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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 기다리며 한땀한땀 만든 '8일 미스터리'

남지은 입력 2021. 10. 22. 19:06 수정 2021. 10. 22.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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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남지은의 토요명작 리플레이][한겨레S] 남지은의 토요명작 리플레이 _ 화이트 크리스마스
10여년 전 편성조차 못 받을 뻔한
만듦새도 영상미도 남달랐던 작품
외딴 학교서 벌어진 의문의 사건
하얀 설원 배경 긴장감 압도적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명장면. 김용수 피디는 “시지 작업에 열중하느라 발자국마저 없애버린 걸 뒤늦게 알았다”며 웃었다.

만약, 10여년 전 이 작품을 두고 “너무 실험적이다” “대중성이 없다”며 편성을 거절했던 <한국방송>(KBS) 드라마국 관계자가 이 기사를 읽는다면, 당시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2011년 1월부터 3월까지 <한국방송 스페셜 연작시리즈>(단막극)에서 선보인 8부작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방송이 끝난 지 수년이 지난 최근 오히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드라마 팬들은 개인 블로그에 매년 성탄절이 가까워져 오면 “<화이트 크리스마스> 보는 계절이 다가온다”는 기대감에 부푼 글을 올리고, “내 평생 자랑은 (지금은 구할 수 없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디브이디(DVD)와 대본집을 가진 것”이라고 쓰기도 한다. 제목처럼 8부 내내 새하얀 눈과 함께 하는 드라마다.

눈처럼 신비스러운 화면 속에 담긴 내용은 묘하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외딴곳에 있는 기숙형 입시 명문 고등학교에서 1년에 딱 한번 있는, 12월25일부터 시작되는 8일간의 방학 동안 일어나는 미스터리물이다. 학교에 남아 있던 학생 8명과 선생 1명, 그리고 교통사고로 다쳐서 도움을 구하려고 학교에 찾아온 정신과 의사가 극한의 상황에 몰린다. 학생 8명 중 7명은 방학 전날 누군가에게서 협박 편지를 받고 학교에 남았다. 편지를 보낸 사람을 찾는 과정에서 서로를 의심하고, 정신과 의사와 학생들 사이에서 오가는 심리적 긴장감이 더해지며 재미를 준다.

이수혁의 드라마 데뷔작. 작품 속 역할이 굉장히 잘 어울린다. 한국방송 제품.

한 폭의 그림 같은 감각적 영상

박연선 작가는 기획의도에서 “악인은 만들어지는 걸까, 타고나는 걸까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했다. 고등학생으로 정한 이유는 “가능성과 불안이 공존하는 시기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고립된 공간에 놓인 아이들이 악을 만나 고민하는 상황들이 여러 생각이 들게 한다.

연출자 김용수 피디는 지난 21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대본을 읽고 그냥 너무 재미있어서 하고 싶었다”는데, 그가 말하는 ‘재미’에는 여러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지문을 읽으면 머릿속에서 바로 영상이 그려졌다. 장면이 여러 말을 대신하는 것도 좋았고, 이야기도 독특하고 개성 있었다. 고등학교가 배경인데 청소년물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도 새로웠다. 작가가 대본에 상황을 적어놓은 지문들이 굉장히 시적이었다” 등등.

