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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김재규묘 가봤더니.. 훼손된 추모비 네 글자

김종훈 입력 2021. 10. 26. 19:27 수정 2021. 10. 27.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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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유족, 지난해 5월 재심 청구 상태.. <김재규 평전> 저자 김삼웅 "언젠가 평가 받을 것"

[김종훈 기자]

▲ 김재규 재판 박정희 대통령 ‘시해’ 혐의로 재판정에 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혹자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후 ‘육본’이 아닌 ‘남산’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2020년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개봉했다.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이야기는 임상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그때 그 사람들>(한석규와 백윤식 주연)이라는 영화로 제작해서 개봉한 바 있다.
ⓒ 국가기록원
  
경기도 광주시 소재 ㅅ공원묘지, 42년 전 오늘(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무덤 위치를 묻자 삽을 든 공원묘역 인부들은 이내 인상을 구기며 "왜 묻는 거냐"라는 말부터 꺼냈다. 기자가 바로 "박정희 대통령 서거일이라 궁금해 찾아왔다"라고 말하자 인부 중 한 명이 경사가 가파른 언덕 하나를 가리키며 "저 끄트머리에 있다"라고 퉁명스레 답했다.

김재규. 10.26사건 발생 7개월 뒤인 1980년 5월 24일 내란죄 등으로 부하 4명과 함께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사형 집행 다음날 새벽 비밀리에 경기도 광주 소재의 현재 자리로 옮겨졌고, 무덤 위치 역시 당시 정부 관계자들이 정해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5일 기자가 현장을 직접 찾아보니, 공원묘역 인부들의 말대로 김재규의 무덤은 공원묘역 가장자리 가파른 언덕 꼭대기에 자리해 있었다. 이로 인해 무덤으로 향하는 길은 급격한 경사를 고려해 만들어진 시멘트 계단으로 쭉 이어져 있다. 계단을 따라 15분 정도 숨을 헐떡이며 올라가면 갈림길이 나오고, 그 갈림길 사이 우측 편에 자리한 소나무 너머에 김재규의 무덤이 있었다.

정으로 심하게 훼손된 추모비 글자 "의사"... "장군"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을 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무덤은 경기도 광주시 외곽 공원묘지에 자리해 있었다.
ⓒ 김종훈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을 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무덤은 경기도 광주시 외곽 공원묘지에 자리해 있었다.
ⓒ 김종훈
 
1980년 재판과정에서 김재규의 국선변호를 맡았던 고 강신옥 변호사가 1993년 남긴 김재규의 법정 최후진술을 살펴보면 김재규는 자신이 저지른 '10.26사태'에 대해 "10.26혁명"이라고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10.26 혁명은 이 나라 건국이념이요, 국시인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하여 혁명한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우리가 6.25를 통하여 수난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의 생명을 바쳐 지켜온 것입니다. 이 혁명이 어찌하여 내란죄로 심판받아야 합니까.10.26 혁명은 순수한 것입니다. 집권욕이나 사리사욕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오로지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입니다.

김재규는 "10.26 혁명은 서슬이 시퍼렇고 막강한 유신체제를 정면에서 도전하여 타파하는 데 성공했다"며 "박정희 대통령을 잃은 것은 가슴 아픈 일이고 마음 아픔을 비할 데가 없지만 유신 이후 7년이 경과되었고, 영구 집권이 보장된 이상 최소한 20년 내지 25년 내에는 자유민주 회복이 안 된다.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어 뒤돌아서서 그 원천을 두드려 부순 것"이라고 주장했다. 

1980년 5월 김재규는 사형을 당하기 전 가족들에게 "만약 내가 복권이 되면 '의사 김재규 장군지묘'라고 묘비에 적어다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그의 묘 좌측 비석에 '의사 김재규 장군 추모비(義士 金載圭 將軍 追慕碑)'라고 적힌 이유인데, 이 비석은 김재규 사망 9년 뒤인 1989년 초 '광주 전남 송죽회'가 세웠다. 송죽회는 유신철폐 운동에 앞장섰던 지역 재야인사들 중 일부의 모임이다.

그러나 추모비가 세워진 뒤 이 비석은 누군가에 의해 '의사'와 '장군' 네 글자가 정으로 심하게 쪼여 훼손됐다. 무덤 바로 옆에 놓인 재단에 새겨진 일부 글자 역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파손됐다.

