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필치로..엑스레이처럼 인간 내면을 꿰뚫어 보다

이한나 2021. 10. 22.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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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신표현주의 거장' 게오르크 바젤리츠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 열고
11월 27일까지 개관전시
코로나때 작업 선보여
동독 출신으로 서독 망명
피카소 영감받아 다양한 시도
20세기 후반 미술계 선도
독일 신표현주의 거장 게오르크 바젤리츠가 코로나19 시기에 집중한 작품 `hotel garni`을 검정 캔버스에 판화처럼 찍어내는 방식으로 제작해 국내에 선보였다. [사진 제공 =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로서는 흔치 않은 2층 계단에 올라 입장하니 비슷비슷한 검정 캔버스 배경의 유화들이 죽 늘어서 있다. 가톨릭 성당 좌우 벽에 도열된 '십자가의 길'을 연상시킨다.

첫 작품 '욕실이 있는 조용한 방'은 엑스레이 화면을 거꾸로 든 것만 같은 형상의 굽은 인체도다. 주제를 추상화하고 낯설게 만들지만, 강렬한 표현주의적 필치로 대상의 핵심을 꿰뚫어 보여준다. 인체 주변에 무심히 흩뿌려진 물감 탓인지 물속으로 한없이 침잠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인간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물감 범벅이라 눈·코·입 식별도 안 되고 무릎을 굽혀 매달린 듯한 형상이 왠지 모를 내면의 고통과 우울감을 뿜어내는 듯싶다. 다만 검정 바탕과 대조되는 밝은색-하얗거나 자줏빛-은 인간 자체에게 집중하게 만들어 존재감을 두드러지게 한다. 불교의 소신공양(燒身供養)으로 만들어졌다는, 김동리의 단편소설 '등신불'도 떠오른다.

독일 20세기 후반을 지배해온 사조로 꼽히는 신표현주의의 대가 게오르크 바젤리츠(83) 작품이다. 1969년부터 거꾸로 된 인물상을 그려 유명한 그가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을 묵묵히 견디며 올해 완성한 신작 회화와 드로잉 각 12점을 한국에서 처음 선보였다. 11월 27일까지 서울 한남동에 이달 초 새로 개장한 타데우스 로팍에서다. 1983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시작한 이 화랑은 런던, 파리, 잘츠부르크 3개 지역에서 화랑 5곳을 운영 중인데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 지점을 냈다.

독일 신표현주의 거장 게오르크 바젤리츠가 코로나19 시기에 집중한 작품 `Einzelzimmer, Einzelbett`을 검정 캔버스에 판화처럼 찍어내는 방식으로 제작해 국내에 선보였다. [사진 제공 = 타데우스 로팍]
2전시실로 이동하면 전시 가장 마지막에 이번 전시의 주제작이라 할 수 있는 '가르니 호텔(hotel garni)'이 등장한다. 프랑스어로 저가호텔을 의미하고 한국식으로는 러브호텔로 칭한다. 기존 그림들과 달리 좀 더 화려한 색감이 더해져 여성임이 드러난다. 다만 군데군데 빨간 붓질은 화려한 화장 같기도 하고 피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의 뮤즈인 아내 '엘케'를 그린 것이다. 작가는 본인 작업이 "의미 있는 타인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작가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할수록, 본인의 자아가 끄집어져 나오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평소 파블로 피카소에게 영향을 받았음을 강조했던 바젤리츠는 피카소의 입체주의 전환을 알리는 대표작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나타난 대치적 구성과 비관례적 여성성을 소환해 본인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는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아비뇽' 연작을 통해 1960년대부터 탐구해온 피카소, 장 뒤 뷔페 등에게 영향을 받은 예술적 접근법을 선보였다.

바젤리츠는 10월 20일부터 퐁피두센터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할 정도로 국제적 명성을 떨치는 원로 작가다. 지난 60여 년에 걸친 작업에서 정형화된 양식에 갇히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며 독일 미술의 정체성을 세운 작가로 인정받는다. 그의 작품은 마치 에드바르 뭉크와 오토 딕스, 빌럼 드쿠닝 등을 연상시키는 주제와 표현으로 다채롭다. 서울 전시에서 선보인 회화들은 '전환(Transfer)' 방식을 시도해 로이 리히텐슈타인 작품처럼 밝고, 또렷하며 과감한 색채를 드러낸다. 아이들 그림처럼 단순화한 그림을 작업한 뒤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에 검정 캔버스에 판화처럼 찍어내는 방식으로 예측할 수 없는 우연성을 작동시킨다. 가까이에서 보면 물감의 질감이 흥미롭다.

김남인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바젤리츠는 독일 모더니즘 추상의 한계를 인식하고 매체의 순수성과 내용을 중시하는 일군의 작가 그룹을 주도했다"며 "그의 거꾸로 된 이미지는 단순한 추락으로 보이지 않고 곧 솟구쳐 오를 것만 같은 느낌을 전달해 감성과 직관으로 다가가는 모호함을 준다"고 전했다. 타데우스 로팍이 35년간 전속 인연을 맺어온 바젤리츠를 서울점 개막작가로 낙점한 것은 바젤리츠의 개인사와도 연결된다. 1938년생으로 동독에서 조형예술대학을 다니던 그는 피카소에게 영향을 받는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나 서독으로 왔고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펼쳤다. 여전히 분단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한국에서의 첫 전시도 이런 맥락이 고려됐다. 2007년 아시아 최초 개인전도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다.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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