을 높여주는 기술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70년 세계 탄소 배출 절감분의 15%가 CCUS 기술로 이뤄질 것”이라며 “CCUS 없이 탄소 중립 달성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내다봤다. 기업들의 투자도 한창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는 “세상을 뒤흔들 혁신 기술”이라며 이 기술을 가진 캐나다 환경 기업 카본엔지니어링에 투자했고, 세계 최대 석유 기업인 사우디 아람코는 자동차와 트럭을 활용한 모바일 CCUS 등 기술 개발에 나섰다. 테슬라 CEO(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는 지난 4월 말부터 약 4년간 탄소 포집 기술을 모집하는 ‘탄소 포집 기술 대회’를 개최하며 총상금 1억달러(약 1100억원)를 내걸었다.

탄소 포집 및 저장 기술(CCUS) 개념도

탄소 포집 기술은 이미 여러 분야에서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스위스 환경 기업 클라임웍스는 지난달 8일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직접 흡수해 저장하는 공장을 세계 최초로 가동하기 시작했다. 오르카(Orca)로 불리는 이 설비는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외곽에 설치돼 연간 4000t에 달하는 탄소를 흡수한다. 나무 200만그루가 연간 흡수하는 양과 맞먹는다. 오르카는 탄소배출권 거래 제도를 이용해 포집·격리된 탄소를 t당 1200달러에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MS와 세계 2위 재보험사 스위스리, 아우디, 쇼피파이 같은 글로벌 기업들과 연거푸 구매 계약을 체결하며 향후 12년치 탄소 흡수량을 거의 매진시켰다. 클라임웍스 측은 “10배 더 큰 시설에 대한 설계 작업을 시작했다”며 “10년 내 연간 수백만 톤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고 했다.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 인더스트리아크는 CCUS 시장 규모가 올해부터 연평균 29.2% 성장해 2026년에는 253억달러(약 30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농업 분야에서도 탄소를 땅에 묻어 얻은 탄소배출권을 판매하는 탄소 농업(Carbon farming)이 신산업으로 주목받는다. 탄소 농업의 기본 원리는 토양을 탄소 저장고로 삼는 것인데, 수확을 마친 뒤 잔재물을 땅에 묻으면 미생물 분해를 촉진하고 이를 통해 탄소를 수십 년간 땅속에 저장할 수 있다. MS, IBM, JP모건 체이스, 바클리 등 세계적 기업들은 이미 토양 탄소배출권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탄소 중립이 국제 경제의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 잡으면서, 한국 역시 탄소 중립을 지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탄소 집약적인 제조업 비율이 높은 만큼 원전 등을 활용해 저탄소 전환 비용을 줄이고 산업 경쟁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상원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산업 부문 탄소 중립 달성 여부는 결국 CCUS 같은 혁신 기술 개발과 적용에 달렸다”며 “기술 개발에 시간이 걸리고, 그동안 설비 투자와 탄소 배출 비용 증가로 기업 경쟁력이 무너질 수 있는 만큼 정부의 세심한 정책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탄소 중립

인류가 배출한 이산화탄소만큼 흡수하는 대책을 세워 순배출량을 ‘제로(0)’로 만드는 것. 2015년 채택된 파리기후협정을 통해 본격화됐다. 2100년까지 지구의 평균 기온 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 이하로 제한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2030년까지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2010년 대비 45% 감축하고, 2050년에는 탄소 순배출량을 제로로 만든다는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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