박정희 고향 후배 김재규, 혁명가인가 반역자인가
  
 박정희(중앙)와 김재규(오른쪽), 그리고 차지철(왼족)
ⓒ 박도
 
정부 기록에 따르면 김재규는 1926년 3월 6일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같은 경상북도 구미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동농림학교와 경북대학교 농과대학을 거쳐 김천중고교에서 교직생활을 했다. 국군 창설 이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에 입교, 박정희와 함께 1946년 12월 제2기생으로 졸업했다. 이후 군 요직을 거쳐 1971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제대 후인 1973년 김재규는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제9대 국회의원이 되어 정치에 입문했다. 1974부터 1976년까지 건설부 장관을 역임하며 한국 기업의 중동진출에 크게 관여했다. 이후 1976년 12월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돼 명실공히 박정희 정권의 2인자로 올라섰다.

그러나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께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박정희와 차지철을 향해 총을 쐈다. 총을 쏜 이유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이어지는 상태. 다만 김재규가 쏜 총탄으로 영원할 것 같던 박정희의 1인 군사독재와 유신체제는 1961년 군사정변 후 정확히 18년 5개월 10일 만에 막을 내리게 됐다.

박정희 정권은 1972년 헌정 질서를 파괴하며 유신체제를 시작했지만 1970년대 후반에 이를수록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직면했다. 1979년 소비자 물가는 18.3%의 유례없는 상승률을 기록했고, 국제 관계에서도 1977년 출범한 미국 카터 정부가 한국의 인권 상황을 문제 삼아 갈등 상황에 놓여 있었다. 1978년 동일방직사건과 함평고구마수매사건 등이 일어나며 생존권 투쟁이 민주화 투쟁으로 발전했고, 1979년 8월 YH사태로 여공 김경숙이 신민당 당사 진압과정에서 사망하자 신민당 대표였던 김영삼은 박 대통령 사퇴를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의 정치적 투쟁을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김영삼이 정권에 의해 국회의원직까지 박탈당하자 그의 정치적 고향이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훗날 '부마항쟁'이라고 불리게 될 시위가 연이어 일어났다.

부마항쟁에 대해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강경진압을 주장했고, 김재규는 온건한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차지철은 재차 김재규와 중앙정보부의 무능으로 야당과 학생들이 날뛴다고 주장했고, 박 전 대통령 역시 "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비행조서만 쥐고 있으면 뭘 해. 부장이 저래서 정보부가 약하다는 소리를 듣지"라고 차지철의 발언을 감싸면서 김재규를 질책했다. 이에 김재규는 독일제 웰터권총을 집어들고 박정희와 차지철을 향해 각각 2발씩 총을 발사했다. 김재규는 이후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후에 사태는 '10.26 혁명'이라 말한 김재규의 기대와는 다르게 돌아간다. 사건 발생 다섯시간 만에 육군본부 벙커에서 체포된 김재규에 대해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는 은밀하고 신속하게 사건을 처리한다. 전두환이 본부장으로 있던 합수부는 "10.26이 우발적 살인"이라 정리했다. 이후 전두환은 김재규를 향해 '과대망상증 환자', '패륜아'라는 말을 써가며 공격했다. 그리고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던 1979년 12월 12일 국가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은 하극상을 통해 군권을 탈취한다.
 
 '10.26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재심청구 기자회견'이 26일 오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회의실에서 강신옥 변호사, 유족 대표 김성신(김재규 여동생의 장남), '김재규 재심 변호인단'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권우성
 
지난해 <김재규 장군 평전>을 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은 26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김재규 장군은 박정희 세력으로 이어진 수구 권력 카르텔이 현재까지 이어져온 탓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면서 "긴 역사로 보면 김재규의 10.26 의거는 언젠가는 정당하고 옳은 평가를 받을 거다. 우리는 김재규 장군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김재규 장군의 의거로 철옹성 같던 유신체제가 한순간 허물어진 겁니다. 41년 전 김재규 장군 스스로 민주제단에 바친 죽음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은 이유입니다. 하지만 소위 진보 세력과 언론에서는 김재규 장군에 대해 이야기 꺼내는 것조차 꺼려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박정희 정권부터 이어진 수구 권력에서 주장한 이야기만 퍼져나갔습니다."

2020년 5월 김재규 전 부장의 유족은 10.26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다. 유족과 변호인단은 재심을 청구한 이유에 대해 "신군부가 정권 장악을 위해 10.26을 내란 목적의 살인으로 왜곡했다"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공개된 김재규 재판육성 기록에 따르면 재판 과정에서 김재규의 발언은 재판장에 의해 끊임없이 제지당했다. 관련된 공판 조서 역시 삭제됐다. 결국 김재규는 대법원 판결 사흘 만인 지난 1980년 5월 24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한 뒤 현재 무덤이 자리한 경기도 광주 공원묘지 한쪽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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