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현대판 봉이 김선달을 만난다면

- 2021. 10. 22.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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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나락에 떨어진 사람들에
어느새 다가온 보이스피싱 마수
벗어나려해도 이미 범죄의 늪
약자들 울리는 기막힌 악순환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법무부 사회복귀과에서 발행하는 수용자 종합 문예지 ‘새길’을 보면 보이스피싱 범죄단체에서 나쁜 일을 하다가 교도소에 수용되는 사례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청하는 ‘용서의 글’ 코너에 투고된 수필 중 절반이 보이스피싱 단체에서 일하다 구속된 이들이 쓴 것이니 우리 사회에 보이스피싱이 얼마나 널리 성행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말해주는 사례이다.

보이스피싱 범죄단체가 조직원을 뽑을 때 우리가 나쁜 일을 하는 집단이라고 말하고 뽑을 리 없다. 다단계 판매회사나 건설업 하청회사, 소규모 배달업체, 유통회사 등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최근에 사업이 망했거나 빚을 잔뜩 지고 있는 사람에게 마수가 뻗친다. 도박하다 빚을 져 파산 직전 혹은 구속 직전에 이른 사람이 있다고 하자. 사채를 빌려 빚을 갚으면 그 사채가 눈덩이처럼 커질 것이 뻔하다. 이런 때 그 빚을 일부 갚아주면서 일을 같이 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오면 쉽게 조직원이 되고 만다. 취업준비생이 몇 년 동안 고생하다가 취직을 못 하면 벼랑에 몰린다. 그럴 때 접근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나중에 자신이 보이스피싱 범죄를 저지르고 있음을 알게 되어도 이미 조직의 늪에 깊이 빠져들었기 때문에 발을 뺄 수가 없다. 그는 결국 전과자가 된다.
이승하 중앙대 교수 시인
내가 아는 타 대학 교수가 보이스피싱에 걸려들어 1000만원인가를 날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정년 앞둔 대학교수라면 대단한 지식과 지성을 소유한 이로 오해하기 쉬운데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점에서는 군대에서 한생을 보낸 퇴역군인과 막상막하다. 그런 사람들이 노리는 첫 번째 타깃이 된다. 긴가민가하다가 아차 하는 순간에 내 통장의 돈이 남의 통장으로 들어가 있게 된다. 얼마나 말을 교묘하게 하는지, 사람을 세 치 혀로 녹였다가 얼렸다가 하는 모양이다.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같은 우리 옛말이 딱 들어맞는 것이 바로 이 범죄다.

봉이 김선달은 조선조 말 평양에 살았다는 희대의 사기꾼이다. 과거시험도 사기로 합격했다. 여름인데 솜옷을 둘둘 껴입고 시험장에 나타나자 시험관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물었다. 학질에 걸렸다고 하자 시험관은 병이 옮을까 무서워 멀찍이 떨어져서 경전을 외우라 했고,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도 않는데(이때 김선달은 대충 아무렇게나 중얼거리고 있었다) 얼른 쫓아버려야겠다 싶어서 그냥 바로 합격, 이렇게 해서 초시에 합격했다. 이후 중앙의 유력자를 찾아가 선물을 건네면서 말로 구워삶아 선달 합격증을 샀다고 한다. 봉이란 별명은 시장의 닭장수가 폭리를 취하는 게 못마땅해 닭을 봉황새 값으로 판다고 소문을 내 결국 닭장수가 관가에 잡혀가게 한 데서 붙여졌다.

최고의 사기는 대동강 물 사기 사건이다. 대동강 물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바람잡이인 물장수들에게 돈을 주고, 물을 퍼갈 때마다 돈을 돌려받으면서 상인들에게 보여준 뒤 상인들에게 대금 수천냥을 받고 강을 팔아넘겼다. 이후 상인들은 대동강 물세를 거두려다가 물을 퍼가는 사람한테 몰매를 맞았다고 전해진다.

이런 현대판 봉이 김선달이 뜻밖에 아주 많다. 우리는 그들의 세 치 혀에 현혹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눈을 뻔히 뜨고 있는데 코를 베어가는 사람들이라 다들 나름 똑똑하다. 영화 ‘스팅’의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퍼드는 갱 두목을 상대로 사기를 치니 속이 후련하였고, ‘케치 미 이프 유 캔’의 디캐프리오는 사기를 쳐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으니 귀엽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노숙인이나 장애인, 시골 노인 등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 보이스피싱 범죄가 빈번하니, 그들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다. 우리 각자가 그들이 서식할 물웅덩이를 제공하면 안 된다. 당신이 긴급한 상황에 처해 있다면서 도움을 주겠다는 이상한 내용의 전화를 받거나 수상한 문자를 보면 봉이 김선달을 떠올리자.

이승하 중앙대 교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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