이런 사항들이 낯설어 그 시절에는 방송사에서 환영받지 못했지만, 이제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오티티·OTT)로 다시보기 한 이들을 빠져들게 하고 있다. 김용수 피디는 “지상파 3사가 드라마를 주름잡던 2011년만 해도 속도감 없는 드라마는 시청률 싸움에서 경쟁이 안 됐다. 이 작품도 단막극 중에서도 시청률이 잘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연선 작가가 16부작 미니시리즈로 준비했다가 편성이 안 됐던 것을, 김용수 피디가 회사와 작가 사이에서 설득과 조율을 거쳐 겨우 8부작으로 만들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등장한 이솜. 한국방송 제공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감각적인 작품이다. 음악은 물론이고, 기숙사 내 거울의 개수, 카메라 각도까지 모든 것에 다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3부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들끼리 모여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는 타이트 컷을 주고받다가, 내레이션이 나오면 큰 화면으로 바뀐다.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장면은 아주 객관적으로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김용수 피디는 말했다. 상황과 심리에 맞는 적절한 곡이 등장하는 것도 작품에 빠져들게 한다. 전체 8부작 중 30여곡이 사용됐다. 1~2회 엔딩에서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톡식’이 흐르는 건 의아하면서도 귀를 솔깃하게 한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보며 어떤 감정을 갖게 되셨든지, 마지막에는 그것으로부터 깨어나길 바라는 의미의 장치다.” 김용수 피디는 음악 시간에 맞게 장면을 편집하기도 하는 등 선곡에 신중하기로 유명하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아이디어를 얻기보다는 틈만 나면 미술관에 가고 공연을 보고 음악을 듣고 쌓아둔 자산을 작품에 쏟아붓는다.

그래서일까. 이 작품 역시 영상미가 뛰어나다. 하얀 눈 위에 쓰러진 은성(이솜) 옆에 붉게 번지는 피, 몇초 동안 정지된 듯 정적만 감도는 화면과 색감 등은 지금 봐도 10년 전 작품 같지 않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의 작품 <죽은 예수를 애도함>에서 차용해 만든 장면도 있다. 그는 “메시지는 대사가 아니라 장면으로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피디다. 당시에는 호불호가 갈렸겠지만, 어떤가. 요즘에는 충분히 감각적이지 않은가.

<화이트 크리스마스>에서 ‘강미르’로 데뷔한 김우빈. 한국방송 제공

다시 보면 새삼 놀라운 점은 세트 촬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기숙사 방과 독방 정도이고 주요 배경이 되는 학교, 식당, 계단 등은 모두 실제 학교에서 촬영했다. 서울 은평구에 있는 지금의 하나고등학교와 목포 문태고등학교를 오갔다. 눈이 또 한명의 주인공처럼 내내 등장하기에 될 수 있으면 진짜 눈이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촬영했다고 한다. 하얀 눈 위에 쓰러져 있는 은성의 장면은 눈이 올 때까지 기다리다 보니 드라마 제작발표회 날 오전에 촬영했단다. “너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기다리면서 촬영해서 스태프들이 너무 힘들었을 거예요. 절 안 좋아했을 거예요. 하하하.”

김용수 피디의 직업의식 혹은 예술의식, 아니면 장인정신이라고 해야 할까. 덕분에 우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좋은 드라마를 10년이 지난 지금도 다시 볼 수 있고, 누군가는 이제라도 작품을 볼 수 있게 됐다. 비록 그는 “욕 많이 먹었다”지만.

김영광(사진), 성준, 이엘 등 지금은 스타가 된 이들의 신인 시절 모습이 눈길을 끈다. 한국방송 제공

“욕 많이 먹은” 장인정신

그의 노력으로 우리가 얻은 게 또 있다. 이 드라마가 그때 마니아가 생겼고, 지금 다시 보게 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출연자들 때문이다. 그때는 정신과 의사로 나오는 김상경과 백성현(박무열), 곽정욱(양강모), 김영광(조영재)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드라마를 처음 하거나 한두편 정도 한 신인이었다. 그게 누구냐. 김우빈과 이수혁, 성준, 이솜까지. 모두 지금 스타가 된 배우들이다. 처음엔 민호, 정용화 등 유명한 이들에게 구애했지만 막판에 가서 어긋나는 경우가 많았다. 김용수 피디는 “당시 인터넷 모델 카페에서 성준의 사진을 보다가 언뜻 김우빈의 사진을 보게 됐다. 개성 있고 느낌이 좋아서 둘 다 캐스팅했다”고 말했다. 극 중 음악을 하고 싶어 하는 윤수로 나오는 이수혁이 ‘미친미르’라는 별명이 말해주는 난폭하고 즉흥적인 성격의 ‘강미르’(김우빈) 역할을 하고 싶어 했다는 게 의외다. 이수혁은 그가 출연한 모든 작품을 통틀어 이 드라마에서 가장 멋지다고 말해주고 싶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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