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27년째 봉인 중인 그 술 언제 맛볼 수 있을까?

한은형 소설가 2021. 10. 23.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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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오키나와의 술 아와모리

오키나와 요리책을 한 권 샀다. 아와모리를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와모리는 오키나와 술이다. 그래서 오키나와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졌다. 쌀로 만드는 증류주가 아와모리인데, 오키나와 쌀로 만들지 않는다는 게 재미있다. 안남미라고 하는 태국 쌀로 술을 만든다. 150년 전까지는 류큐 왕국이었다든가, 어찌어찌 일본이 되었지만 기미가요를 배우지 않는다든가 등 오키나와가 일본과는 다른 정서의 땅인 것처럼, 아와모리도 일본 술만은 아닌 것이다. 좀 다른 술이랄까.

아와모리는 일본 오키나와에서 만드는 증류주로, 태국산 안남미를 이용해 빚는다. /시키나 주조

이런 걸 알고 마셨던 건 아니다. 오키나와에 다녀오신 분이 한 병 주신 술이 아와모리였다. 한동안 제쳐놓았다. 처음 본 술에 흥미가 생기려면 병이라든가 이름이라든가 뭔가 와 닿아야 하는데 그런 게 없었다. 어느 날 그 술을 따고 깜짝 놀랐다. 아니, 이 술은… 뭐지? 계통을 잘 알 수 없는 술이었다. 일단 냄새부터. 콤콤한데 뭐라 말할 수 없이 맑으면서 동시에 단 냄새가 났다. 단데 축축하지 않고, 쾌적한 공기가 느껴졌다. 감로(甘露)라고 해야 하나. 단 이슬이 있다면 이런 냄새가 날 것 같았다.

화이트 와인의 색과 비슷하지만 좀 더 짙다. 잔을 이리저리 돌리며 색을 보다가 마셨다. 뭐랄까. 강한데, 맑았다. 일본 소주의 청량함, 중국 백주의 농후함, 거기에 싱글몰트 위스키의 정제된 부드러움, 이 모든 게 느껴졌다. 40도라는 도수가 믿기지 않게 부드러웠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강건한데도 우아할 수 있지? 모난 데가 없었다. 그래서 술술 넘어갔다. ‘술술 넘어가서 술’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의 주장에 가장 부합하는 술이라고 해야 할까.

알고 보니 아와모리는 내가 아는 술이었다. 오래전 신문에서 이 술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기업 회장이기도 한 프로야구 구단의 구단주가 오키나와에서 아와모리를 사 왔는데, 십 년 넘게 따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유는 우승 주이기 때문이다. 우승을 해야 마실 수 있는 술이 우승주다. 우승을 하지 못한다면 우승 주도 없는 것이다.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다. 구단주는 오키나와에서 전지훈련을 하고 있는 선수들과 아와모리를 마셨다. 우승 주였다. 그 해 이 프로야구 구단이 한국 시리즈에서 우승했던 것이다. 1994년의 일이다. 또 구단주는 말했다고 한다. 승리의 기쁨에 도취한 선수들과 아와모리를 마시며 말이다. 돌아오는 해에도 우승하면 이 술로 또 축배를 들자고. 그래서 돌아올 우승을 맞이하기 위하여 오키나와에서 아와모리를 샀는데, 이걸 아직 못 따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여전히 그렇다. 거의 삼십 년이 다 되어 가는데 말이다. 구단주는 세상을 떠났고, 술은 여전히 개봉되지 못하고 있다. 씁쓸한 이야기다. 해마다 프로야구 시즌이 되면 ‘야구단의 아와모리’ 기사가 딸려 나오고, 그 글은 꼭 이렇게 끝맺는다. ‘올해는 과연 이 아와모리를 딸 수 있을 것인가?’라고. 그리고 해당 구단의 건투를 기원하는, 팬들의 충심 어린 댓글들이 이어진다. 야구를 모르고, 해당 구단의 팬도 아닌 나지만, 그 댓글을 읽다 보면 바라게 된다. 아와모리가 이 해에는 열릴 수 있기를.

선물 받은 아와모리를 마시다가 야구단의 아와모리를 떠올렸다. 내가 마신 십 년산 아와모리도 이렇게나 맛있는데 야구단의 아와모리는 과연 어떤 맛일까 하고. 아와모리는 해가 더할수록 맛이 깊어지고 부드러워지는데, 야구단의 아와모리는 어떨까 싶다.

오래된 아와모리의 진가를 아는 것은 오래된 것과 오래되지 않은 것 모두를 마셔봤기 때문이다. 선물 받은 아와모리가 맛있어서 야금야금 먹다 보니 어느덧 끝이 보였다. 같은 술을 구할 수 없어 다른 아와모리를 한 병 구했다. 그런데 좀 그랬다. 오래전에 딴 술만 못했다. 맛이 없는 건 아니지만 향도, 맛도 좀 그랬다. 풋풋하긴 했지만, 어딘가 거칠었다. 역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술이 있는 것이다. 맛있는 술과 덜 맛있는 술. ‘덜 맛있는 술’을 먼저 마셨다면 ‘맛있는 술’이 되었겠지만 ‘더 맛있는 술’을 먼저 마신 덕에 ‘덜 맛있는 술’을 마시게 되었다.

선물 받은 술은 십 년 된 술이었고, 새로 산 술은 삼 년 된 술이었다. 삼 년 미만의 어린 아와모리를 ‘신주’로, 3년 이상 숙성시킨 아와모리는 ‘고주’로 부른다고. 그제야 보였다. 원래 마시던 아와모리 병에는 금박 스티커가 붙어 있고, ‘십년 고주(十年 古酒)’라고 쓰인 게. 둔탁해 보였던 검은 병도 자세히 보니 신묘했다. 화강암의 운모처럼 은근히 반짝거리는 게 용의 비늘을 형상화한 건가 싶었다. 구하기 어렵다고 하니 더 귀하게 느껴져서 이렇게 술병을 바라보고 있다.

아무래도 이 술을 비울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마시지 않는다고 해도 언젠가는 모두 사라질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계속 증발하기 때문이다. 오크통에 담긴 위스키들은 한 해에 1~2% 정도 날아간다고. 이렇게 증발하는 술을 스코틀랜드에서는 ‘에인절스 셰어(Angels’ Share)’, 즉 천사의 몫이라고 부른다. 야구단의 아와모리도 계속 증발하고 있다. 봉인 중이라고는 하지만, 27년째 그러고 있으니 천사에게 몫을 꽤나 바칠 수밖에. 그래도 아와모리는 오래 묵을수록 부드럽고 깊어진다고 하니 얼마나 맛있을지 짐작도 안 된다. 천사에게 바칠 대로 바쳤으니 이제 열릴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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