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전세계 흩어진 고려불화 170점 찾아.. 작품 있는 곳이면 달려갔다

허윤희 기자 입력 2021. 10. 23. 03:04 수정 2021. 10. 24.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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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관음도' 펴낸 정우택 교수
"숨막힐 듯 아름다운 예술의 극치"
170점 모두 조사한 佛畵 권위자
일본 가가미진자 소장 '수월관음도'. 비단에 채색. 세로 419.5㎝, 가로 254.2㎝ /정우택 교수 제공

일본 사가현 가라쓰시(市) 가가미진자(鏡神社)에는 고려불화의 백미로 꼽히는 ‘수월관음도’가 있다. 세로 419.5㎝, 가로 254.2㎝. 현존하는 고려불화 170여 점 중 제일 크고,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는 그림이다. 불화(佛畵) 연구자인 정우택(68) 동국대 명예교수는 “처음 본 순간 숨이 막힐 정도로 전율이 느껴졌다”며 “화려한 색채와 문양, 섬세하고 치밀한 묘사, 완벽하게 숙달된 기법 등 고려불화의 독창적 예술성을 최대치로 뽑아낸 명품이자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걸작”이라고 했다. 정 교수가 최근 이 한 점만을 집중 조명한 책 ‘고려 1310년 수월관음도-가라쓰 가가미진자’를 펴냈다.

-왜 이 그림을 택했나.

“우선 4m 넘는 크기에 압도되고, 누가 언제 발원했는지가 분명하다. 현재 그림상에는 없지만 일본인이 쓴 ‘측량일기’에 화기(畵記)가 남아있다. 1310년(충선왕 2) 왕과 숙비(淑妃·후궁 김씨)의 발원으로 9명의 화가가 참여해 그렸다는 내용인데, 제작 시기와 발원자, 그린 사람을 모두 알 수 있는 유일한 고려불화라 귀하다.”

-고려불화는 왜 위대한가.

“색이 화려해 보이지만 단순하다. 기본 안료는 붉은색·녹청색·군청색 세 가지 중심으로 썼다. 나머지 색은 전부 중복해서 쓴 거다. 관음보살의 붉은 치마 위에 투명한 베일이 걸쳐있는 부분을 보라. 엷은 분홍색인데 맑지 않나. 안료를 섞어서 분홍색을 만들면 색이 탁해지지만, 먼저 붉은색을 칠하고 그 위에 흰색을 덧칠한 뒤 금니(金泥)로 무늬를 그렸다. 색을 섞지 않고 계속 층을 만들어간다는 게 고려불화의 특징 중 하나다. 또 아주 작은 디테일도 대충 얼버무리는 게 없다. 오른쪽 아래 선재동자(善財童子)가 허리띠를 매고 있는데 문양까지 세밀히 그렸다. 1㎝쯤 되려나. 전체 그림에선 보이지도 않는 굉장히 작은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조화. 선(線)과 색(色)이 철저한 계획 아래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일본 가가미진자 소장 '수월관음도'의 세부. 관음보살의 붉은 치마 위에 투명한 베일이 걸쳐 있는 부분이 주목된다. 엷은 분홍색은 안료를 섞어서 만든 게 아니라 붉은색을 먼저 칠하고 그 위에 흰색을 덧칠해 나온 것이다. /정우택 교수 제공
일본 가가미진자 소장 '수월관음도'의 세부. 오른쪽 아래 선재동자가 서있는 모습의 허리띠 문양까지 세밀하게 그렸다. 전체 그림에선 보이지도 않는 굉장히 작은 부분이다. /정우택 교수 제공

-책을 낸 이유는?

“사람들이 고려불화가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추상적 감상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일반인들에겐 무엇이 아름다운지, 세부 도판을 최대한 많이 실어서 보여드리고 싶었다. 전공자들에겐 그림의 본질을, 모사본을 제작하는 이들에겐 원본의 구조를 알리고자 했다.”

정 교수는 원래 이론이 아닌 실기로 출발했다. 동국대에서 불교 미술 실기를 전공했고, 홍익대 대학원에서 조선불화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때만 해도 고려불화는 국내에 실물 한 점 없었고, 존재한다는 인식조차 없던 시절이다. 1978년 일본 나라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에서 열린 ‘고려불화 특별전’은 전 세계에 ‘고려불화’라는 장르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아, 내가 고려불화를 공부해야겠다. 조선 것만 해서는 우물 안 개구리밖에 안 되겠다 싶었다. 학교를 수소문하니 고려불화에 가장 정통한 학자가 규슈대에 있어서 그분한테 바로 편지를 썼다.”

1984년 서른한 살에 일본 유학을 떠났다. 그는 “처음에 얼마나 수모를 당했는지 모른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착 한 달 만에 교수가 사가현립박물관 회의에 같이 가자고 했다. 고려불화 ‘아미타팔대보살도’를 보여주겠다고. 그게 처음으로 본 고려불화였는데 히야~, 어찌나 치밀한지 가슴이 막 떨렸다. 그런데 교수가 작품 크기부터 재라는 거다. 가방에서 쇠자를 꺼냈더니 “야, 너 뭐 하는 거야?” 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더라. 천으로 만든 자를 쓱 내미는데 어찌나 부끄럽던지…. 한국에서 조사할 땐 조선 불화가 워낙 크니까 쇠자를 갖고 다녔는데 그게 작품에 얼마나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지, 조사의 기본도 몰랐던 거다.”

정우택 동국대 명예교수. 전 세계 흩어진 고려불화 170여점을 모두 실물 조사한 유일한 학자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전 세계에 흩어진 고려불화 170여 점을 모두 조사한 유일한 학자다.

“일본·미국·유럽 어디든 작품이 있는 곳은 한숨에 달려갔다. 그림은 유리창 너머가 아니라 아무런 방해물이 없는 상태로 관찰해야 하는데 고려불화는 대다수가 해외에 있어 이런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다. 특히 일본 사찰에선 불화가 미술 작품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라 외부인에게 공개하는 걸 꺼린다. 40년 가까이 일본의 사찰, 박물관, 미술관 관계자들과 신뢰를 쌓아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열리는 학회엔 빠짐없이 참석했고, 아무리 먼 곳이라도 작품이 전시되면 반드시 찾아갔다. 그동안 일본 연구자들에게 쏜 술값만 집 한 채 값 될 거다(웃음).”

-일본에 있는 고려불화는 모두 일제강점기에 약탈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임진왜란 이후에 이미 국내엔 고려불화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후기인 14세기 말부터 15세기까지 상당수 고려불화가 일본으로 유출됐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대장경을 구하러 온 일본 승려와 사신에게 대장경 대신 범종 등 불교 유물들을 주었다고 하니, 이때 상당수가 선물로 건너갔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에 있는 건 무조건 약탈된 것이라는 인식도 양국 간 교류를 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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