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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유적탐방] 고대∼근대 유적 갖춘 강화도

- 입력 2021. 10. 22.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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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고대부터 근대까지 시대를 대표하는 역사 유적을 모두 갖추고 있는 지역이다.

청동기 시대 족장의 무덤인 고인돌은 강화도의 고천리, 교산리,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등에 분포돼 있는데, 부근리 고인돌이 대표적이다.

광성보에 소속된 용두돈대와 손돌목돈대는 현재에도 강화도를 대표하는 국방 유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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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광성보의 쌍충비각.
강화도는 고대부터 근대까지 시대를 대표하는 역사 유적을 모두 갖추고 있는 지역이다. 청동기 시대 족장의 무덤인 고인돌은 강화도의 고천리, 교산리,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등에 분포돼 있는데, 부근리 고인돌이 대표적이다.

고려시대 유적으로는 몽골과의 전쟁을 피해 피난 수도로 활용한 만큼, 고려궁궐 터, 팔만대장경을 간행한 선원사 터 등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도 국방상 요충지였던 강화도에는 유수부 건물, 왕이 임시로 거처한 행궁 등이 설치됐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史庫)도 있다. 1782년 정조는 도서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외규장각을 설치했다.

강화도는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국방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1866년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 함대와,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군 함대와 격전을 치른 곳이기도 하다. 신미양요는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 주민에 대한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다가 평양의 주민과 관군에게 화를 당한 사건을 핑계로 일으킨 사건이다. 1871년 5척의 군함과 1200명의 군대를 보내 강화도를 공격했다. 초지진, 덕진진에 이어 광성보마저 포위되면서 조선군은 고전했다. 광성보는 숙종 때 이후 강화도에 국방 시설을 확충하는 과정에서 용두·오두·화도 돈대 등과 함께 시설이 정비됐다. 영조 때에는 성문을 설립하고 안해루라 했다. 신미양요 당시 광성보를 지키던 어재연, 어재순 형제는 포탄을 피해가며 칼과 창으로 항전했지만, 200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전사했다.

현재 광성보 경역 안에는 어재연 형제의 순절을 기념하는 쌍충비각과, 순절한 군사의 시신을 모신 7기의 무덤이 남아 있다. 미군은 조선군의 완강한 저항에 수교의 뜻을 접고 20여일 만에 퇴각했다. 당시 미군이 퇴각하면서 가져간 조선군의 장수 깃발인 수자기는 2006년 14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광성보에 소속된 용두돈대와 손돌목돈대는 현재에도 강화도를 대표하는 국방 유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 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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