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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운의 말걸기] "산재인정 11년8개월" 틀린 팩트가 주는 무력감

임자운 변호사 입력 2021. 10. 23. 20:15 수정 2021. 11. 08.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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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에 엄격하지 않은 인플루언서
글을 인용하는 언론의 신뢰까지 함께 무너뜨린다

[미디어오늘 임자운 변호사]

곽상도 의원 아들이 받았다는 산재위로금 44억.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분노하며 한마디씩 얹을 때 삼성 반도체 백혈병 사건이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호출됐습니다. 작가 진중권씨가 곽 의원 제명을 촉구하며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쓰면서 말이죠.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도 산재로 인정받는 데에 11년 8개월이 걸렸다.”

곽 의원 아들과 백혈병 피해 노동자 처지를 비교한 겁니다. 진중권씨는 CBS 라디오 방송에 나가서도 같은 말을 했더군요. 그리고 이 글은 (그의 SNS글이 통상 그렇듯) 여러 언론에 의해 기사화되기도 했습니다.

▲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 2017년 2월11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촉구 범국민대회 당시 보인 방진복 전시. 사진=변백선 '노동과 세계' 기자

11년 8개월?

그런데 이 '11년 8개월'이란 숫자는 크게 틀렸습니다. 이 사건을 처음 알린 고 황유미 씨가 사망한 때(2007년 3월)부터 시민단체 '반올림'과 삼성전자가 사과·보상 문제를 합의한 때(2018년 11월)까지를 계산한 것 같은데, 그 합의는 산재 인정과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산재 인정이 피해자 측과 회사 합의로 이뤄질리도 없고요. 더욱이 유미씨에 대한 산재인정 판결은 그보다 훨씬 전인 2011년 6월 처음 나왔습니다. 검색해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들입니다.

안타깝게도 종종 일어나는 일입니다. 거대한 마이크와 펜을 쥔 쟁쟁한 '인플루언서'들이 '팩트'를 무시하는 말과 글을 함부로 뱉는 일 말입니다. 언론은 또 그런 말들을 무분별하게 전파하고 있고요.

비슷한 사례가 최근 또 있었습니다. 칼럼니스트 노정태씨가 중앙일보에 기고한 글입니다. 글의 해악으로 치자면 진중권씨 글보다 훨씬 커보였습니다.

▲중앙일보 '저격' 코너에 실린 노정태 칼럼니스트의 글.

노씨 글은 '이탄희는 죽었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이탄희 의원을 저격했습니다. “이른바 '사법농단'의 내부고발자”로서 국회의원이 된 이 의원이 “이재명·권순일의 이권거래”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죠. 있을 수 있는 비판입니다. 문제는 그 비판 효과를 키우기 위해 '사법농단'과 이 의원의 관련성은 무리하게 부풀리고 사법농단 실체는 또 무리하게 쪼그라트렸다는 겁니다.

대법원 재판 개입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노씨는 “이탄희는 청와대 지시에 따라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재판 결과에 영향을 줬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사표를 냈다”고 썼는데, 이 의원은 그런 이유로 사표를 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법원행정처가 벌여왔던 '판사 뒷조사'에 항의하며 사표를 낸 것이었고,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은 그 이후에 알려졌죠.

또한 노씨는 “사법농단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의문도 던졌습니다. “알려진 재판거래의 전부”를 단 세 문장으로 요약한 후, “윤석열이 총괄한 수사였지만 대법원이 재판결과를 조작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검찰 수사라는 극약 처방에도 그런 사실을 밝혀내지는 못했다”고 썼죠.

하지만 그의 '재판거래 요약본'에는 정작 재판거래 실체가 가장 많이 드러난 사건들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이를 테면 대법원장과 청와대, 외교부, 심지어 가해기업 대리인들까지 함께 재판에 관해 공모한 사실이 드러난 '일제 강제동원 손해배상 사건', 법원행정처 지시대로 실제 재판 절차가 진행됐던 '가토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사건' 같은 것들 말이죠.

이미 공개된 임성근 전 부장판사에 대한 1, 2심 판결문만 보더라도 숱한 재판 개입 시도들이 적혀 있습니다. 그럼에도 해당 판사들이 무죄 판결을 받은 이유는 판사에게 다른 재판에 관여할 권한 자체가 없으므로 현행 '직권남용죄'로는 처벌할 수 없다는, 지극히 법리적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요컨대, '사법농단'에 대한 검찰 수사와 판결을 통해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 개입 사실은 꽤 많이 드러났다고 봐야 합니다.

'팩트'에 엄격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엄격하지 않은 언론

어떤 문제에 깊이 천착할수록 그 문제를 알리는 글을 쓸 때는 팩트에 대한 강박을 갖게 됩니다. 소소한 팩트 오류가 주장 전체를 취약하게 만들 수 있고 상대방에게 공격 빌미를 줄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삼성 백혈병 사건, 사법 농단 사건처럼 문제를 은폐하고 왜곡하려는 반대자들의 공격이 거셀수록 더 그랬고, 더 그래야 했습니다.

그뿐인가요? 잘못된 사실 관계가 동원된 주장은 관련자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습니다. 이를 테면 진중권씨의 '11년 8개월' 글은 산재 피해 노동자들에게 필요 이상의 무력감을 줄 수 있습니다. 노정태씨 칼럼은 사법농단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들, 즉 양승태 대법원이 개입한 재판의 당사자들에게 심각한 좌절감을 줄 수 있습니다. 이 사태가 제대로 규명되지 못하도록 여론을 호도할 수도 있고요. 글쓴이에게 그런 의도가 없었다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반올림)과 다산인권센터 등은 2017년 3월3일 수원 삼성전자 본사 앞에서 '故 황유미 10주기, 삼성전자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 집중행동' 계획을 발표하고 수원역까지 방진복 행진을 시작했다. 행진에는 지역 시민사회·노동단체 활동가, 학생, 일반 시민 등 70여명이 참여했다. ⓒ민중의소리

그래서 어떤 사안을 소재로 글을 쓰면서 관련 팩트를 마구 뭉개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아, 이 사람은 평소 이 사안에 별 관심이 없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누구나 삼성 백혈병, 사법농단 사건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맘에 들지 않는 정치인을 비판하기 위해 그 사건을 동원할 수 있고, 그 사건 실체에 의문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팩트에 근거해야겠죠. 검색만 좀 해봐도 알 수 있는 사실들인데 그조차 하기 싫다면, 그 사건을 언급하지 말아야 하고요.

특히 공론장에서 펜과 마이크를 쥔 사람들이라면 무엇보다 팩트에 엄격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언론은 팩트에 엄격하지 않은 사람들의 말과 글을 멀리하기 바랍니다. 팩트에 엄격하지 않은 글은 그 글을 인용하는 언론의 신뢰까지 함께 무너뜨리니까요. 우리가 공론장에 선 사람들과 그 공론장을 조성하고 운영하는 언론에 기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신뢰라는 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최소한의 팩트 체크는 했으리라는 신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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